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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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4. 각종 문헌 자료 소개

 1) 안렴사공(按廉使公) 김사렴(金士廉)의 행적 (2003. 8. 12. 주회(안) 제공)

 

   출전 : <안렴사공 신도비문 : 1840이전, 남공철>

■ 사서에 안렴사공 행적이 전하지 않음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슬프다! 고려말 혁명할 때에 절개를 지키고 이름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그런데 鄭麟趾가 史傳을 지을 때에 모두 빼놓고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聖祖의 본의겠는가?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기왕부터 嫌疑(혐의)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말살시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래서야 장차 어찌 앞날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겠는가?

 

 2) 按廉使公 神道碑文(안렴사공 신도비문)  (2003. 8. 12. 주회(안) 제공)

 

오직 金氏는 朴氏와 昔氏의 뒤를 繼承하여 徐羅(신라의 경주)에서 王이 됨으로부터 38世를 전하여 敬順王에 이르자 나라를 高麗에 移讓하고 그 子孫은 四方으로 흩어져 살게 되니 官界出身도 많고 名聲과 德望이 높은 大族으로서 그중 上洛花山(=안동 고호)에 살고 있는 자는 그 譜系가 가장 오래되었고 또 顯達하였다.

 

公의 先代에서부터 上洛(=안동)에 살았음으로 後世에 와서 花山人이라고 일컬었다. 高麗高宗때에 方慶 어른께서 계셨으니 벼슬이 翰林學士太尉平章事를 지내시고 일찍이 蒙哥篤(몽가독)을 挽留하여 椒島(초도)에서 사슴사냥을 못하게 禁하고 珍島와 耽羅를 平定하고 再次 일본을 征伐하여 功을 세우고 聖節祝賀使로 원나라에 들어가시니 元帝는 太淸宮에 大宴을 排設하고 席次를 亡命한 송나라 群臣보다 上席에 앉히고 虎頭金牌를 주니 陪臣으로서 金符를 차게된 것은 太尉公(=충렬공)으로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일이다.

 

이 어른(=충렬공)께서 恂을 낳으시니 判三事를 지내고 諡號를 文英公이라 하였다. 이 분께서 永煦를 낳으시니 左政丞을 지냈으며 伯兄 永暾과 함께 조적의 난을 平定함으로써 功臣에 封하였다. 고려 忠惠王이 元나라로 잡혀갈 때에 侍從하던 百官들이 모두 달아나 숨고 하였으나 홀로 왕을 護衛하고 가지 않았다. 이 어른께서 蕆을 나셨는데 知密直司事를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 증조 조부 부친 4세가 되신다.

 

공의 휘는 士廉이요 스스로 號를 梧隱居士라고 하였다. 少時로부터 學問에 뜻을 두어 文詞에 能하셨다. 恭愍王 初年에 文科及第하여 벼슬은 按廉使를 지냈으며 정문충공 몽주와 이문정공 색과 더불어 서로 交友하였으며 모두가 바른 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辛旽이 執權하매 왕과 公卿大夫가 모두 굽실거리며 그에게 기울어졌다. 14년에 旽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태학사를 封하고 수정이순 논도섭리 보세공신호를 주고 왕이 자주 微行으로 그 집에 나가서 공을 치고 연등회 (=고려때의 국가제전. 정월 보름날의 등불놀이)를 개최하고 상으로 銀甁(은병)과 안장 있는 말과 綾羅(능라-비단)와 繡緞(수단)등을 下賜하니 공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旽은 바른 사람이 못 되며 後日에 반드시 政事를 混亂시키면 고려의 社稷(=정부)이 장차 血食(=피묻은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어 제사 지낸다는 뜻, 血祀)을 누리지 못한다.” 고 하였다.

 

當時에 좌사의대부 鄭樞와 좌정언 李存吾가 旽의 處事를 말하다가 樞는 職位를 降等시켜 東萊로 보내고 李存吾는 長沙監務로 내쫓으니 朝廷과 백성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으나 公만이 홀로 正論을 提起하니 이로부터 剛直하다는 名聲이 國內에 떨쳤다.

 

이태조가 王位를 물려받음을 당하여 公이 마침내 淸州로 避身 隱居 할새 恒常 이태조가 있는 漢陽을 向하지 앉지 않고 매양 스스로 “烈女는 두 지아비를 고치지 않고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는 古祠를 외웠다. 이태조가 公을 司諫院 左司諫으로 命하고 屢次 불렀으나 끝내 不應하시고 마침내 陶山(=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으로 들어 가셔서 굳게 문을 닫고 일체 사람을 대하지 않았으며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숙종4년에 그 고을 儒生들이 發議하여 公의 祠堂을 松泉에 세우고 祭祀를 지내더니

그후 3년 되던 해에 儒生 李澤夏 등 120인이 大闕에 들어가 글을 올려 祠院에 대하여 이름을 지어 賜額하기를 請하니 왕이 關係當局에 명하여 善處하라고 하였으나 마침 朝廷에 일이 있어서 미처 施行치 못하였다.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狷(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狷의 이름은 개견변(犭)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狷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슬프다! 고려말 혁명할 때에 절개를 지키고 이름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그런데 鄭麟趾가 史傳을 지을 때에 모두 빼놓고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聖祖의 본의겠는가?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기왕부터 嫌疑(혐의)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말살시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래서야 장차 어찌 앞날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겠는가?

 

대체로 슬픈 일이로다. 지금에 와서 공의 후손 亻+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와 碑銘(=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公轍(공철)이 이에 여러 선생의 事蹟을 말미에 실리어 썩지 않고 오래 전하고자 하니 이 글을 읽는 자는 碑를 가리켜 史記라고도 할 것이고 道理도 명확하다고 이를 것이다.

 

公이 순흥안씨의 정당문학 순성군 元崇의 따님과 결혼하여 5남1녀를 두시니 장남은 안찰사 侃(간)이요, 2남은 정랑 湋(위)요, 3남은 절도사 淛(제)요, 4남은 소윤 瀹(약)이요, 5남은 좌랑 湜(식)이요 여는 목사 馬希遠에게로 출가하였다. 소윤공(=약)은 1남을 두셨는데 휘는 遇周(우주)요 지주사 벼슬을 지냈고 좌랑공(=식)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自麗(자려)요 직장 벼슬을 지냈으며, 차남은 自荊(자형)이니 서령을 지냈다. 그 자손이 지금까지 17,8세를 내려왔다.

 

銘文에 하였으되 과감하고 강직한 태위공(=방경)이시며 공이 크고 높으시도다. 탐라를 평정하고 일본을 양차 정벌하여 이름은 중국까지 떨치고 금패는 번적거렸도다. 공(=사렴)이 그 뒤를 이어서 소년에 등과하여 간악한 辛旽을 배격함에 있어 言辭가 엄숙하고 義理가 분명하였으며 이태조가 등극함에 호걸이 구름같이 따르되 공과 친한 동지는 정문충공(=몽주)이 있더니 문충공은 이미 순절하고 공은 산중에 숨었도다. 나는 망명한 신하로서 정성을 전왕께 바칠뿐 이었도다.

 

옥새(=임금의 직인) 찍은 친서로 여러번 불러도 공의 뜻은 더욱 굳으니 殷나라에 三仁(=微子 箕子 比干)이 있어서 周나라의 광채를 빛냄과 같도다. 上黨 언덕에 4척 높이 무덤이 있으니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한 것은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 함이니 나라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은 어찌 그 極함이 있으리오. 거북바탕과 용머리 碑石이 墓門에 새겨 있으니 여러 강호제현 께서는 이 銘言(=碑文)을 敬虔(경건)히 하소서

 

가선대부 예조참판 동지 경연 실록사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 지제교 外裔(예외) 南公轍 지음

 

  3) 영삼사사공(김천-안렴사공의 부친) 연보 (2003. 8. 12. 주회(안) 제공)

 

○ 정간공(김영후)과 上黨군부인 청주한씨(父한보 祖한강 曾祖한광윤)와의 사이에서 2남(김천,김장)중 장자로 출생하였다. ---부 정간공 생년 1292년과 2자 사렴의 생년 1335년을 비교해 보면 영삼사사공의 생년은 1312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음---

○ 고려조에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호군을 지냈으며, 원나라로부터 승무랑 자승고경점의 벼슬을 선수받기도 하였다.

○ 그(=김영후)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사>

○ 또 후일 조선조에서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에 추증되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이는 아드님인 익원공의 勳貴로 인함이다.

○ 배위 三韓국대부인 현풍곽씨(父곽원진, 祖곽돈효, 曾祖곽용, 外祖조운경) 와의 사이에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를 두었다.

○ 묘는 실전되어 오창면 모정리 고위와 동원에 설단 분향한다.

*** 위 연보는 <안렴사공파세보>를 저본으로 고려사 기록 1건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4) 정간공(김영후)과 영삼사사공(김천) 설단 (2003. 8. 12. 주회(안) 제공)

 

정간공의 아버지 문영공(김순)의 장지와 백형 김영돈의 거처가 개성인 점과 정간공께서 고위관직에 계시어 개성 어딘가에 거주하셨을 것이므로 정간공과 영삼사사공의 묘도 개성 인근 어딘가에 있다가 실전된 상태로 추정되고, 기록도 전무하여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62년 정간공의 후손인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3파에서 합력하여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김사렴) 묘역 좌하에 정간공과 영삼사사공 설단을 조성하였다가, 1993년에 중수하고, 1996년 묘역 좌상으로 이설하였다가, 2000년 수해로 인하여 다시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안렴사공의 형제 자매 (2003. 8. 12. 주회(안) 제공)

 

   (1) 안렴사공 백형 판사공 김사겸(金士兼) --- 무후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사렴의 생년 1335년을 감안해 볼 때, 판사공의 생년은 1333년 전후로 추정---

○1365년 종부령을 지냈고, 당시 삼사우윤 이창로, 군부판서 염흥방은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벼슬은 판사를 지냈고,

○배위 청주한씨(父한공의, 祖한악, 曾祖한사기, 外祖경사만)와의 사이에 1남(김우), 2녀(윤신보, 유소문에 출가)를 두었다.

○자 김우(金瑀,金禑)는 1365년 權務이었고, 벼슬은 부사를 지냈다.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위 연보는 <안렴사공파세보>와 <1365 이색찬 한공의 묘지명> 기록으로 편집하였음***

 

   (2) 안렴사공 동생 충강공 김사안(金士安) --- 무후

○?∼1391(공양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방경(方慶)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낸 천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형이다.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 사렴의 생년 1335년과 동생 사형의 생년 1341년을 감안하고, 조부 정간공의 졸년 1361년 이전에 김사안의 나이 20세를 넘었음을 감안해 볼 때, 충강공의 생년은 1338년 전후이었을 것으로 추정---

○김영후(1292-1361)의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1359년 감군위참군사를 지냈고 <1359 처외조부 민사평 묘지명>

○1370년 전 밀직사부사 이었고, 당시 전 종부령 최유경, 박사 이존사 등은 손아래 동서들이었다. <1370 처모 김묘처민씨 묘지명>

○1374년 밀직부사를 지냈고 <1374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따님) 묘지명>

○1388년(우왕14) 문하시중 이색, 첨서 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사안(金士安)을 명나라로 보내 새해를 경축하고 겸하여 명나라 관리를 파견하여 국정(國政)을 감독할 것과 청년 자제의 명나라 유학을 허가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사안을 따라갔던 상인(商人) 백거마(白巨麻)가 많은 금, 은을 휴대하고 갔던 바 이숭인이 그 액수를 제한케 하였다.

이색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숭인, 김사안 등과 함께 신우를 여흥부(驢興府)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이색은 앞질러 혼자 가서 만났다.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여말에 형 안렴사공(김사렴)이 청주 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운곡 원천석 등이 찾아와 망국의 한을 달래는 자리에서 석루(?자,호)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1860 화해사전>

○1391년(공양왕 신미3) 9월 경인일에 前 전라도 관찰사 김사안(金士安)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3일간의 사업을 정지하였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를 주었다.

○배위는 재당숙 묘(昴)의 9녀중 맏딸이나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 *후에 족보 제작과정에서 당내혼이라 하여 누락시킨 듯하다. <1359 처외조부 민사평 묘지명>, <1370 처모 김묘처민씨 묘지명>, <1374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따님) 묘지명> 무후하여 후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묘소도 알 길이 없다.

*** 위 연보는 고려사를 저본으로 하여 안렴사공파세보와 묘지명 3건 기록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음***

 

   (3) 안렴사공 동생 익원공 김사형(金士衡) --- 익원공파의 파조

○1341∼1407(태종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이다.

○영삼사사공(김천)과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사이의 4남(사겸,사렴,사안,사형) 1녀(허강에 출가)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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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士廉(안렴사), 金士衡(좌정승) 형제는 고려의 멸망-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金士廉은 고려가 망하자 청주 도산에 은거 두문불출했으며 한양쪽을 향하여 앉은 일조차 없었다는 節臣.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러 佐司諫에 임명했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 金士衡은 달랐다. 고려말 삼사우사를 지냈던 그는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됐으며, 태종때는 좌정승에까지 올랐다.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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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는 충렬공 김방경의 4대손인 士廉(1335∼1405)의 계열로서, 사렴은 안렴사를 지냈고, 호를 梧隱이라 하였다. 그는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절신인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도 도의로써 교유하였고, 조선건국후 태조가 등극하자 두문불출하였고 이태조가 수차 높은 벼슬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청주 오근으로 낙향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그의 아우인 익원공 士衡이 조선의 건국에 동참하여 공신호를 받았고, 그를 통하여 형인 안렴사공을 등용의 뜻을 전하였는데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집안에 전해진다.

아우인 익원공이 오근에 이르자 가마에서 미쳐 나오기 전에 휘장 틈으로 손을 디밀어 "손이나 만져 보자"고 하면서 이르기를 "가늘 길이 갈리고 뜻이 다르지만 형제간의 정이야 어찌 다르겠느냐" 하면서 그대로 돌려 보내고 이내 도산으로 은둔하여 그는 이후 한양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연기군종친회>

***위 내용은 여말선초 혁명시절의 갈림길에 선 안렴사공과 익원공 관련 기록임. 익원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익원공파 소개란 참조***

 

   (4) 허강의 처 ---안렴사공 자매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고려사>

 

6) 안렴사공의 생몰년에 대하여 (2003. 2. 16. 주회(안) 제공)

 

  (1)<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에서

안렴사공(김사렴) 할아버지의 생몰년은 송천서원 창건문헌에 근거하여 보면 1335년 생, 1405년 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전 : <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 오은 안렴사공의 생몰년대 考

송천서원 창건당시(=1708) 문현에 '公生於元至元元年乙亥 卒于永樂乙酉'라고 한 것을 참고로 하여 연대를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안렴사공께서는 1335년 (고려충숙왕4년, 원나라 지원원년을해) 에 출생하시어 1405년 (이조태종5, 영락3, 을유) 에 졸하시다.

공께서는 58세이신 1392년 (공양왕4, 임신) 7월에 이태조 등극하니 도산에 들어가 여생을 은거하시다가 향년 71에 仙化하시다.

 

 2)기타 문헌 내용 (2003. 2. 16. 주회(안) 제공)

 안렴사공(김사렴)의 생몰년은 송천서원 창건문헌에 의거하여 1335-1405임을 알 수 있으나, 아래에 열거하는 여러 자료를 볼 때 1330년 전후에 출생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검토해야 할 사항입니다.

 

  (2)<디지털한국학>에서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4형제(김사겸, 김사렴, 김사안, 김사형) 중에서 막내인 익원공(김사형)의 출생년도가 1333년이라면 안렴사공(김사렴)의 출생년도는 1330년 전후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음

 

  (3)<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에서

그(=김영후)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 정간공(김영후)의 몰년인 1361년 이전에 김사안, 김사형의 나이 20세를 넘었다면 김사형의 경우 1341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볼 때, 일부 문중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김사형의 생몰년 (1341-1407)은 디지털한국학에 김사형의 생몰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1333-1407) 과 비교하여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

 

  (4) 안렴사공파세보(1914, 갑인보)와 오창지에서

안렴사공(김사렴)은 순흥안씨(안원숭의 6녀중 1녀)와의 사이에 6남(김간, 인비, 김위, 김제, 김약, 김식) 1녀(마희원에 출가)를 두었는데, 김사렴의 막내아들인 6남 金湜은 안렴사공파세보(1914, 갑인보)에 의하면 이조좌랑을 지냈고, "태조癸酉(=1393) 文科" 라 기록되어 있고, 오창지 등 향토자료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에 출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홈페이지 <디지털한국학> 조선 문과방목에,

1356년(丙申)생.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으로 문과에 급제하신 본관 미상의 金湜이라는 분이 있다.

 

  (6) <디지털한국학>에서

 김식(金湜)

태조(太祖)2년(1393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3(同進士3).  인적사항. 생년(生年)-1356년,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부(父) 김휘중(金輝中).  관직(官職) 형조/판서&(刑曹/判書&)

☞ 전력(前歷)은 생원(生員), 관직(官職)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으로 되어 있으며, 부(父) 김휘중(金輝中)으로 되어 있어 안렴사공의 막내아들 김식은 아닌 것 같으나, 안렴사공(김사렴)의 다른 이름도 있을 수 있으며, 안렴사공의 유언으로 자손 중에서 여조에 출사한 자는 이조에 다시 출사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므로 신분을 숨기거나 문과방목 작성시 다르게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7) 종합 추정

 

 *☞김사렴의 생년을 1330년 전후로 보고, 1356년에 태어난 김식과는 25년 정도 나이 차이를 보면 이분이 김사렴의 6남1녀중 막내 아들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제간의 터울을 1,2년으로 단순계산해서 생몰년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생몰년 추정>

고조부 (1/3) 김방경 1212-1300     증조부 (3/5)김순 1258-1321    조부 (3/3)김영후 1292-1361    부 (1/2)김천 ?1310-    형 (1/4)김사겸 ?1328-   

 

★ (2/4)김사렴 ?1330- (문중자료 1335-1405)    제 (3/4)김사안 ?1331-1391(공양왕 3)    제 (4/4)김사형 1333-1407(충혜왕2-태종7) (문중자료 1341-1407)    자 (1/7)김간 ?1347-    자 (2/7)인비 ?1348-    녀 (3/7)장녀 ?1350-    자 (4/7)김위 ?1351-    자 (5/7)김제 ?1353- <1377진사, 1382문과>    자 (6/7)김약 ?1354-    자 ★(7/7)김식 ?1356- <1393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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