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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2. 주회(안) 제공)
☞庚寅 (순조30, 1830)년 7월 하순에 외손인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지은 묘갈명
▣ 안렴사김공 묘갈명 (按廉使金公墓碣銘) 고려를 滅하고 조선왕조를 세울 즈음에 충신 義士들중 宰相이 될 만하게 우뚝한 인물은 圃隱(포은 정몽주) 冶隱(야은 길재) 같은 여러 선생들이었다. 杜門洞(두문동)의 不朝峴(부조현)에 은거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節操를 지키면서 숨어 살다가 죽은 이들의 이름이 없어져 역사책에 전하지 않아 또한 考證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斯文(사문) ★金 가 어느날 찾아와서 그의 선조인 고려 안렴사 梧隱 선생의 遺事(유사)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데 절반도 아직 못 보아 그를 위하여 대단히 감개스러워 비로소 上述한 여러 선생들 외에 과연 또 고려에 한 충신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 심정은 고통스럽고 그 사실은 기이한데 다만 나는 孤陋(고루)하여 그런 사실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이를 마땅히 士官이 크게 떠벌이어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되리라고 하였다.
★김내가 또 말하기를 "선조의 무덤을 오랫동안 잃어버려 복구하려다 그만둔 지가 이미 93년인데 자손들이 零替(영체)하여 아직까지 碑文을 새겨 드러내지 못하고 이제야 비석을 세우니 공에 대한 글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자네의 선조는 실로 살아서나 죽었어도 明夷(명이)의 卦(괘)를 自處하여 400년이 지난 후에 무덤이 비로소 나타났으니, 이는 天道가 크게 밝아 반드시 충신의 자취를 세상에 밝히어 사람들의 耳目에 비치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名望은 一世에 신임을 받고 문장은 百代에 중하게 여겼던 것이지마는 족히 숨은 덕을 발휘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나(=남공철)는 선생(=김사렴)에게 외손이 되니 어찌 글로써 그분이 어떠했는지를 힘껏 밝히려 하지 않았겠는가. ★김내가 더욱 간절히 청하니 나 또한 마침내 굳이 사양하지 못했다.
살펴보니 선생의 諱(휘-이름)는 士廉이고 호는 梧隱인데, 系統은 신라 ★敬順王에서 나왔다. 그로부터 15대를 지나 三重大匡 門下侍中 上洛公(삼중대광 문하시중 상락공) ★方慶이 있었는데 큰 공을 세운 업적이 高麗史에 있으며 이 분이 선생의 高祖이다.
증조는 判三司事 上洛伯(판삼사사 상락백) ★恂이고, 조부는 三重大匡 左政丞 大提學 上洛候(삼중대광 좌정승 대제학 상락후) ★永煦이다. 아버지는 領三司 上洛君(영삼사 상락군) ★ (천)이고
어머니는 三韓 國大夫人(삼한 국대부인) 현풍곽씨로서 성균관 제주 포산군 ★元振의 따님이다.
선생은 여러 代로 公卿을 지낸 우리나라 甲族이 되어 젊은 나이에 학문과 氣節로 이름을 날려 一世를 빛내고 포은 야은 등 여러 선생들과 더불어 서로 사이 좋은 벗이었다.
안렴사 벼슬을 하였는데 고려의 정치가 紊亂(문란)해지자 여러번 올바르게 아뢰어 諫(간)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게 되니 淸州의 陶山에 은거하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한양(=서울)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고 한다.
이 태조가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여러번 左司諫(좌사간) 벼슬을 내리겠다고 불러 들였으나 끝내 응하지 아니 하였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열녀도 오히려 변절하지 않거늘 충신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랴" 하였다.
臨終때 여러 아들들에게 訓戒하기를 "나는 고려왕조의 옛 신하로서 집안 대대로 정승이 되었는데, 이미 국가를 보존할 수 없고 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없어지지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우리 임금과 조상들을 저승에서 뵙겠는가. 내가 죽거든 깊은 산에다 장사지내어 봉분도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하여 아무개의 무덤이라고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죽으니 여러 자식들이 유언대로 장례를 치렀는데 봉분을 안 모으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후일에 선비를 시험(과거)을 본 적이 있는데, 遺命平塚(유명평총-유언대로 평평한 무덤을 만들었다)을 제목으로 삼았다.
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같은 임금 34년 戊子(무자-1708)에 청주의 人士들이 고을의 서쪽에 祠院(사원)을 세우고 3년을 넘겨 辛卯년에 上疏하여 賜額을 요청하였으나 아 奇異하도다.
配位(=아내) 순흥안씨는 아버지가 문혜공 ★元崇(원숭)의 따님이다.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侃(간) 관찰사, 다음은 ★ (제) 절도사, 다음은 ★ (약) 소윤, 다음은 ★湜 정랑이었다. 후손들은 번창하여 아주 많아 다 쓸 수 없다.
6대손 ★公亮은 주계군에게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湖陰 ★鄭士龍이 그 墓碑銘을 짓고 南溪 ★朴世采가 東儒師友錄에 실었다.
공량의 從弟 ★公藝는 예조참의로서 바른 길을 행함이 극히 高尙했는데, 遯齋(둔대) ★成世昌이 그 묘비명을 썼다.
7대손 ★澍는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으로 上使(상사)가 되어 宗系辨誣(종계변무) 하러 갔다가 북경에서 죽으니 宗伯 花山君(종백 화산군)을 追贈하였다.
8대손 ★洛瑞는 栗谷의 門人이고, 그의 아들 ★王+言(언)은 丙子년(1636)에 성천부사로서 뙤놈(청나라 군사)들을 꾸짖었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추증하고 旌門을 세워 表彰하며 世子翊貴로서 贈贊成을 더 하였는데 尤菴 ★宋時烈이 그 묘비명을 지었다.
10대손 ★天章은 정조12 (1788)에 외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아니하고 죽으니 벼슬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아 芝草(지초)가 나는 땅과 단 물이 샘솟는 근원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니 어찌 기이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선생은 張良이 韓나라를 도운 시대에 箕子가 종노릇하지 않은 仁을 이루었는데, 비록 포은과 함께 순절할 수는 없었으나 대개 야은과 더불어 스스로 절개를 지키려 했으니 영원히 아름다운 바가 오직 王 (왕촉)의 한마디 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무덤을 평평하게 해서까지 충성심을 나타냄 같은 것은 모르겠거니와 옛적에도 이런 사실이 있었던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遺民(유민)의 烈士들이 매우 슬퍼하여 눈물을 삼키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세대가 변하고 역사가 흘러 물이 잦아져 바위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실제의 形蹟이 나타난 것이다.
숨었던 무덤이 완전한 봉분으로 된 것은 먼 후손들의 마음에 있었다. 참으로 그렇게 꼬집어 내어 빛나도록 한 것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진대 헌생의 넋에게 불어보아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리라.
銘에 이르렀다.
상락공을 조상으로 삼았으니 前代의 광영을 알 만하네 포은 야은과 친구로 사귀었으니 친한 정분이 여기에 있었다 하겠다. 나라와 집이 없어져서 이미 흔거하는 신세 되었구려 귀양살이할 때 한 말이 영원히 아름답게 되었구나 말하기를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조를 뵈오리오" 하더니 "내 무덤을 펀펀하게 해서 여기에다 표하라" 하였다네 잠 못 이루는 괴로운 마음을 하늘에 물어볼 수 있지 떳떳한 윤리가 있는 바이라 없애려 하나 더욱 나타나도다 옛 무덤에 봉분을 모으고 새 祠堂에 영령을 모셨다. 마음과 자취가 모두 깨끗하여 역사에 길이 전할 만하도다 도산의 언덕 그 무덤에 비석을 세워 標示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도 고려 안렴사에게 당연히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
庚寅 (순조30-1830) 년 7월 하순에 외손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南公轍 짓다. 따라서 남공철 선생께서도 오은공의 직품이 2품이상에 해당되기에 신도비문을 찬수한 것이다. 오은공의 사전직에 정당문학 문하시랑이었던 참고문헌 해동인물지 및 안동김씨 보승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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