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13. 각종 문헌 기록 자료

      (2003. 2. 2. 주회(안) 제공)

 1)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김사렴

김사렴은 평장사 방경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어 지식과 문재가 뛰어나더니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주, 이색과 친교가 깊고 모두들 임금에게 직간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신돈이 정권을 전단할 때 왕을 비롯하여 공경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우러러 섬기었다. 공민왕 14년에 신돈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 태학사 수정리순론섭리보세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왕이 자주 그 집에 행차하여 공치기와 연등놀이 연회를 갖고 상을 주되 은병, 안장, 능라금주, 천수필식을 주며 즐기었다.

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태조대왕이 등극하자 사렴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가 사렴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죽음에 임하여 여러 자손에게 이르되 "나는 려조의 대대로 내려오는 충신으로서 이미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붙잡지 못하였으며 또한 나라가 망함에 몸을 순국치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들어가서 선대왕과 선인을 뵈올까 보냐" 하였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자손중에 이미 벼슬했던 자는 다시 사환에 나가지 말라" 유언하였다.

숙종 4년 이고장 선비들의 공의로 송천서원을 세우고 향사하니라.

 

 2) 안렴사공 신도비명 (1840이전, 남공철)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 (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의 이름은 개견변( )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3) 대동기문 (1925)

 

■新完譯 大東奇聞 上,中,下 (2000, 이민주 역, 명문당)

下 p347 金士廉

김사렴은 안동 사람이니 평장사 방경의 자손이다.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文詞에 풍부했다.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고 정몽주, 이색 등과 가깝게 사귀어 모두 곧게 간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신돈이 用事할 때 임금께 글을 올려 말하기를

"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뒤에 반드시 정치가 어지러워져서 고려의 사직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는데 태조가 즉위하자 사렴은 드디어 청주에 숨어서 일찍이 漢南을 향해서 앉지 않고 매양 스스로 외우기를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치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했다.

 

태조가 사렴을 배하여 좌사간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드디어 陶山으로 들어가 더욱 문을 닫고 손님을 끊고서 졸할 때에 임하여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자 또 능히 몸이 殉國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先王와 先人을 뵙겠느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 속에 장사 지내고 흙을 쌓아 올리거나 돌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 이미 벼슬한 자라도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했다.

 

숙종4년에 고향의 선비들이 松泉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高麗名臣傳>

 

4)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청시상언 경위

서기 1818년 (순조18 戊寅) 2월에 鄕儒 이의병 선생이 장두에서 순조가 수원에 거동하는 행차 앞에서 상소하여 시호 하사하기를 소청했다.

사림들의 사모하는 마음 몇백 세를 내려가도 잊어지지 않고 유전하고 있어서 그의 충절이 씻어지지 않을 것이다.

 

 5) 오은김선생 請諡上言草 (1818 이의병)

 

생략하옵고 충정을 표창하고 절의를 장려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의 범전이요 어진이를 높이고 의절있는 이를 사모하는 것은 儒生들의 공정한 예론이라.

진실로 충효대절이 있어서 고금에 쟁쟁하게 빛나며 그 난 곳에서는 올바를 자세로 공경하여 예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반드시 표창하여 風聲을 세울 것이니, 신의 몸들은 가만히 엎드려 고려 안렴사 신 김사렴을 생각하여 보건대 려말 때 문충공 신 정몽주와 문정공 신 이색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귄 친구요 또 정추 이존오를 더불어 직간 잘 하기로 유명하여 한때 여러 현인들의 사적이 려사에 가지런히 실려 있습니다.

 

대개가 공양왕때 아조 개국공신들이 分遣(분견)되어 나갈 적에 조견과 김사렴이 영남과 호서로 각각 봉명하고, 안렴사로 있을 때 려조가 혁명됨에 미치니 조견은 돌아가서 과천 관악에 숨고 김사렴은 청주 오근촌에 은퇴하여 이 두분의 處義한 것이 대략 서로 같았습니다.

 

이태조 천조하면서 사렴을 좌사간으로 삼고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오근리 도산에 들어가 숨어 있고 싸리문을 굳게 닫고 세상과 끊고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며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려조적 옛 신하로 세대 정승으로 임금을 도와 나라를 붙들지 못하였고 능히 순직도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요 만고의 불충이라.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과 선인을 지하에서 뵈이리요.

나 죽은 후에 심산에 묻고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아서 산과 같이 편편히 하여 이 뒤 사람들이 김사렴의 묘라고 알지 못하게 하라. 또 나의 자손으로 려조에 벼슬한 사람은 이조에 벼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 옛 임금님을 위하여 절의와 자제에게 교훈을 준 것이 모두 온전하여 고려사와 서원읍지에 그 본말이 소상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 뒤에 試士官이 와서 遺命平塚(유명평총) 4자와 一片陶山 萬古首陽 (일편도산 만고수양) 이라 한 8자로 시제를 삼아서 백대 뒤에도 그 공정한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본도 儒生들이 肅廟戊子(숙묘무자=1708)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 이듬 이듬해인 辛卯년에(=1711) 도내 유생 ★이택하와 여러분들이 글을 올려 請額(청액)하여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령까지 있었는데 마침 조정에 일이 있어서 시행을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 淸風苦節(청풍고절)을 논한다면 족히 백이숙제와 같다 해도 부끄럽지 않고 정몽주, 이색, 정추, 이존오, 조견에게 비해 보아도 다 같은 그 분들인데 특히 자손의 잔미함과 士論의 침체로 인하여 초라한 헌 사당에 恩賜(은사)하신 액자를 못 달고 그의 式典도 못 거행하였으니 이게 어찌 聖朝의 欠典(흠전)이 아니며 유림들에 한탄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몸들은 본조 4백여년내 여조를 위하여 절의를 남긴 분에게 표창한 의식을 삼가 생각하여 보면 아름답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이 정몽주 같이 이하 조견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다 이미 표정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고 두문동 70여인에 이르기까지 다 비석을 세워 절의를 표하게 하였으나 유독 김사렴 한 사람만이 여기에 빠져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몸들은 감히 천리길에 짚신감 발로 서로 이끌고 와 법가 앞에서 부르며 부르짖어 엎드려 비옵건대 천지 부모님께서는 굽어 살피사 김사렴에게 賜諡(사시)의 명을 내리옵소서

 

당저무인2월 능행시 (1818년, 순조30년 무인 2월)

장두 신 이의병

 

  6)<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2003. 11. 7. 윤만(문) 제공)

 

○ 청주(淸州) 송천서원(宋泉書院)숙종 기묘년에 세웠다. : 김사렴(金士廉)벼슬은 안렴사(按廉使)이다.

 

b0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