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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제학공(휘 익달)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한 문숙공(휘 제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광해3)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일대(一代)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의 아버지 제갑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호남·영남 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었다.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 있다
<낙관>(<槿域印藪>. 국회도서관. 1968. 313P. 2002. 7. 19. 항용(제) 제공)
<안동김씨 삼강록 내의 기록내용>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5, 윤만(문) 제공) 1)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
모든 호종하는 관원들은 서로 질서를 차리지 못하여 그 오고간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없어 우선 아문(衙門)을 분류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기재잡기》ㆍ다음도 같다. 영상 이산해ㆍ좌상 유성룡ㆍ우상 이양원ㆍ좌찬성 최황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황해도 순찰사로 갔다. 사인 윤승훈(尹承勳)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빠졌다.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평안도 순찰사로 갔다. ㆍ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 ㆍ정랑 조정(趙挺)ㆍ유영경(柳永慶)최흥원의 종사(從事)로 갔다. ㆍ정광적(鄭光績)강원도 어사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좌랑 이호민(李好閔)이원익의 종사로 갔다. ㆍ김시헌(金時獻)이외는 모두 빠졌다
호조 판서 한준(韓準)참판 이하는 기억하지 못한다.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죽은 지 이틀째 ㆍ참판 박응복(朴應福)ㆍ좌랑 이경류(李慶流)상주에서 죽었다. 이외는 기억하지 못한다.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개성까지 와서 뒤떨어졌다. ㆍ구성(具宬)개성서 파직 ㆍ송순(宋諄)파주 와서 뒤떨어졌다. ㆍ유희서(柳熙緖)김명원의 종사로 갔다. ㆍ좌랑 서성(徐渻)개성 와서 뒤떨어졌다. ㆍ박동량(朴東亮)ㆍ이형(이覮)영변에 이르러 세자를 따라갔다. ㆍ최관(崔瓘)평양에 와서 병으로 죽었다.
형조판서 이하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공조 참판 이덕형적중에 가서 안 돌아왔다. 판서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한성 판윤 홍여순(洪汝諄)ㆍ우윤 박숭원(朴崇元)이외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사헌 이헌국(李憲國)ㆍ집의 권협(權悏)평양에 이르러 상소하고 갔다. ㆍ장령 정희번(鄭姬藩)ㆍ이유중(李有中)ㆍ지평 이경기(李慶禥)박천에 이르러 말없이 갔다. ㆍ남근(南瑾)처음부터 안 왔다.
대사간 김찬(金瓚)평양에 이르러 상소하고 갔다. ㆍ사간 이국(李●)ㆍ헌납 이정신(李廷臣)영변에 와서 말없이 갔다. ㆍ정언 정사신(鄭士信)당초 안왔다. ㆍ황붕(黃鵬)평양에서 뒤떨어졌다. 교리 이유징(李幼澄)ㆍ심대(沈岱)ㆍ수찬 박동현(朴東賢)ㆍ임몽정(任蒙正)당초 안 왔다. ㆍ부수찬 윤섬(尹暹)ㆍ박지(朴箎)이 두 사람은 상주에서 전사
도승지 이항복ㆍ좌승지 이충원ㆍ우승지 이정형ㆍ좌부승지 노직(盧稷)ㆍ우부승지 신잡(申磼)ㆍ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평양에서 뒤떨어졌다. ㆍ주서 박정현(朴鼎賢)안주에서 말없이 갔다. ㆍ임취정(任就正)안주에서 말없이 갔다.
봉교 기자헌(奇自獻)뒤쫓아 평양으로 왔다. ㆍ대교 윤경립(尹敬立)소를 올리고 아버지 임소(任所)에 갔다. ㆍ조존세(趙存世)안주에서 말없이 갔다. ㆍ검열 김선여(金善餘)안주에서 말없이 갔다. ㆍ강수준(姜秀峻)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 ㆍ김의원(金義元)이 나머지는 빠졌다.
기성군(杞城君)유홍(兪泓)ㆍ해평군 윤근수ㆍ해원군 윤두수.
호군 이산보(李山甫)ㆍ유근(柳根)ㆍ홍진(洪進)ㆍ홍인상(洪麟祥)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ㆍ민준(閔濬)ㆍ윤자신(尹自新)ㆍ황정식(黃廷式)ㆍ황정립(黃廷立)ㆍ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한관(閑官)과 산관(散官)으로 따른 사람은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대사성 임국로(任國老)평양에서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ㆍ직강 심우승(沈友勝)ㆍ박사 이효원(李效元) 사복첨정 박응인(朴應寅)ㆍ내승 박동언(朴東彦)ㆍ안황(安滉)이하 각사 관원은 따라온 사람만 기록한다.
첨지 유희림(柳希霖)ㆍ정곤수(鄭崑壽)이 두 사람은 《기재잡기》의 기록에는 들어 있지 않다. 또 말하기를, 한관ㆍ산관으로 따른 사람은 다 기록 않았다 했다. 종부첨정(宗簿僉正) 민선(閔善)파주서 뒤처졌다.ㆍ사섬봉사 이신성(李愼誠)파주서 뒤처졌다.
장악직장 이경전(李慶全)평양서 뒤처졌다.ㆍ봉상봉사 홍봉상(洪鳳祥)ㆍ선전관 최빈(崔賓)ㆍ무겸(武兼)한연(韓淵)이 두 사람은 《기재잡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세자 종관(世子從官)으로 따른 사람은 보덕 심대 교리ㆍ필선 심우정(沈友正)ㆍ문학 이상의(李尙毅)ㆍ설서 이광정(李光庭)ㆍ부솔 강인(姜絪)익위사(翊衛司) 관원은 다 오지는 않았고 오직 부솔 강인만 왔다.
근시(近侍)하는 신하들은 모두 행차를 따랐으나 지평 남근과 정언 정사신은 반송정(盤松亭)까지만 와서 간 곳을 모르고, 당초에 오지 않은 자는 임몽정 한 사람뿐이다.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관들은 혹은 파주에서, 혹은 개성에서 마음대로 행동해서 기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기재잡기》
2)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 총목(登科摠目) ▣
(☞선조)21년 무자 식년시에서 김시헌(金時獻) 등 34명을 뽑았다. 동년 생원 윤영현(尹英賢), 진사 김의원(金義元)을 뽑았다.5월 알성시에서 황신 등 11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한(漢) 나라 정중(鄭衆)이 군사마(軍司馬)에 임명을 사양하다.주D-047
▣ 연려실기술 제28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인조조의 상신(相臣) ▣
김류(金瑬) 전주(全州)판관ㆍ함흥(咸興)판관은 성절사(聖節使)로 부임하지 않았다. 김류는 자는 관옥(冠玉)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요, 호는 북저(北渚)이다. 신미년에 나서 무자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8세였다. 목사여물(汝岉)의 아들인데 병 신년에 문과에 올랐고, 정사 원훈(靖社元勳)ㆍ영국공신(寧國功臣)ㆍ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이 되었다. 정묘년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죽었을 때 세자가 조문하였고 임금은 고기 없는 찬을 닷새 동안 들었다.
병 신년에 승문원에 있다가 복수장(復讐將)김시헌(金時獻)을 따라 충청ㆍ경상도 사이를 출입하였다. 공무로 인하여 충주(忠州)에 갔을 때, 목사(牧使)가 무인(武人)이었는데 공에게 괄시를 받았다고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더니 사헌부에 있는 자기의 조카를 충동하여 공을 탄핵하여 사판(仕版)을 깎이게 되었다. 충주의 여러 사람들이 그 억울한 것을 호소하였는데, 신축년 봄에 도승지(都承旨) 김시헌이 상소하여 공의 억울한 사실을 진술하고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증거 대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들이 의논하기 전에 공의 이름이 마침 옥당 신록(新錄)에 들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침에 풀리면 저녁에 기록할 수는 있지마는 오(午)시에 풀리지 않았으면, 사(巳)시에 기록될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명하여 그 기록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대신들이 풀어야 한다고 의논하니, 비로소 임금이 명하여 풀어 주고 선택되어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다. 《백헌집(白軒集)》ㆍ〈시장〉
3)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다 ▣
4월 8일에 도승지김시헌(金時獻) 등이 아뢰기를, “인홍의 차자에, 선정(先正) 이황이 일찍 고(故) 징사(徵士)조식이 병통이 있다는 것과 고 징사 성운을 다만 청은(淸隱)이라고 칭도하고 모두 중용군자(中庸君子)로서 허여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화를 내어, 무함하고 헐뜯으며 있는 말 없는 말을 주워 모아 이황을 배척하고 꾸짖기를 끝이 없었고, 아울러 선정신 이언적 보기를 원수같이 하였으니 슬픕니다. 인홍이 자기의 스승과 존경하던 사람을 높이 올리려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분함과 노여움을 부려 말이 사납게 나와서 도리어 그 스승과 존경하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였습니다. 신은 들으니 이황과 조식이 비록 서로 왕래하고 추종하지는 않았으나, 절조를 허여하고 높은 점을 취한 것이 상당했다 합니다. 이황이 조식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정신적으로 사귄지 오래되었다는 말이 있고, 또, 본래부터 깊이 사모했다 하였으며 또, 현재 남쪽 고을에 고사(高士)는 이 한 사람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성운을 평론하는 말에, 청은(淸隱)의 풍치(風致)는 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알으키게 하는데 시속(時俗) 사람이 그 높은 경지를 알지 못하니 애석하다 하였고, 조식이 또 이황에게 보낸 글에, 평소에 사모하여 우러러 보는 것이 북두칠성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그런즉 조식이 이황을 성심으로 사모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데, 인홍은 이황이 조식을 무함하고 헐뜯었다고 하여 이구ㆍ정숙우(鄭叔友)가 맹자를 헐뜯던 것과, 양웅(揚雄)이 안자를 평론한 것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소위 조직이 노ㆍ장(老莊)의 학문의 병통이 있다는 것과 중도(中道)로서 요약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그의 편벽된 곳과 병통을 논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조식이 벼슬하지 않음을 지적하여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람이 저마다 소견이 있는데 몰아서 억지로 같게 하려는 것은 불가하다. 하물며 정인홍의 차자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는 것은 이르지 아니한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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