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008. 4. 17. 사진- 발용(군), 글- 윤식(문) 제공)
◇일시 : 2008년 4월 13일(일요일) ◇장소 : 안양시 관양동 문영공 묘역 ◇참석 : 문영공종회 임원 및 후손, 안사연
會潤(문영공종회 회장), 在鴻, 在光, 在英, 在永, 相錫, 明會, 聖會, 安會, 健會, 元會, 佐會, 潤萬, 國會, 銀會, 勃鏞, 滿吉, 振浩, 喆浩, 恒鏞, 容周, 胤植(무순, 존칭 생략)
조상님 음덕으로 약간 구름이 낀 날입니다. 산역 일에는 적당한 날이었습니다. 약속장소인 인덕원역(지하철 4호선)에 도착해 인근 지리를 살펴볼 겸 몇 걸음 옮겼더니 저만치 만길 종친(익원공파 사무국장)께서 빠른 걸음으로 문영공 묘역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문영공 할아버지 묘역 정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약속장소에서 종친들을 기다렸습니다. 10여 분 후 만길 종친께서는 택시를 타고 재실 쪽으로 떠나시고, 곧바로 발용 종친과 항용 종친께서 약속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문영공 할아버지 묘역으로 걷는 길은 어느새 벚꽃이 지고 있습니다. 묘역에서는 고유제를 마치고 포크레인을 이용해 주변을 정리한 뒤였습니다. 11:15분경부터 약 15분간 묘소 앞 석물(상석, 묘비 등)을 멀찍이 옮긴 뒤 문영공 할아버지 묘지석을 찾기 위해 상석 자리에서부터 앞쪽으로 약 3미터 정도 조심스럽게 파내려갔습니다. 묘지석은 그 동안 사진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이 보존된 장소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문영공 묘소를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봉할 당시 이 일에 관여하셨던 문중 어르신들 역시 대부분 타계하신 뒤라 당시 상황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문영공(휘 순) 묘소
△묘소 앞 석물을 옮기는 장면
약 1.5m 깊이로 파내려가자 생땅이라 생흙만 나올 뿐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영공종회 임원을 중심으로 많은 분들께서 문중 어르신들께 자문을 구했지만, 묘지석을 봉분 앞에 묻었는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봉분 앞쪽에서는 문영공과 관련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조금 파내려가자 생땅이 드러났다.
봉분 앞쪽에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12:00경부터 봉분을 조심스레 파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상태를 전혀 모르는 터라 종친들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졌습니다.
10여 분 뒤 12:10분경 애면글면하던 묘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봉분 중앙부분에 지표면과 같은 높이의 광중 자리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는데, 문영공 할아버지 시신 발치 자리였습니다. 묘지석은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이 위로 향한 상태로 놓여 있었습니다. 호미와 손으로 묘지석을 모셔낸 뒤 별도로 준비한 자리로 묘지석을 옮기고 햇볕을 가렸습니다.
△봉분 중앙 광중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영공 묘지석. 정확히 발치 자리에 해당하는데, 지표면에서 70cm 깊이에 모셔져 있었다.
△묘지석을 살펴보는 종친들. 묘지석은 앞뒷면에 모두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이 하늘을 향해 모셔져 있었다.
△문영공 묘지석(앞면). 상단 양쪽을 귀접이 형태로 다듬었으며, 충렬공 묘지석과 동일한 형태이다.
△문영공 묘지석(뒷면). <안동김씨보감>에 실린 사진처럼 상단 1/3 지점에서 두 부분으로 훼손되었다.
12:30분경 종친 두 분이 묘지석과 봉분을 수호토록 한 뒤 참석자들은 인근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영공종회 임원진에서는 12:40분경 긴급 회의를 갖고 묘지석 보관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한동안 신중한 논의를 거친 뒤 문영공종회 임원진은 임시총회 등을 통해 묘지석 보관 문제를 논의키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도난이나 도굴 등이 우려되므로 별도의 안전한 장소로 묘지석을 옮겨 수호하고, 임시총회 결정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인근 식당에 모인 종친들
△인사말을 하시는 문영공종회 희윤 회장
묘지석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유물로서 우리 문중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묘지석 발견과 묘소 천봉에 대해서는 연전에 발간된 <문영공종사록>에 내용이 실려 있고, 제가 잘 모르는 사항이라 이에 대해서는 보고를 생략합니다. 또한 묘지석 관련 내용은 향후 전문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라 간략히 보고드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묘역으로 올라와 14:00분경부터 광중 자리를 다시 파내려갔습니다. 묘지석 발견 장소에서 1m도 안 되는 곳에서 드문드문 회를 뿌린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홍대로 보이는 물체가 드러났습니다.
△광중 자리를 살피고 있는 종친들
△홍대가 삭아 함몰된 광중 모습
일제시대에 문영공 할아버지 묘소를 천봉하면서 묘지석뿐만 아니라 시신을 모셔왔을 가능성이 있어 일단 작업을 멈추고, 급히 베와 홍대 등을 마련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손으로 광중 자리를 쓸다시피 하면서 완전히 삭은 홍대 주위를 걷어내자 내곽 안쪽에서 봉분 주위와 달리 붉은색 황토가 나타났습니다. 현 문영공 묘역 주위는 부엽토가 두텁게 쌓인 곳이라 황토와 거무스름한 흙이 섞여 전체적으로 약간 거무스름한 빛을 띠는데, 내곽 안쪽의 흙은 선홍색에 가까워 확연히 다른 흙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희윤 회장과 명회 대종회 부회장께서 곡을 한 후 재배하고 있다.
△종친들이 손으로 광중에 모셔진 붉은색 황토를 정성껏 모시고 있다.
△홍대를 수습한 후 내곽을 실측하고 있다.
실측 결과 묘지석 발견 장소에서부터 내곽까지는 깊이 70cm입니다. 내곽은 폭 50cm(안쪽 22cm), 길이 184cm입니다. 홍대를 걷어내고 개성에서 모셔온 듯한 붉은색 황토가 모셔진 광중은 폭 25cm, 길이 155cm입니다.
문영공종회 회윤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곡을 한 다음 베와 한지로 붉은색 황토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그 외의 참석자들은 묘지석을 실측하는 한편, 항용 종친께서 묘지석을 탁본했습니다. 묘지석은 가로×세로 각각 710cm이며, 안쪽에 새겨진 글자 주위에 반듯한 실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실선이 그어진 곳까지의 길이는 670cm입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충렬공 묘지석과 동일합니다. 상단은 고려 말에 유행한 귀접이 형태로 각이 져 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글자를 새겼습니다.
△내곽의 황토를 다시 베와 한지로 정성껏 모시는 종친들
△문영공 묘지석 탁본 장면
△명회 대종회 부회장께서 문영공 명정을 쓰고 있다.
△베와 한지로 정성껏 모신 다음 홍대를 덮는 장면
안타깝게도 <안동김씨보감>에 실린 사진처럼 묘지석은 둘로 부러져 있었으며, 두 개의 구멍이 관통한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상당 부분의 글자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성회 종친 등 몇 분께서 묘지석의 글자와 <문영공종사록>에 실린 비문을 대조한 결과, 앞면에서 몇 글자가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중에는 문맥의 뜻이 상당히 달라질 글자도 일부 보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체 글자를 판독한 다음 현재 알려진 비문과 비교한 뒤 문영공종회에서 발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문영공 묘지석과 <문영공 종사록>에 실린 기존 비문 내용을 대조하고 있다.
참석자들의 기념사진을 촬영 후 일부 종친들께서는 귀가하시고, 문영공종회 임원진 및 후손들께서는 묘역 정비작업이 이어졌습니다.
△문영공 묘지석 탁본(앞면)
△문영공 묘지석 탁본(뒷면)
<추가 사진> (2008. 4. 23. 항용 제공)
1. 묘역 공사 1일차(4. 13)
12시 30분 경, 묘소 봉분을 걷어 내자 지표면으로부터 70cm 아래에서 최초로 나타난 묘지석 모습
<흙을 조금 더 긁어 낸 모습>
2. 2008. 4. 21. 모습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묘역 공사를 마친 후 6일만에 본 모습)
<묘소 입구 진입로, 포크레인으로 파진 부분을 식목했다>
<묘역 동편에서 본 모습>
<묘역 전경>
<신 묘비석> (전면 글씨는 예서의 대가이신 황재국선생의 글이다)
<비석 전면>
3. <2008. 4. 25. 문영공 묘역 재촬영> (2008. 5. 5. 항용(제) 제공)
(2008년 4월 21일 1차 촬영 후 묘비석의 오자를 교정한 후 재촬영한 사진임)
<전면>
<좌측면>
<뒷면>
<우측면>
<뒤에서 본 모습>
<개성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 구 상석의 고석>
4. <4. 21. 재촬영 사진> (4. 24. 항용(제) 제공) 묘역 공사(4. 15) 후 1주일 뒤의 모습
<묘역 전경>
<신 묘비석> (전면 글씨는 예서의 대가이신 황재국선생의 글이다)
<비석 전면>
<구 상석을 제평군부인 영단앞으로 모셨다. 이 상석과 고석은 부식 정도 등으로 보아 1943년 개성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상석은 1943년 조성 당시 상석 받침석으로 이용됐었다)
<묘소 근접 모습>
<신 상석, 맨 아래에 종전의 향로석 1개를 다시 사용했다>
<좌측에서 본 봉분, 고려말 1품계 관직자의 전형인 강화도 허유전의 묘를 본떴다>
<제평군부인 영단>
<영단 글씨>
<구 상석-묘역 우측 상단에 산신단 자리로 이동했다>
<뒤에서 본 모습>
<앞부분 모습- 둘레에 판석을 배열했다. 좌석으로 이용하는가 보다> -------------------------------------------------- <묘비석 비문 수정 작업 후 4. 25일 재촬영> (08. 4. 26. 항용(제) 제공)
<전면>
<좌측면>
<뒷면>
<우측면>
<뒤에서 본 모습>
<개성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 구 상석의 고석>
5. <5. 24. 재촬영 모습> (2008. 5. 29. 발용(군) 제공)
▲ 문영공 묘소 전경
▲ 문영공 묘비 전면
▲ 문영공 묘비 전면 글씨
▲ 문영공 묘비 측면
▲ 문영공 묘비 후면
▲ 개풍군에서 천장 당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옛 상석
▲ 양천허씨 할머니 단비 - 우측 위에 사초 전까지 문영공 묘소 상석으로 쓰던 석물이 보입니다. 현재는 산신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놓은 상태입니다.
금번 문영공 묘역 성역화 사업과정에 부근 주민들의 민원이 구청에 접수되어 구청 공무원이 출동하는 일이 있었다 합니다. 워낙 많은 돌이 산으로 옮겨지다 보니 주민들은 납골당이 조성되는 것으로 오인한 까닭이지요. 결국 오해는 풀리고 묘역 조성 과정에서 훼손 된 주변 나무만 원상 복구 하기로 하여 소나무 30그루를 식목하였답니다.
또 부근에 사시는 84세의 어르신께서 사초 소식을 듣고 묘소를 당문하여 처음 조성당시의 일화를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우측에 보이는 산신석(당시 상석)을 그 어른의 집에서 끼우던 황소와 안양에서 제일 힘이 세다던 황소 두 마리가 끌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백범선생님께서 참배시에는 관양동 일대가 지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증언으로 볼 때 더 많은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어른들의 기억을 채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문영공 묘소 후경
<문영공 묘지석 사진 소개(08. 5. 24. 촬영)> (08. 5. 30. 발용(군) 제공)
묘지석
▲ 지석 앞면
▲ 지석 뒷면
▲ 지석 구멍난 부분
▲ 지석 깨진 부분
▲ 지석 부분 확대
▲ 지석 치수 - 뒷면을 잰 것입니다. 정밀한 기기를 이용하여 측정한 것이 아니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지석 옆면(괄호 안의 숫자는 반대편 두께입니다.)
▲ 지석 윗면
지석의 두께는 측정하는 곳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평균 3cm정도 입니다.
<수원박물관 위탁, 전시 장면 사진> (2010. 12. 7. 재영(익)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