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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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4. 배위 냉평국대부인(이천신씨)에 대하여

(2005. 3. 12. 윤식(문) 제공)

죽주박씨 할머니와 존호가 같은 분이 계셔서 냉평(冷平)이란 지명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립니다. 이천신씨는 인구가 너무 적고, 관련 자료 역시 찾아보기가 어렵네요.

 

■ 휘 영돈(永暾) 配 冷平國大夫人 利川申氏 父版圖仕郞 汝岡

■ 이천신씨

시조는 신진(申塡).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고려시대 상서를 지낸 신진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 수 59명(1985).

■ 김영돈묘지명(金永暾墓誌銘) - 김주회 2005. 1. 12 / 김발용 2005. 3. 6 게시

부인 신씨(申氏)는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다.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오원경(吳元敬)에게, 둘째 딸은 윤식(尹湜)에게 각각 시집갔다. 아들 신(縝)은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사위 오원경의 묘지명 소개 (2005. 3. 14. 발용(군) 제공)

 

오원경묘지명(吳元卿墓誌銘)

 

 오원경(吳元卿 : 1128~1180)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초명은 산준(山俊)이다. 아버지는 검교상서좌복야 어사중승(檢校尙書左僕射 御史中丞) 중정(中正)이고, 어머니는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정목(鄭穆)의 딸이다.

 

음서로 벼슬에 나아가 1158년(의종 12) 내시에 입속(入屬)하였으며, 1160년 영광군(靈光郡)에 외보(外補)되고, 1169년 식목녹사(式目錄事)가 되었다. 이후 무신정권이 수립되면서 동로병마녹사(東路兵馬錄事)를 거쳐 1176년(명종 6) 공역서령(供驛署令), 이듬해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 1178년 북로감창사(北路監倉使), 지승평군사(知昇平郡事)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날카로웠으며 행정업무에 밝아 영광의 행정을 맡았을 때 수리시설에 주력하여 유망민의 안집(安集)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180년(명종10) 병으로 승평군에서 작고하니, 향년 53세이다. 감찰어사(監察御史) 김자여(金子輿)의 장녀와 결혼하여 아들 다섯 명을 두었다.

 

시대   고려

연대   1181년(명종11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세로 28cm, 가로 66cm, 두께1.5cm, 글자크기 1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判讀文>

 

知昇平郡事使文林郞試閤門祗候尙食誌」

公姓吳諱元卿古諱山俊安西大都護海州人也三韓壁上功臣」

字連信與金吉之後裔也檢校尙書左僕射中丞中正也」

中大夫檢校大子大師判少府監事子珙高祖也檢校太子少師」

閤門祗侯門秀皇曾祖也檢校軍器少監鄭穆之女義郡在京」

氏皇?也公以祖蔭初筮仕赴戊寅年承入爲內侍庚辰歲」

出?靈光郡至於己丑年權點式目錄事庚寅年移權都兵馬」

辛卯年兼選軍錄事是年權務政?眞都兵馬遂仕爲東路兵」

馬錄事甲午年冬遷都署令申年加試供驛署令丁酉年春」

遷爲樞密院堂後官是年冬受權知閤門祗候戊戌年春北路」

監倉使是年權務政出爲昇平郡守至庚子年冬十月二十有七」

日以疾卒于此郡取是年十一月十三日火于郡南之麓」

十八日移骨於碧泉寺是月二十有一日昇骨離郡二十五日」

義女郡安骨于冷泉寺越十二月十八日長子允藏□骨」

出郡於今年正月初三日入京師權安于城東門內神?寺」

越至四月十有六日藏骨于歸法寺」

山麓享年五十三公?性剛明」

銳于吏理兼該文字其補靈光?寬以濟猛猛以濟寬造戶郡」

內勸引流亡幾至一千人民復蘇防築提堰田壤肥沃伐木□」

□創新公?至於鋪設之具飮食之器無不備嘉乃爲考績之」

□故得按部□褒式爲內補時於中典闕造作之事□于始」

□或因西事受朝命夙夜匪懈監造弓弩一千張以充戰備□佐元」

戎於東路或爲監稅於北方皆以明繼諸□能□積弊乃或爲」

政昇平淸如□水威霜恤民育物興利□害夫如是則公之盡」

忠竭誠公耳忘私之義可謂格于神□者矣奈何一旦腫疾纏身風」

樹含悲年未至耳順歟公娶監察御史金子輿之長女生子五男長曰」

允臧以外祖衛社功初仕會赦爲文林郞良?令同正次子允赫□來」

中赴成均試得進士名又以祖蔭爲尙書戶部書令史同正次子曰允」

文次子曰允恭次子曰允承皆少而□職焉銘曰」

公之性剛壯精明 公之政內□輸誠公之命中」

子孫有慶後必耀榮   勒銘于瑩永□厥成」

        大定二十一年辛丑四月  日   記」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해석문>

 

지승평군사 문림랑 시합문지후 상식(知昇平郡事 文林郞 試閤門祗候 尙食) □(吳元卿?) □지(墓誌?)

 

공의 성은 오(吳)이고, 이름은 원경(元卿)이며, 옛 이름은 산준(山俊)으로, 안서대도호 해주(安西大都護 海州) 사람이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가진 연신(連信)과 김길(金吉)의 후예이다. 검교상서좌복야 어사중승(檢校尙書左僕射 御史中丞) 중정(中正)이 아버지이고, □중대부 검교대자대사 판소부감사(大中大夫 檢校大子大師 判少府監事) 자공(子珙)이 조부이며, 검교태자소사 합문지후(檢校太子少師 閤門祗候) 문수(門秀)가 증조이다.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정□목(鄭□穆)의 딸이며 의□군(義□郡) (부인으로) 서울에 있는 □씨(鄭氏)가 어머니이다.

 

공은 조음(祖蔭)으로 처음 벼슬을 하였으며, 무인년(의종 12, 1158)에 □(명을?) 받고 내시(內侍)가 되어 들어갔다. □ 경진년(의종 14, 1160)에 영광군(靈光郡)의 수령이 되어 나가고, 기축년(의종 23, 1169)에 권점식목녹사(權點式目錄事)가 되었으며, 경인년(의종 24, 1170)에 권지도병마(權知都兵馬)로 옮겼다. 신묘년(명종 1, 1171)에 선군녹사(選軍錄事)를 겸하였는데, 이 해의 권무정(權務政)에 따라 곧 정식[眞]으로 □도병마(知都兵馬?)가 되고, 마침내 동로병마녹사(東路兵馬錄事)가 되어 나갔다. 갑오년(명종 4, 1174) 겨울에 도교서령(都校署令)으로 옮기고, 병 신년(명종 6, 1176)에 시공역서령(試供驛署令)으로 승진하였다. 정유년(명종 7, 1177) 봄에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으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무술년(명종 8, 1178) 봄에 □북로감창사(□北路監倉使)가 되었다가 그 해의 권무정으로 승평군수(昇平郡守)가 되어 나갔다.

 

경자년(명종 10, 1180) 겨울 10월 27일에 병으로 승평군에서 작고하니, 그 해 11월 13일을 택해 군(郡) 남□(南□)의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18일에 벽천사(碧泉寺)로 유골을 옮겼다가 이 달 21일에 유골을 받들고 군을 떠나, 25일에 □ 의안군(義安郡)에 도착하여 유골을 냉천사(冷泉寺)에 모셔두었다. 12월 18일에 큰아들 윤장(允臧)이 유골을 모시고 군을 출발하여, 금년 정월 초3일에 서울로 들어와 임시로 성의 동문 안에 있는 신암사(神?寺)에 모셔두었다가, 4월 16일에 귀법사(歸法寺)의 산기슭에 유골을 묻었다. 향년 53세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총명하였으며, 행정사무를 민첩하게 처리하면서도 겸하여 학문에도 밝았다. 영광군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너그러우면서도 엄하고 엄하면서도 너그럽게 다스리면서, 호(戶)로 만들고자 군내의 유망민을 권유하여 이끌어 오니 거의 천 명이나 되어 인민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제방을 막고 쌓아 전토를 기름지게 하였으며, 나무를 베어  공관을 새로이 만들었다. 물건을 만드는 도구와 음식을 담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에 치적의 평가에서 최고를 받았다. 그러한 까닭에 안부(按部, 按廉使)가 □포상하여 관례대로 내직(內職)에 임명되었다.

 

이 때  중흥(中興) 궁궐을 조작하여 세우는 일이 □ 비롯되니, □ 혹은 서경(西京)의 일로 인하여 조정의 명을 받고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게으르지 않고, 활과 쇠뇌[弩] 천 장(張)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여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 동로(東路)에서 원수[元戎]를 보좌하고, 혹은 북방(北方)에서 감세(監稅)의 일을 맡으면서, 모두 명확하게 처리하고 누적되어 있는 모든 폐단을 □ 능히 제거하였다. 이어서 혹은 이 되어 승평군(昇平郡)을 다스리니 깨끗하기가 사발의 물[盂水]과 같고 위엄은  서릿발 같았으며, 백성을 진휼하고 만물을 기르며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없앴다. 대개 이와 같이 공은 충성과 정성을 다하고, 오직 공사(公事)만을 생각하고 사사로운 일은 잊으니, 그 의리가 신□(神明?)을 감동시켰다. 아,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종기[腫疾]가 온몸에 퍼져 죽음에 이르고, 나이도 예순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는가.

 

공은 감찰어사(監察御史) 김자여(金子輿)의 장녀와 결혼하여 아들 다섯 명을 두었다. 장남 윤장(允臧)은 외조가 사직을 지킨 공[衛社功]으로 처음 벼슬을 하였는데, 은사(恩赦)를 받아 문림랑 양온령동정(文林郞 良?令同正)이 되었다. 차남 윤혁(允赫)은 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의 이름을 얻고, 또 조음(祖蔭)으로 상서호부서영사동정(尙書戶部書令史同正)이 되었다. 3남 윤문(允文), 4남 윤공(允恭), 5남 윤승(允承)은 모두 어려서 관직이 □(없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용감하며, 맑고 총명하였으며

공은 정성을 다하여 중앙과 지방을 다스렸으나

공의 수명은 중(中)하는가.

자손에게 복이 있어서 후손이 반드시 영화롭게 되리니

무덤에 명(銘)을 새겨 영원히 그 이룬 바를 □(전하노라?).

대정(大定) 21년 신축년(명종 11, 1181) 4월 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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