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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19) 국역 국조인물고_김응하(金應河) (2004. 5. 20.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219쪽~224쪽
비명(碑銘) 조경(趙絅) 지음
명(明)나라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47년인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 봄에 건주(建州) 오랑캐[후금(後金 : 뒷날의 청나라)가 명을 거역하자 천자(天子)가 매우 노하여 군사를 내보내 정벌하면서 우리 동방에 군사를 동원해 달라고 하였는데, 이는 내지[內服]와 다름없이 여긴 것이다.
그때 명나라 경략(經略)은 양호(陽鎬)이고 우리 나라 원수(元帥)는 강홍립(姜弘立)이고 부원수(副元帥)는 김경서(金景瑞)였는데, 군대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으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장군(김응하)은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여 좌영군(左營軍)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유 도독[劉都督 유정(劉綎)]과 교 유격[喬遊擊 교일기(喬一琦)]은 선봉(先鋒)을 맡고 우리 좌영군은 그들의 왼쪽 날개가 되었는데, 이일원(李一元)이 <우영장으로> 장군을 보좌하였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중군이 되어 심하(深河)에 이르러 진(陣)을 쳤다. 장군이 이일원에게 말하기를, “병서(兵書)에 ‘먼저 묵쪽의 산을 점거한 자가 승리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낮은 지대에다 포진(布陣)하였으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높은 지대가 없단 말인가?” 하니, 이일원이 고집을 부리고 진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오랑캐 기병(騎兵) 수천이 우리 좌우진(左右陣)으로 들이닥치자 이일원은 먼저 도망가 버렸다. 이에 오랑캐의 정예병이 모두 좌영으로 모여들었다.
장군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화기(火器)를 가진 자는 화약을 채우고 활을 가진 자는 활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가 내가 북을 치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군법(軍法)을 적용하겠다.”고 하였다.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기병이 담장처럼 에워싸고 육박해 왔는데 그 거리가 십 보(十步)도 채 안 되었다. 장군이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리자 탄환에 맞아 죽은 오랑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고 안장만 남은 오랑캐 말들이 길을 꽉 메우는 등 오랑캐가 크게 붕괴되었다.
한참 있다가 오랑캐가 또 건장한 병사를 선발하여 보충한 다음 사력(死力)을 다해 서너 번 공격해 왔는데, 접전(接戰)할 때마다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므로 오랑캐가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 모래가 사람의 얼굴을 난타하였다. 햇빛은 어두컴컴해지고 화기(火器)와 화약은 공중으로 날아가 우리 군사가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오랑캐가 덮쳤다.
우리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고 장군 혼자 버드나무를 등지고 대황(大黃 큰 황색의 활)을 당겨 오랑캐를 쏘았는데, 맞았다 하면 반드시 시위 소리에 따라 쌍쌍이 쓰러졌으므로 오랑캐가 상당히 많이 죽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장검(長劍)을 가지고 접전하였는데 참살한 숫자가 또 그보다 배나 되었다. 장군도 수십 군데를 찔려 목숨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여전히 칼자루를 잡고 꿋꿋이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눈에 노기(怒氣)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에 중군(中軍)이 한 부대의 병력을 출동하여 개미만큼이라도 지원하였다면 오랑캐의 군사가 많더라도 장군의 한 주먹에 절반 정도 꺾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강홍립과 김경서는 진중(陣中)에서 관망하고 반복해서 간계(奸計)를 생각하다가 장군이 호랑이 이빨에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겨 오랑캐를 향하여 화살 한 대도 쏘지 않았으니, 오랑캐가 원수가 아니라 강홍립과 김경서가 바로 원수이다.
이 소경(李少卿)이 말하기를, “능(陵)과 율(律)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모르겠지만 강홍립과 김경서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인가?
아! 장군은 잘 싸웠고 또 장하다고 하겠다. 두숭(杜崇), 유정(劉綎)은 중국의 명장(名將)으로서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삽시간에 오랑캐에게 짓밟히어 길바닥에 피가 흐르고 한 명의 군사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장군은 기세가 등등한 오랑캐를 혼자 맞아 수만의 괴자마(拐子馬)를 제압하여 겨우 천 명의 열세한 군사로 하여금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게 하였고 자신도 이처럼 적병을 참살하였으니, 비록 관 운장(關雲長 촉한의 관우), 악 무목(岳武穆 남송의 악비)이라도 어떻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교 유격은 죽을 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동국(東國)의 군사는 날래고 장수는 용맹하다.’고 칭찬하였는가 하면, 오랑캐는 회군(回軍)할 때도 버드나무 아래 전쟁터를 피해 가면서 ‘버드나무 아래 장수는 두려울 만큼 역전(力戰)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고 말하기를, “좋은 남자, 좋은 남자로다. 후일 다시 태어나면 내가 얻었으면 한다.”고 하였으니, 장군의 명성이 중화와 오랑캐를 진동하였다는 말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강개(慷慨)하여 살신(殺身)하는 것은 쉬워도 조용히 죽음에 나가기란 어렵다.”고 하는데, 장군 같은 분은 애당초 종군(從軍)할 때부터 패배하면 죽겠다는 뜻을 굳힌 것이다. 장군의 아우 김응해(金應海)가 장군을 따라가려고 하자 ‘함께 다 죽으면 무익하다.’고 저지하였고, 집안 사람들과 결별할 때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 인장(印章)을 봉인하여 고을 관리[郡吏]에게 주면서 ‘적에게 더럽히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이게 조용히 죽음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석하게도 박 정승[朴政丞 박승종(朴承宗)]이 장군을 추천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장군의 재능을 인정하여 추천하면서 왜 찬후(酇侯 한 고조 때의 소하)가 회음후(淮陰侯 한 고조 때의 한신)를 추천할 때처럼 대장(大將)의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국운(國運)과 천시(天時)가 그 사이에 작용하였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심하(深河)의 전쟁 때 오랑캐의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해지고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강세를 짓눌러 버렸다면 틀림없이 오랑캐가 10년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 군사를 조련하여 북쪽 변방의 방어를 공고히 했다면 어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말 그 말대로라면 강홍립과 김경서의 죄는 대대로 용서할 수 없다.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 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장군이 역전(力戰)하다가 죽은 것을 가상히 여겨 내고(內庫)에서 백금(白金) 1만여 냥을 인출하여 우리 나라에 주어 장군의 가문을 구휼(救恤)하도록 하였다.
이에 천하의 사람이 입을 모아 장군의 이름을 칭송하여 전한 바람에 도로에 자자하였다. 이에 갑옷 입은 전사(戰士)는 장군과 같이 오랑캐와 겨루다가 뒤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붓을 잡은 문사(文士)는 장군이 격전(激戰)한 상황을 모두 묘사하여 명나라 사기(史記)에 제대로 반영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장군이 죽은 지 지금 40여 년이 되었으나 그 사건을 이야기한 자들은 마치 지하에서 장군의 호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늠름하게 생기(生氣)가 감돌고 있으니, 그 누가 사람의 해골과 함께 모두 이미 썩었다고 말하였단 말인가?
장군의 이름은 응하(應河)이고 자(字)는 경희(景羲)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래 관향은 안동(安東)인데, 철원(鐵原)으로 관향을 삼은 지 겨우 몇 대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김진(金珍)은 태복시 판관(太僕寺判官)이고 김인상(金麟詳)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고 김인(金轔)은 병조 정랑(兵曹正郞)이고 김지사(金地四)는 증(贈) 참판(參判)인데, 이분들이 공의 고조, 증조, 할아버지 및 아버지이다.
장군이 태어난 지 14세에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기이한 스님이 좋은 자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장사와 제사를 예절에 따라 치르었으므로 동자(童子)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여린 아우와 우애가 있었으므로 향리(鄕里)에서 칭찬하였다. 장성하기에 미쳐 활을 당겨 쏘면 돌에 박혔는데, 호라을 남에게 빌리지 않고 스스로 특수하게 만들었다. 신장(身長)이 팔척(八尺)에다 지기(志氣)가 비범하였으므로 한때 또래들이 모두 진짜 장군으로 허여하고 모두 지휘를 받았다.
25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정승 박승종(朴承宗)이 판병조(判兵曹)로서 천거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 시기한 사람으로 인해 도태되자 그 날로 집으로 돌아와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호남 안찰사(湖南按察使)의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바로 박 정승이 안찰사로 갔을 때이다. 그때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막 승하하였는데, 장군이 남의 휘하에 있으면서도 주색(酒色)을 가까이하지 않는 등 시종 게을리 하지 않고 경계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선비도 그와 같이 못 한다.’고 말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는데, 이시언(李時彦)이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 이항복)에게 극구 칭찬하자 경원 판관(慶源判官)으로 발탁 임명하였다. 길을 떠나기에 앞서 어떤 사람이 귀인 가문에 미녀(美女)를 소개하면서 장군의 첩으로 삼으라고 촉탁하니, 장군이 사양하였다.
경원에서 임기가 찼는데, 관찰사(觀察使) 한 서원군(韓西原君 한준경)이 잘못 알고 치적의 평점을 하등으로 매기고 이어 자신의 막하(幕下)에 두었다. 그 뒤 한 서원군이 법을 어기어 파직되었을 때 장군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찾아가 위로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본정(本情)이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장군이 말하기를, “한 감사는 나의 옛날 상관인데 어떻게 하찮은 일을 기억해 가지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의 흉금이 이처럼 넓었다. 이때부터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도총관(都摠官), 경력(經歷), 삼수 군수(三水郡守)를 역임하고 북우후(北虞侯)에 이르렀는데, 이게 박 정승이 추천한 것이었으나 실은 많은 사람들의 여망으로 인한 것이었다. 직책에 얽매어 4년간 북관(北關)에 있으면서 어느 직무나 잘 거행하였는가 하면,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은 벽돌을 운반한 도 장사(陶長沙)를 능가하였고 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은 바는 공손(公孫)의 대수(大樹) 같은 기풍이 있었다.
일찍이 독한 학질에 걸려 거의 사경에 놓였을 때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와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 ‘전쟁터에 나가 죽어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겠다’고 스스로 혀어해 놓고 지금 어찌 한낱 병으로 죽는단 말인가?”라고 하니,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세 사발을 마시고 나더니, 병이 나았다.
그런데 긔의 뜻과 같이 심하(深河)의 전쟁에서 과연 몸을 잊고 순국(徇國)하여 대절(大節)을 수립하였으니, 어찌 열렬(烈烈)한 남자가 아니겠는가? 우리 조정에서도 특별히 대광 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품계와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으니, 국가에서 충절(忠節)을 드러내고 숭상하는 도리가 정말 천고(千古)에 흡족하다고 하겠다. 장군의 아우 김응해(金應海) 등이 의주(義州)에서 혼백(魂魄)을 맞아다가 선영의 밑에다 의관(衣冠)을 묻었다.
장군이 첨추(僉樞) 윤시익(尹時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김익련(金益鍊)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에 이르렀고 성대하게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한 채 죽었고, 둘째 아들 김시련(金時鍊)은 일찍 죽었다.
큰딸은 선전관(宣傳官) 유신걸(柳信傑)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유학(幼學) 김기(金基)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게서 1남 김승련(金承鍊)을 두었다.
손자 선전관(宣傳官) 김세귀(金世龜)는 김익련의 소생이고, 김세성(金世聲)은 김시련의 소생이다. 유신걸은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유탄연(柳坦然)은 강계 부사(江界府使)이고 둘째 아들 유비연(柳斐然)은 숙천 부사(肅川府使)이다. 김기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익훈(金翊勳), 김익화(金翊華), 김익문(金翊文), 김익무(金翊武)이고 딸은 유학(幼學) 조일선(趙一善)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칼과 활 어디로 갔는가? 오랑캐 무찌르다 없어졌도다. 의관(衣冠)은 어디로 갔는가? 무덤에 간직돼 있도다. 혼(魂)은 안 가는 곳이 없는데, 더구나 이 고향이겠는가? 죽어도 얼굴이 생시와 같으니 선진(先軫)이 필적할 만한 사람이고, 이가 남김없이 부서지니 진원(眞源)도 그보다 못하겠지.
명나라 황제 장군의 무용에 보답하려고 우리 나라에 백금(白金) 내려 선양하였네. 통분하게도 저 항복한 장수는 대대로 악취를 남기었고, 먹줄처럼 획일적인 저 김유신(金庾信)은 공로가 신라에만 그쳤도다. 그 누가 공처럼 하였겠나?
천자에게 목숨을 바쳤도다. 명성이 해내(海內)에 들끓고도 남으니 청사(靑史)에 휘황찬란하고 향리의 사당에 배향되었도다. 송백(松柏)으로 마루와 기둥을 만들어서 경건히 영령을 모시니 찬란한 제사 행렬 변방에 내려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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