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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상공(휘 석) 거주지 탐색, 참봉공파 후손 묘역 참배, 양덕공 묘소 계단 설립, (2005. 7. 26. 항용(제) 작성 제공) 2005년 7월 24일 맑음. 몹시 더움. 아침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자명종이 요란하다. 아내는 어제 저녁 늦도록 괴산 갈 준비를 하던데 벌써 일어나 준비에 바쁘다. 어제 성회대부님 사무실에서 오후에 마신 커피로 밤새 잠을 설쳤다. 오는 10월에 개통할 청계천 복구사업 행사의 하나인 청계천 벽화 전시 건에 대비해 안사연에서 은밀하게 진행해 왔던 모종의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임시로 성회, 발용, 태영 종친님들과의 갑작스런 만남이었다.
괴산에 갈 때마다 짐이 많다. 아이들은 남겨 두고 우리 내외만 출발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중부, 영동을 거쳐 내륙고속도로 접어드니 창밖 공기가 훨씬 신선하다. 1시간 40분만에 괴산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집 뒤 수진산 아래로 갔다. 어제 상석대부님이 부려 놓은 계단용 돌들을 보기 위해서다. 오늘 하향의 주된 목적은 나의 14대 선조님이신 양덕공(휘 時說) 묘소의 입구 계단 설치이다.
묘소 아래로 가니 쿵쿵하는 작업소리가 났다. 이미 상석대부님이 산에 올라와서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어제 저녁 죽전에서 돌을 싣고 와 이곳에 부려 놓고 괴산집에서 잠을 잔 다음 새벽에 먼저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부지런함과 굳은 숭조의식에 감탄을 받았다. 엄청난 더위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르는 대서(大暑)일이다. 2일 전 한라산 백록담을 자녀 예진과 용진과 함께 다녀올 때도 엄청난 땀을 흘렸는데 오늘도 땀을 좋게 흘려야 할까보다.
<양덕공 묘소 입구 계단 작업>
청주의 형(한용)에게도 기별하여 셋이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돌일은 힘이 많이 들었다. 땅을 파기도 고되었다. 단단한 찰흙에 돌이 많은 토질이기에 곡괭이로 파도 별 진전이 없다. 아버님도 가세하여 작업 코치를 하신다. 첫 돌계단이 제일 힘들었다. 하나씩 놓아 갈 때마다 요령이 생겨 힘도 덜 들고 작업 속도도 났다. 너무도 덥기에 오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하는 손놀림은 잠시도 쉴 시간이 없다.
10시, 숫골(괴산군 소수면 수리2구)의 일가 어른이신 만응(제학공파, 참봉공 휘 우갑 13대손)대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리에 있는 우리집 가정묘원 터를 좀 넓히기 위한 중개를 부탁해 놓았는데 그 땅 주인(태희, 참봉공파)이 오늘 서울에서 내려오니 만나서 상의하자는 것이다. 즉시 괴산읍 군수관사 안에 있는 <전국 시조 연구회 괴산지부>로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수리로 갔다. 만응대부님을 중간에 태우고 작년 안사연 여름캠프 답사지였던 <제학공파 참봉공문중 참판공 휘 기(紀) 종손가 납골당>의 바로 맞은편 산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국립묘원 같은 형식으로 조성한 아담한 묘역이 나타나고 몇 분이 풀뽑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었다. 작년에 조성한 이 묘역은 참판공 휘 기(紀)선조님의 손자인 윤희(允熙) 외 27위를 모신 묘역이었다. 참봉공(휘 友甲)의 후손(友甲-時亮-紀-鼎臣 이하) 중 允熙-海徵,澮徵-礪著,公著,明著-璆,敬元-天健-由岳,學年,圭年 등이 모셔져 있는 곳인데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던 선조님들의 묘소를 관리하고 봉사(奉祀)하기에 너무 어려움이 커서 본 묘역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봉공파 후손 서경회 근립 묘역>
<휘 允熙, 휘 海徵의 묘소>
<서경회 숭조묘비>
이 묘역은 작년(2004. 8월)에 泰弘종친(현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장)의 주창으로 설립되었는데 서경회 회원인 형식(瀅植)종친의 부지 제공에 힘입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서경회(瑞卿會-태홍님 고조부 이하 8촌간의 모임. 고조부, 증조부들의 통일 字에서 딴 명칭)를 조직하여 운영해 왔었기에 이 사업은 원활히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한다. 묘역은 화장이 아닌 매장으로 전체를 2단으로 나누고 한 단에 8위의 내외분을 2m 간격으로 배열하여 평장으로 매장하였고, 각 위 앞에는 낮은 표석을 세웠다. 그리고 전면 중앙에는 서경회 숭조 묘비석(2004. 8. 18. 서경회 謹立, 김태홍 謹記)이 서 있어 묘역 전체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었다.
태홍종친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가정묘원문제로 만나고자 했던 태희님과는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집으로 12시가 넘게 돌아오니 양덕공 묘역 계단 공사는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였다.
<말끔하게 정리된 입구 계단>
백숙을 점심으로 먹고 오후에는 괴산읍 능촌리로 갔다. 상석대부님의 10대조이신 안주공(휘 번) 묘소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그곳으로 떠나는 우리들에게 아버님은 비료를 챙겨 주신다.
묘소에 도착하니 지난 4월에 사초한 잔디들이 잘 자라 있었다. 보기가 참 좋았다. 넉넉한 공간에 잘 가꿔진 묘역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잡초란 놈들이 미운 머리를 들고 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뽑아야 했다. 벌써 어떤 놈은 잘 뽑히지 않을 만큼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볕은 이미 많이 빠져 있는 머리카락을 아주 몽땅 뽑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 위에서 매섭게 쪼아대고 있었다.
2시간 남짓 풀을 뽑고 비료를 뿌리고 나니 또 땀이 비로 내린다. 그러나 기분은 이렇게 상쾌하고 뿌듯할 수가 없다. 상석대부님은 흐뭇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른다. 능촌리를 돌아 나오며 이내 차는 괴산의 명소인 쌍곡계곡으로 향한다. 작년 안사연 여름캠프 숙박지를 지나며 1년 전의 장관과 금년의 캠프 행사를 생각한다. 벌써 피서인파가 대단하다. 해마다 우리 가족들이 괴산에 오면 항상 찾는 상류 휴게소 아래 계곡을 찾아 간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한 다음 차가운 캔맥주로 더위를 식힌다. 그리고 곧 다가올 여름캠프를 점검하고 또 계획을 세운다.
<쌍곡계곡과 피서 인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능촌리의 종친인 규문아저씨를 전화로 찾아 초청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귀경하는 차량으로 주도로는 이미 정체다. 멀리 장연, 목도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저녁은 삼겹살로 준비했다. 집에 도착하니 규문아저씨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잔디밭 위에 진녹색의 비치파라솔을 치고 구워 먹는 삽결살 맛은 나도 잊고 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식사시간은 마음대로 늘어났다. 대부분이 문중 역사 이야기다. 이곳 괴산에 있는 종친 중 구전되고 있는 보물급 문중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이를 즐겨 말해 주는 이는 역시 규문아저씨가 제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제학공파 괴산 입향조이신 영상공(휘 석)의 이야기로 옮아가자 규문아저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잠시 서울 퇴계로의 윤주한의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 응)께서 자신을 서울로 데리러 와서는 이곳이 바로 영상공께서 괴산으로 낙향하시기 전에 사셨던 곳이라고 몇몇 일가분들(규철, 상형)들과 함께 말씀 나누던 것을 들었다는 말과, 영상공께서 괴산에 낙향하여 처음 사시던 곳은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인데 현재 김태욱종친(제학공파 참봉공종중)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두 가지의 놀라운 말에 우리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내일 일찍 현장을 탐방키로 했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설치된 태양열 전등 불빛이 반딧불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괴산의 밤은 이렇게 시원하게 깊어만 갔다.
<세덕사 전경>
7월 25일, 아침 일찍 집안 정리를 마치자마자 상석대부님과 함께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로 갔다. 어제 저녁에 규문아저씨에게서 들은 영상공의 실거주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난 봄, 서울에서 전화상으로 이곳 이장님들에게 열심히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던 일이다.
불과 5분 만에 도착한 문법3리 입구에는 좌측산 능선이 끝부분으로부터 편안한 선을 그리며 살짝 가라앉듯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숲이 보인다. 450여 년 전 영상공의 주창으로 세워진 일명 문법숲이다. 문법리에 사시면서 이 마을의 지세를 세밀히 살핀 공께서 남쪽이 허한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높은 둑을 세우든가 숲을 조성하여 멀리 대로가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며 조성하신 숲이라 전해온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 본 문법 숲>
<문법숲 아래-느티나무, 참나무가 주종이며 정자가 있고 마을의 시원한 쉼터이다>
<매년 정월 보름날, 문법숲 이 나무 아래에 제수를 놓고 동제를 지낸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법숲으로 들어가니 작은 정자 하나가 보인다. 노인 두 분께서 쉬고 계신다. 정자에 올라 절을 하고 나의 성과 본관과 이름을 밝히니 한 노인분께서 “나도 안동인디, 호(浩-默과 동항렬)자 돌림이여, 워디서 왔어?” 이때부터 대화는 급진전하며 이 지역과 문중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일가 대부님으로부터 여러 의문점들은 시원하게 해결되어 갔다. 천만 대행이었다.
<문법숲 정자위에서의 대담과 인호대부님>
대부님은 제학공파 오갑 자손 중 참봉공(휘 友甲) 후손으로 2자이신 휘 시상(時尙)의 후손이셨다. (時尙-大乾-鼎壽-允泰-光昊-瑞麟-圭璞-重健-亨源-慶年-仁浩) 몇가지 중요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자신은 현재 이곳에 10여 대를 살아왔다. 현재 문법 3리 184번지에 살고 있으며, 1929년 생으로 77세이다. (전화:043-833-0388) 2. 이곳 문법리 일대에는 예부터 우리 안동김씨들이 많이 살아 왔다. 그 중 제학공파 참봉공 후손들과 안렴사공파들이 주류를 이룬다. 3. 현재는 종친들이 많이 떠나 몇 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법1리에 2집(태욱, 명응), 문법2리(전법리, 금석골)에 1집(태일), 문법3리에 2집(인호 등)이 있을 뿐이다.
<문법3리 전경> (중앙의 붉은색 지붕이 인호대부님 댁)
4. 이곳에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 왔다는 증거로는 문법 3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득영씨(참봉공파, 전 단양부군수 역임. 卒)와 태헌씨(참봉공파) 종산이며, 주위 산에는 10여 대를 넘는 선대 묘소가 곳곳에 있다. 5. 영상공의 모친이신 의성김씨 할머니의 고향이요, 이곳에 정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영상공의 외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은 이곳으로부터 청천쪽으로 조금 더 가서 있는 옆 마을인 양곡리이다. 6. 문법숲을 조성한 것은 약 500여 년 전부터 영상공의 주창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계속해서 식목을 해 왔으며 주 수종은 느티나무와 참나무이다. 일부에서는 경주김씨가 먼저 조성하기 시작했다가 후에 영상공께서 이어서 이 사업을 지속했다고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 일찍이 이곳에 경주김씨가 살았던 적이 없다. 주변 산에 경주김씨 묘는 없고 온통 우리 안동김씨 묘만 있다는 것은 이 말의 와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7. 이문거리표(里門距離表) 표석은 마을 입구라는 의미로 500여 년전 영상공께서 세우신 것인데 글씨는 없는 것 같다. 원래는 현 위치(문법숲 입구에 설치)가 아니라 문법 3리 마을(문법숲 상단 위쪽) 좌측 끝 가옥에서 약 50m 좌측의 논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전에 한 사람이 이 돌을 자기네 논의 물고 위에 작은 다리 용도로 썼다. 그 후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를 다시 원 자리에 세우니 신기하게도 아프던 몸이 나았다. 약 30년 전에 김천응종친(참봉공 후손)이 이를 현 위치인 문법숲 아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이문거리표 최초위치 : 상기 사진 우측의 전봇대에서 좌측으로 50m지점>
<문법숲 입구의 이문거리표>
<이문거리표 표석-중앙에 글씨가 있는 듯하나 판독이 불가능함>
8. 영상공이 살았던 곳이라 하는 김석골(필자 주 : 김석은 영상공의 휘(김석)를 딴 마을이름으로 현지인들은 짐석골이라 하나 이는 김석골의 구개음화된 사투리적 용어이다)은 문광면 문법2리를 일컫는 말인데 문법1리 마을 회관에서 서편 산쪽으로 올라가 전봇대가 있는 곳이다. 현재 약 7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영상공 집터에는 현재 김태욱종친(안렴사공파, 30년 전 괴산지역 국회의원 출마 경력, 부는 정회)이 살고 있다.
약 1시간여에 걸쳐 많은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문법2리(일명 전법리)의 김석골로 향했다. 문법1리 마을회관 옆에서 아주머니들에게 김석골과 김태욱 집을 물으니 마을회관에서 거의 이어진 상태의 뒤쪽(서편) 마을로 산 아래 높은 곳에 있는 통나무집이라 일러 준다.
<김석골(문법2리-전법리) 원경, 좌측 산쪽의 긴 건물(교회)부터 우측마을이 김석골>
<김석골 근경, 중앙의 산 아래 조금 뾰족한 것이 영상공 집터이다>
현지에 이르니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통나무집은 근처 시골집 등에서 보기 어려운 최근에 멋지게 진 별장이었다. 마을 뒷산 주능선 끝 부분 아래의 널찍한 터(약 200여 평)에 곱게 깔린 잔디와 아담하게 지어진 현대식 2층 통나무집(단층 면적 약 40여 평)과 부속 건물(약 30여 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멋스럽고 아담한 모습을 보고 부러움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로 밑 집의 대문 기둥에는 김태일이란 문패가 걸려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 일가일 것이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들에 일을 나간 모양이다.
<영상공 집터와 지덕규씨 통나무집>
<통나무집 옆의 부속건물>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1519년), 영상공께서 서울 주자소 근처(현 퇴계로의 극동빌딩 윤주한의원 근처)에서 기묘사화를 당하자 화를 피해 이곳으로 오시어 이 집터에서 삶을 시작하셨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성균진사로서 정암 조광조선생과 더불어 당시 낡은 정치 사회제도를 개혁하려 했던 25세의 젊은 선비, 그 큰 꿈과 희망을 접고 괴산의 깊은 산골에서 은거해야만 했던 그 심정과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이곳에서 5 아들(五甲)을 교육시킬 때의 모습은 또한 어떤 심정과 모습이었을까? 어디쯤에선가 다섯 아들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집의 이곳저곳을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있으려니 2칸 아랫집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오시며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다. 대충 우리의 방문 목적을 말씀 드리고 이 집터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해 주신다.
1. 이 집은 괴산군 문광면 문법2리(전법리) 631번지로 현재 지덕규씨 소유의 집이다. 마을 좌측에 있는 교회로부터 그 우측선과 뒤쪽으로 있는 약 7가구가의 동네가 금석골이다. 2. 지덕규씨는 서울에서 00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 집은 그 분이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고 얼마 후 퇴직하면 이곳에 와서 살 계획이다. 3. 자신은 바로 그 지덕규씨의 형수로서 이름은 이춘자(66세)이며 부군은 지홍규인데 별세하였고 전화는 043)832-4876이다. 4. 자신은 약 45년 전인 1960년경에 이 마을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시집 올 당시 이 집은 초가집이었다. 5. 한 때 이 집에 살았고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던 김태욱씨는 약 30년 전에 청주로 이사를 갔다. 그 당시에도 이 집터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고 김태욱씨는 다만 집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그 후 이 집을 포함한 이 지역 일대의 토지가 경매에 붙여지자 시동생인 지덕규씨가 이 집을 낙찰 받아 인수하게 되었다. 현재 자신은 2칸 아랫집에 살면서 이 집을 돌보고 있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대문 안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집안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을이 한 눈 아래로 들어 왔고 마을 앞 동남쪽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높고 낮은 건넛산이 훤하게 내다보였다. 마을에서는 전망이 가장 좋은 명당 터였다. 집 앞 잔디밭에는 수 백 년 되었다는 자두나무가 있었고 집 뒤로는 오래된 오동나무가 있어 집터의 역사를 대충 말해 주고 있었다. 내 별장이 이것이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몇 번을 되돌아보며 집을 나왔다.
<집 앞의 자두나무, 오래된 것으로 고목은 자르고 새 가지가 나왔다>
<집 뒤의 오동나무>
다시 문법3리 문법숲으로 되돌아 갔다. 이문거리표석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아직도 정자 위에 앉아 계신 인호대부님과 몇 분들이 멀리서 우리들의 모습을 살피신다. 괴산 집으로 돌아와 바로 집 뒤의 양덕공 묘소 옆 산자락에 있는 참봉공(휘 우갑)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촬영하였다. 홈페이지 올리기 위해서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으로 옷이 흠뻑 젖는다
<참봉공(휘 우갑) 묘와 상석>
<묘비석-承仕郞 行 恭陵參奉 金公 友甲之墓, 端仁 迎日鄭氏祔左>
<乾隆四十年 乙未(1775년.영조51) 月 日 立>
참봉 묘소 아래에는 참봉공의 후손인 동호(友甲-時亮-紀-鼎臣-允熙-海徵-礪著-璆-天健-由岳-學年-東浩) 선조님의 묘소가 있다. 어제 보았던 수리 서경회 묘역의 學年선조님의 아드님이시다.
점심때가 되어 아버님과 함께 괴산 읍내 음식점을 찾으니 집집마다 만원이다. 오늘이 중복이란다. 한 집에 겨우 자리를 잡으니 반가운 일가를 만난다. 성수와 경수아우들이다. 모두 괴산읍 능촌리에 살고 있는 종친들로서 문숙공 김제갑 선조님의 16대손들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 서울로 가려하니 상석대부는 어제 작업한 안주공 묘소에 다시 가려한다. 지난 장마로 인해 묘소 일부가 패여 나갔는데 어제는 삽이 없어 마무리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함께 가서 주인도 없는 능촌리의 규문아저씨 집에서 삽을 꺼내 약 1시간가량 작업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 여름의 괴산행은 보람있는 작업과 큰 수확이 있었다. 이제 청계천 벽화 마무리 작업과 여름캠프가 기다리고 있다. 훌륭한 작품과 행사로 마무리 되도록 힘써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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