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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21. 발용, 태영(군) 제공) (1)안동 김씨와 칠원 윤씨가 세거하는 마을 절골은 서탄면의 가장 북쪽에 있다. 옛날에 절이 있어 ‘절골’이라고 불렸다는 이 마을은 무려 100호 120세대나 되는 큰 마을이다. 성씨는 3, 4백 년 전부터 안동 김씨와 칠원 윤씨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산다. 아직도 안동 김씨는 40호가 넘고 칠원 윤씨도 15~6호가 넘는다. 노인회장 김덕용(75)씨에 따르면 김씨나 윤씨가 정착하기 전에는 순흥 안씨와 해주 오씨가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을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4, 5백년 이상이다. 이 마을의 김(金)씨는 안동김씨 군사공파로 고려 후기 명장이었던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다. 그동안 안동 김씨는 19세기 세도정치를 주도하며 나라를 말아먹은 주범으로 지탄받아왔지만 사실 안동에 본관을 둔 김(金)씨들은 모두 같은 가문이 아니다. 서탄면 부면장을 지냈다는 김인희(70)씨에 따르면 전에는 마을 아이들 가운데 안동 김씨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다가 부모들이 항의하여 사과를 받아냈었던 사례도 있다는 것을 보면 이러한 오해는 상당히 뿌리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오해를 풀기 위해서 안동 김씨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안동김씨는 구김(舊金)씨와 신김(新金)씨로 구분된다. 구김(舊金)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충렬공 김방경을 중시조로 한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 들어 김영후, 김질, 김수동, 김찬, 김자점 등 정승, 판서를 배출하며 위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인조 때 김자점이 권세를 누리다가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구김(舊金)출신으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로 순절한 김시민 장군과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선생이다. 신김(新金)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도정치의 주범 안동 김씨다. 이 가문은 고려 태조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에 봉해진 삼태사의 한사람인 김선평이 시조이며 조선 중기 김극효를 중시조로 한다. 김극효는 인조 때 정승을 지낸 김상용, 김상헌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척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의 후손 김조순이 순조(純祖)의 외척으로 세도정치를 하면서 후대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게 되었다. 신김(新金)의 후손으로 크게 알려진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김옥균과 김좌진이다. 후손 김덕용(75)씨는 절골의 안동 김씨는 자산공의 손자 때 입향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산공이나 입향조의 이름을 알지 못했는데, 안동 김씨 군사공파의 계보를 살펴보니 자산부사를 지낸 김윤경(允精의 오기)의 손자 김진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면 김진은 어떤 이유로 절골에 입향하였을까?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부인의 본관이 해주 오씨였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 안동 김씨와 칠원 윤씨가 입향하기 전 절골은 순흥 안씨와 해주 오씨의 세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동 김씨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집안처럼 처가로부터 상속된 재산이 있는 절골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큰데 명확한 사료적 근거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칠원 윤씨는 조선 초 충효공(이름은 모름)의 후손이다. 서탄 면장을 지냈다는 윤학수(65)씨에 따르면 충효공은 건국 후 향촌에 잠적하였다고 하는데, 절골에는 2백 여 년 전 윤재순이라는 분이 화성 비봉에서 옮겨오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윤씨 가문은 이거 후 관직진출은 미약했지만 양반가로서의 체통을 중시하고 학문에 힘썼다. 결과 구한말에는 시종을 지낸 윤기선과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지금도 면장과 같은 지방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여럿이라고 한다.
(2) 사리지명유래
(가)사리-寺里(절골) 유래 : 사리(절골)는 진위현 이서면에서 유래를 찾을 수가 있는데 원래는 진위현서면 - 일서면[마산리와 야막리] 이서면[사리와 수월암리]과 탄현 - 일탄면[송탄] 이탄면[서탄의 남부]에서 서탄면으로 분적되었다.
사리(절골)는 서탄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1.7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마을앞 내(川)를 건너 넓은 들을 가로지르면 1번국도와 경부선 철로가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뒤로는 매봉재와 구중산(뒷동산)자락이 아늑하게 감싸않고 앞으로는 오산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오산천의 옛이름은 우현천(禹峴川)으로 수원에서 발원하여 오산을 통과하고 이곳 마을앞을 지나 진위천과 합류하여 큰 내를 이루어 황구지천이 되고 이어 서해바다에 이른다.
옛날에 절(寺)이 있던 고을이라 하여 절골(寺谷) 또는 사동(寺洞)으로 불려왔으며 행정동을 사리(寺里)라고 하였다.
성씨 : 약 500여년전에 해주오씨(海州吳氏)와 순흥안씨(順興安氏)등 8세대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중기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때 참의(參議) 김진(金珍)이 처가(진사 吳稀允:해주)인 이 마을로 은거(隱居)하여 정착하면서부터 안동김씨가 벌족(閥族)을 이루는 시초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집성촌을 이루어 수호하여 오고 있으며 이밖에도 윤씨와 이씨등도 세를 이루어 터전을 잡았다.
성질:온순하고 순박하다. 선조께서 말씀하시길 “땔나무 산에 그득하고, 맑은 물에 고기 낚을 만하니, 세상에 요구할것 없이 자족(自足)하다.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지경이 그윽하고 사람이 후덕하여, 눈을 들면 심경이 유연하여 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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