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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31.--8.1. 글-항용(제), 사진-발용(군), 안내-재이(군)) 1) 7. 31.(수)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했다. 9시가 넘으면 배를 타려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8시경 배를 탄 우리는 외경의 남해 해금강을 관람하고 외도로 들어갔다. 약 1시간 동안 환상의 섬에서 아열대 식물들 사이사이를 돌며 열심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댔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의 역량이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이곳을 창조한 주인의 이야기를 전설이 아닌 실화로 마음에 새기며 섬을 나왔다.
이어 <깃발>의 시로 유명한 청마 유치환의 생가로 갔다. 1930년대 생명파 시인으로 인간 생명의 근원을 찾으려 몸부림 쳤던 청마의 집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어들과 이곳에 있는 유·무형의 것들과를 열심히 관련시켜 보았다.
거제도를 출발하여 통영, 진주를 거쳐 남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은 우리 일행은 강진을 향해 달렸다. 순천 송광사가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 3대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의 하나인지라 그 광대함에 놀랐다.
이어 보성으로 갔다. 재원 대부님이 알려 주신 대호군공파 재실을 보기 위함이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마을로 들어갔다. 물어물어 몇 곳을 헤매다가 찾아가니 마을 입구에 안동김씨대호군공파 세장비가 서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 가 없다. 먼저 김구선생님 은거지를 찾아야 했다. 발용씨가 세장비 뒤쪽 집에 찾아가 은거지를 물었다. 대문의 문패가 김태식씨이다. 틀림없이 일가집이리라. 아니나 다르랴. 60세 정도 되신 분과 통성명을 서로 하니 순간 오래 만나온 옆집 일가사이가 됐다. 이게 바로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요 혈육의 정이리라. 급히 떠나려는 우리에게 직접 농사지으신 양봉 꿀차를 얼음 띄워 타 주신다. 꼭 마시고 가란다. 이 마을에는 약 60여 호의 안동김씨가 살았는데 현재는 약 40 여 호만이 살고 있단다. 재력이 큰 인물은 별로 없으나 공부 잘하는 이는 많이 났단다.
따뜻한 정 듬뿍 먹고 김구 선생 은거지 집으로 갔다. 태식씨 집 앞을 지나 약 300m 가량 좁은 길을 올라가니 5 채 정도의 동네가 나온다. 맨 윗집 앞에 김구선생 은거지란 표지석이 있다. 집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이 집의 손자가 현재 서울 지방법원의 판사로 있단다. 담장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고 어렵게 차를 돌려 나왔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갔다. 대호군공파 재실을 찾아야 했다. 길 옆에 보이는 재실로 들어가는 길을 어렵사리 찾아 들어갔다.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한 어른께서 연유를 묻는다. 대호군공파 金仁會 어른이시다. 재실 위로는 2기의 산소가 있다는 말에 동작 빠른 발용씨가 어둠에 쫓기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왔다. 휴- 오늘 할 일은 어느 정도 다 한 셈이었다.
마을을 빠져 나오려는데 멀리서 보는 大路 옆의 휴게소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발용씨의 예감이 있었다. 맞았다. 휴게소(쇠실 쉼터) 한 옆에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와 함께 몇 가지 석물들이 잘 정돈되어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휴게소 길 건너에 있던 우리는 한 사람은 도로 중앙 분리대 위를 넘어, 또 한 사람은 분리대 아래로 빠져 넘어갔다. 아슬아슬한 도로상에서의 곡예에 차에 남아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어둑어둑한 빛 속에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댔다.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개선장군 같은 기쁨을 안고 예약해 둔 숙소인 워커힐 모텔로 갔다. 2주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던 곳이다. 가능하면 작천면에 있는 곳을 택했다. 도착하니 주인 내외가 기쁘게 맞아 줬다. 방도 깨끗했다. 바로 옆집의 음식점에서 별식 요리인 닭백숙으로 저녁과 술 한잔을 겸했다. 내일 이곳에서 군사공파 재이님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으니 이젠 걱정이 없다. 일찍 잠을 청했다. 며칠째 못 잔 잠을 실컷 자고 싶었다.
2) 8.1일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아침 8시까지 무려 9시간이나 단잠을 잤다. 오랜만에 온 몸의 피로가 완전히 풀리니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짐을 정리하고 숙소 아래로 내려와 집을 한바퀴 도는데 이런! 깜짝 놀란 눈과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집 뒤의 농원에는 영화 <가위손>에 나오는 것과 같은 기기형형의 모습을 한 대형 향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정돈되어 있었다. 제작자의 예술적 안목과 노고에 경의를 마음으로 보내고 어젯밤 그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원한 물이 흘러가는 골짜기 사이 위에 마루를 놓아 식사 자리를 만든 곳이었다.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갯국에 각종의 이름 모를 향기로운 나물들, 한 상 가득한 상차림에 놀랐고 그 맛깔스러운 음식 솜씨에 또 감탄했다. 식사를 마치자 커피 대신 보성지방에서 생산한 것이라며 녹차를 내 놓는데 그 맛에 우리는 또 한 번 경탄을 했다. 부족한 것 없느냐며 자꾸면 음식을 더 내 주려는 중년 주인 내외의 호의와 푸근한 인심에 우리는 그저 어쩔 줄 몰라했다.
약속 시간(09:00시) 보다 10분 앞당겨 재이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식당으로 오셨다. 식당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시나 항렬은 재자 항렬이니 나의 증조항이 되신다. 넉넉하신 체구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는 님과는 전화 한 통화 한 적밖에 없는 사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가까이 알고 지내온 도타운 사이로 금새 변했고, 혈육의 정이 가슴을 진하게 오고 가고 있음을 느꼈다. 요즘은 강진군에서 주최하고 있는 고려청자 박람회 기간이란다. 이 행사에 님께서는 거의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단다. 그런데 그 어려운 성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하루 휴가를 내어 나오셨던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하루 일정이 바쁠 것 같아 서둘러 움직였다. 먼저 작천면 토마리를 향해 약 5분간을 달렸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병영쪽으로 길을 바꿨다. 약 2Km를 가니 우측으로 토동이란 글이 써 있는 간이 버스 승강장이 나왔다. 바로 옆의 길을 따라 우회전하여 들어가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산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갔다. 길 끝 지점에 차를 주차하고 여자들은 차에 남고 남자들만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다. 풀이 무성하니 아들놈은 다소 겁을 먹은 눈치다. 반바지를 입고 따라오던 놈의 종아리에는 풀잎에 스친 여러 줄의 핏빛 줄무늬가 선명하다. 그래도 할 수 없는지 내가 디딘 발자국만 밟으며 아무 말 없이 따라온다.
나무와 풀숲에 반 정도는 잠겨 있는 재실이 나타났다. 대문은 잠겨 있었으나 그 옆쪽으로 헐어 있는 곳을 통해 들어갔다. 안은 온통 풀이다. 재실도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다. ㄷ자 형으로 지어 졌는데 대문에 딸린 기와 한 채와, 왼쪽으로 사람이 기거하던 기와 한 채. 그리고 중앙에는 양철 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었다. 약간은 을씨년스러웠다. <永慕齋>(金在洪 書)란 특이한 서체의 현판이 선명하게 걸려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재실 앞의 논을 경작하며 사람이 살았는데 이젠 이곳에 들어와 살 사람이 없다고 한다.
묘소로 가기 위해 재실 왼쪽 산길을 따라 돌아 나왔다. 묘소와 재실 사이 약 10m는 온통 동백나무 숲이었다. 그렇게 크게 자란 자생 동백은 처음 보았다. 어떤 나무는 굵은 뿌리 중간 부분이 땅 위로 나왔는데 그 위로 동백나무가 또 3그루 정도가 가늘게 싹을 틔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분재 욕심이 났는지 톱으로 한 쪽을 잘라 놨다. 시제때면 일가분들이 제일 큰 나무 아래로 무수히 자라고 있는 어린 동백들을 기념으로 파 간다고 했다.
묘소에 이르니 맨 위로부터 나란히 아래를 향해 4기의 묘소가 있다. 벌초하기 전이라 풀은 무성했으나 잘 수호되고 있었다. 모든 묘의 봉분에는 둘레석이 돌려져 있었고 상석도 새 것으로 했으며 옛 상석들은 버리지 않고 산신제 상석으로 쓰거나 묘소 주변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묘비석들도 대자비에 갓머리를 씌워 아름다웠다.
직계 후손이신 발용님의 눈빛과 몸짓이 달라진 것 같다. 예손인 나보다 얼마나 감동이 크시겠는가! 먼저 판서공 휘 선 선조님의 壇墓에 준비해간 祭酒를 발용님이 헌주하고 배례를 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오며 차례로 성묘했다. 묘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1)典法判書金公祭壇碑 郡夫人淳昌薛氏合享.
2)奉翊大夫密直司事寶文閣大提學安東金公承用之墓 原州郡夫人原州元氏
3)上洛君安東金公厚墓 郡夫人驪興閔氏 合
4)贈吏曹參判行遂安郡事安東金公七陽之墓
그런데 맨 마지막 군사공의 묘소 뒤편에는 하늘로 향한 ㄷ자 형의 석물이 있었는데 참 특이했다.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 앞 양 옆에는 오래 묵은 듯한 문관석이 하나씩 나란히 있었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였지만 이곳이 명당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넉넉한 묘소 뒤의 주산, 좌우로 길게 늘어져 묘소를 감싸 안고 있는 청룡과 백호의 좌우 수호 산, 앞의 옹기종기한 안산들, 그 사이에 혈로 보이는 그 자리에 바로 묘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다시 위로 올라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카메라와 캠코더로 열심히 촬영하였다.
온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재실을 지나 걸어 나오는데 발용님은 연방 뒤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자꾸만 뒤에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언제 와서 성묘할지 모르는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정이리라. 가슴 부듯함을 안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지금 이곳 토동에는 우리 일가가 거의 없지만 郡誌에는 종친들이 여러 가구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재이씨는 전한다.
토말(토동)을 나와 우회전하여 군동면 내동리 방향으로 가다가 고개 하나를 넘으니 하방리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해남윤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을 지나 작은 오르막 고개를 오르니 재이씨는 차를 세워 '이 고개 좌우의 산이 우리 군사공파 종산이며, 이 산 기슭에 수십기의 문중 종친 묘소가 있다'고 설명한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다가 가파르게 좌회전하여 소로를 따라 들어갔다. 길 옆 좀 떨어진 곳에는 해주최씨의 재실이 있고, 그 길 바로 옆에는 새로 사초하고 검은 그물을 덮어놓은 묘소 하나가 있다. 이 묘소가 동원그룹 김재철회장님 아버님의 묘소라 한다. 목례하고 내동리 마을로 들어갔다.
동네 입구에 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군사공파 재실로 시제 때면 종친들이 묵어 가는 곳이란다. 이어 동네 안으로 들어가니 약 50여 호의 가옥이 나온다.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마을 가운데에는 커다란 2층 마을회관 건물이 있었고 그 앞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여러 어른들이 한 여름의 뙤약볕을 피해 시원하게 쉬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 난 길옆에는 1984년에 세운 <安東金氏世庄碑>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거북 좌대에 용머리를 하고 서 있어 이곳이 우리 종친들의 세거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 모두를 김재철 회장님의 기금과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을 중앙 뒤쪽으로 커다랗게 잘 지은 기와집 두 채가 있는데 이것이 재철 회장님의 생가로 지금은 모친께서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약 40여 호의 종친들이 거주하였는데 지금은 겨우 10여 호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재미없는지 에어컨 있는 차에서 나오지 않는다. 차를 몰아 이제는 순수 관광으로 들어갔다. 강진읍으로 가서 김영랑 생가를 찾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1930년대 순수시의 제1인자였으며 우리말의 연금술사였던 님의 생가였다. 집터는 옛날에는 절터였단다. 역시 명당 양택지였다. 맨 앞의 대문은 싸리문으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안채로 들어 가는 중문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에 님의 대표작품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집안에는 모란이 여기 저기에 심어져 있었으며 지붕은 초가로 잘 단장돼 있었다.
다시 차를 몰아 다산 초당으로 갔다. 18여 년 간 유배생활을 보냈던 곳이다. 다산은 28세에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8년 간은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1808년 봄에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 해배되기 까지 10년간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한다. 모든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강진읍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었다. 재이님께서 사신다며 들어간 음식점은 강진에서 소문난 백반집으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불과 1인당 5000원짜리인데도 서울의 20000원짜리보다 맛났다. 정말 맛있는 식사였다. 이어 고려청자 박람회장으로 갔다. 재이씨의 특별 대접으로 별도의 비로로 들어간 우리는 재이씨께서 살고 계신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를 지나갔다. 재이씨의 집터와 근처도 바로 고려시대 가마터였다고 한다, 모든 곳은 특별법으로 묶여 개발 제한되어 있다고 하며 앞으로 고려청자 상설 전시관이 님의 마을 앞에 건축될 계획이며, 바로 그 경계에 재이씨께서 직접 짓는 논이 있었다.
행사장에는 많은 고려청자가 전시되고 있었으며 자기 빚기 전국대회, 고려청자 도요지의 설명을 위한 전시관, 관람객과 학생들을 위한 다채로운 기획행사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행사는 7,8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재이씨께서 이 행사를 주도하고(대구면사무소 근무) 있다고 했다. 헤어지려는데 우리들에게 자기향로 1점씩을 선물로 주셨다. 너무도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우리는 고산 윤선도 고택을 향해 해남으로 갔다. 85세 한 평생을 유배와 낙향으로 산 속이나 외딴 섬에서 보낸 분이시다.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26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는 등 중용되었다가 당쟁에 휘말려 평생 영욕을 거듭하였다. 시조 <산중신곡> 22수와 <어부사시사> 40수 등 약 75수는 우리 시조문학에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가지고 간 <하담 김시양 문집> 속에는 고산에 관한 글이 있기에 관리실에 이를 전하고 고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택과 전시실을 살피고 나왔다. 이제 발용씨와도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우리는 휴대폰으로 석별 인사를 하고 도로상에서 헤어졌다. 긴 여정을 함께 했다. 참으로 부지런하시고 마음씨 고운 분이시다. 사모님과 아드님 형주와 함께 하는 모든 모습이 참 다복해 보였다.
부안에서 국도로 나와 정읍으로 들어가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탔다. 청주에서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증평을 거쳐 괴산 고향집으로 갔다. 대문에는 도착할 아들이 어두울 것을 염려하여 부모님께서 켜놓으신 외등 불빛이 밝았다. 밤 11시이다. 집안에 들어서니 부모님과 동생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사 올리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한 잔 술과 섞이는 고향의 밤은 끝없이 즐겁기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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