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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온공 종택 발굴 및 조사 보고(2004. 12. 20--. 글-영환(문), 사진-김발용 제공)
일요일 새벽 심한 갈증에 눈을 떴다. 아직 어제 있던 안사연 송년회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하나 무언가 가슴에 벅차 오르는 뭉클함이 있기에 몽롱한 정신에서도 잠을 깨기 위해 세수를 하고 보내 새벽 5시이다. 이렇게 일찍 깬 것이 갈증만이 아닌 것이 따로 있기에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제 망년회 자리에서 받은 다급한 전화 한통, 그것은 문온공 종손인 광도씨였다. “대부님 계획이 바꾸어서 종택 발굴이 내일로 거의 마무리 되어 조사담당 교수가 내일 내려 온다고 하니 대부님께서 꼭 참석하여 주셔야 겠는데요, 어쩌면 좋지요?
내일 아침 모시러 가면 안 되될까요?“ 나는 전화 다시 해 주마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지나야 끝날 거라며,, 지금은 겉흙을 걷어내고 있으니 다음 주중에 내려와 달라고 어제 종손에게서 연락을 받았기에 내일(일요일)점심때 초등학교 동창들과 동창회 겸 망년회를 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동창망년회가 문제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일 포천으로 내려가기로 결심을 하고 종손에게로 전화를 했다. 내일 내려 가겠노라고... 아! 그랬지, 오늘 아침 포천에 내려 가야하지...
종택의 초석 발굴. 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숙원이었다. 듬성듬성 묻혀있는 사방 30Cm가 넘는 네모 반듯한 -흡사 왕궁터의 그것같은- 주춧돌을 보면서, 이마도 누각 기둥의 주춛돌이었을 높이 1M쯤 되는 큰키주춧돌을 금수정 갈 때마다 돌아보면서, 언젠가는 이 종택을 발굴하여 원형을 복원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기를 십수년... 올봄 포천시청으로부터 종택터의 기초조사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
포천시청에서는 기초발굴조사에 4,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하여 조사용역을 공개입찰을 했으나 유찰되어 또 얼마나 속상했는지... 도대체 그런 조사사업비에 사천만원을 책정한 공무원만 속으로 미워하면서 새겼는데.. 가난한 포천시로서는 그나마 어렵게 만든 예산인데 올해를 넘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 조렸던 나날이었다. 포천시문화담당공무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단국대학 매장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작업을 맡기로 했단다. 뛸듯이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아침일찍 조반을 챙겨 먹고 집을 출발했다. 도중에 태우씨와 발용씨가 동승하여 우리 셋은 설레는 마음으로 포천을 향해 달렸다. 엊저녁 모임에서 나는 이 종택터 얘기를 했고, 모여있던 모든 분들이 동참하고 싶어 했지만 년말 계획이 잡혀서 결국 두분만 동참하게 된 것이다.
포천읍을 지나 얼마쯤 달렸을 때 “어! 대부님! 조경선생묘가 여기 있네요. 방금 표석을 지나왔네요” 발용씨의 이런 얘기도 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조경선생에 대해 서로 많은 얘기를 했을텐데.... 조경선생의 배위도 우리 우리 집안이고 한양조씨는 포천에 세거하면서 우리 문온공파와는 많은 혼맥이 이어저 있는 집안이다. 지금 현재의 종부(광도-태항의 포천돌림자는 光--씨 어머니)도 한양조씨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종택터 초석만 머리에 있을뿐, 건성으로 흘려버렸다. 발용씨가 조금은 무안하거나 서운했을 런지도 모르겠다. 삼팔선휴게소를 지나 전곡쪽으로 좌회전하여 잠시 숨을 돌리려고 가까운 가게에 들려 종부께 드릴 부드러운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다시 출발하였다.
10여분 달려 멀리 금수정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문온공 단소가 모셔져 있는 금수정으로 좌회전하면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금수정 입구 밭에 새로 지은 종부가 계시는 따님댁을 그냥 지나처서(들려서 종부께 인사드린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곧바로 금수정으로 들어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종택터의 적나라한 초석들.. 이 순간 왜 황룡사지를 연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발용씨는 먼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역시 못말리는 매니어--- “사진 촬영은 문화재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데요...” 그림 그리는 캔파스 같을 것에 모눈종이를 대고 그림를 그리는 연구원이 촬영을 제지하며 출입을 막았다..
문화재관리법에 의하면 발굴중인 현장은 외지인이 출입할 수도 없고 촬영할 수도 없단다. 어기면 처벌 받는다나... 이 말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발용씨와 우리는 순간 돌부처가 된 듯했다. "저 문온공파종회에서 왔습니다. “ 하면서 명함을 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박교수께서는 않오셨냐고 하고 오늘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서 말을 풀어 나갔다. 그제서야 경계의 눈빛이 좀 풀리는 듯 했다. 사진은 찍지 않을것이며, 발굴현장에 지장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둘러보겠노라고 하여 승낙을 받았다. 솟을대문이 있었던 주춧돌을 보면 솟을대문 좌우에 작은 방이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또 있다. 음수재 솟을대문과 좌우 곁방을 연상하면 딱 맞을 듯 싶다. 이 대문은 금수정쪽을 향해서 나 있다.
지금은 뒤쪽(종택터에서 보면)으로 입구가 나 있지만 옛날에은 금수정 왼쪽 현재의 문온공 단소가 모셔져 있는 아래쪽이 입구였을 것을 짐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금수정쪽은 절벽이 10여미터이니 불가능 할 것이고,, 전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졌을 것이니 금수정 밑 절벽을 돌아서 종택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암각문이 있으니, 커다란 바위에 洞天石門이라고 새긴 단정한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다. 成海應의 [東國名山記]에 이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를 통해서 종택이나 금수정으로 올라갔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바위뒷쪽에는 또 암각문이 있는데 이 글씨는 瀾石이라고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글씨는 중국황제의 사신 허국이 쓴 것이며 원래 廻瀾石이란 글자인데 회자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廻자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위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중문옆으로 곳간인 듯한 방이 있다. 중문초석에는 문지방을 걸었음직한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다. 안채는 디귿자형의 내실인데 앞마당이 조금은 좁은 듯하고 안채의 내실이 규모에 비하여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 곳은 육이오 때 종택이 불난후 임시로 종가를 지었으므로 훼손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안채 옆으로 주춧돌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다른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도 몇 개의 주춧돌이 빠져 있으나 그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발굴현장 근처에는 많은 주춧돌이 모아져 있으니 틀림이 없으리라. 안채옆 건물을 별채라고 우선 이름 짓고 이 별채 앞쪽으로 또 커다란 주춧돌이 있으니 아마도 사랑채였을 것 같다. 이곳은 십여칸의 건물과 이어져서 높은 누각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높이 1.5미터의 높은 초석이 세 개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개는 부러져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주춧돌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누각에서 앞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금수정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고 금수정앞으로는 영평천이 휘돌아 나가며 그 냇물에는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있듯이 많은 바위들이 물위에 솟아 있다. 이곳을 연화암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또한 많은 암각문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瓊島(또는 浮島)라고 짐작되는 80 x 120센치미터의 대형 초서가 있고, 그 옆 바위에는 초서로 된 한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봉래집에 의하면 贈琴翁詩 라고 되어 있으며 이시는 많은 문인들 사이에 알려진 자료이다. [東國輿地誌] 및 [東洲集(이민구)]에도 또한 인용하고 있다. 봉래집에는 증금옹시를 적고 그 말미에 琴翁은 금수정주인이다 라고 적혀 있어 당시 금수정이 안동김씨의 소유였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琴翁은 척若齋선조의 5대손 金胤福(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복)할아버님의 호이기 때문이다. (금수정옆 바위 위에는 금옹할아버님이 거문고를 연주하셨다는 琴臺가 있으며 이곳에도 琴臺라고 단정한 해서가 새겨져 있다. )
증금옹시 초서 옆에는 큰 웅덩이 같은 바위가 있는데 마치 술동이 같다하여 尊巖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 모든 글씨가 봉래양사언선생의 친필암각문이다. 이 연화암이 있는 영평천 건너 오른쪽으로는 작으마한 동산이 있으니 지금 할미산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종가 소유이다. 금수정과 할미산 가운데를 영평천 넘어 아득한 벌판이 이어져있으니 그 정경이야말로 이루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고려때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 넘어를 바로보며 시를 짓다가 댓구가 생각안나 울고 내려왔다는 시가 연상되는 그런 곳이다.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 - 긴 성벽 한쪽으로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산들이 점점점"
정신없이 종택주춧돌을 한시간여 살펴보고나니 한대의 렉스턴짚차가 들어온다. 작업중이던 연구원들과 일하시는 분들이 저분이 박교수님이라고 한다. 박교수는 우선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우리(나, 광도, 태우. 발용)가 있는 곳으로 왔다. 박교수와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소장.
문화재위원회 제1전문위원. 조계종성보보존위원회 전문위원. 교육학박사 박 경식 “안동김씨 종택을 발굴하게 된 데 대해 개인적으로는 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종택 발굴을 하면서 이곳의 지형이 선사시대의 주거지 였을 가능성이 매우 많아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좀 더 많은 곳을 발굴하면 선사시대의 흔적을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면 종택발굴사업에는 많은 애로가 있을 것이어서 가슴 조리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종택의 규모가 99칸이라고 전해오나 그렇게는 볼 수 없고요.
생각보다 안채의 규모가 작아보여서 지금 안채의 동쪽 부분을 더 발굴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안채보다는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구요. 또 종택에 딸린 하인들이 살았을 부속건물들이 발견 되지 않고 있네요. 물론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현재 발굴지역을 넓혀가지 못한 상태여서 이에 대해서는 좀 미흡합니다. 그리고 출토 유물들도 보잘것 없는 것도 이상합니다. 현재로서는 조선후기 이후의 유물이 조금 발굴 된 상태입니다. 생활용품의 유물도 그리 많지 않구요. 종손부의 말씀을 들어보면 육이오때 종택이 불타고 난 후 들어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구들장까지 뜯어 갔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때 많이 없어 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랑채의 규모는 상상보다 대단함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각이 있었을 기둥 네 개중 한개는 부러져 있지만 그 웅장함이 놀랠만합니다.“
문온공부터 현종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선조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나는 부족하지만. 문온공(척약재)할아버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구전되어 오기를 금수정의 지으셨다는 성천도호부사공(휘 김명리)의 내력에서부터, 고려사를 편찬하신 직제학공(휘 김맹헌)께서 노후 이곳에 은퇴하시어 말년을 보내셨으며, 지금도 근처 종산에 영면하고 계시며 이후 참의공(휘 김자양), 청도군수공(휘 김예생), 가선대부 경상좌병사공(휘 김윤종), 공주판관공(휘 김윤선), 금수정의 기록으로는 최초로 나오시는 금옹공(휘 김윤복), 이후 별제공(김진기), 의금부도사공(김대섭), 철원부사공(김확), 그리고 부사공의 매부이신 지봉이수광. 교산 허균과 이곳 금수정에 얽인 인물들,봉래 양사언,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번암 채제공, 농암 김창협, 화서 이항로. 면암 최익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금수정주변이 널려있는 암각문에 대해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후 이 종택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결과, 이 건물을 처음지은 것은 정확할 기록이 없지만 임진란 이후 조선 후기에 별서(別墅)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후 조선 말기 이후는 이곳에서 종손가가 계속 살아 오셨으리라. 이런 짐작을 하는 것이 건물의 구조상 안채가 빈약하고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한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別墅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당시로서는 제2의 종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교수님 주춧돌 같은 것이 나옵니다.” 이때 발굴중이던 인부들이 박교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 아직 부족해 보였던 안채의 다른 부분이 발견되나 보다 하고 흥분이 되었다. 박교수를 따라 나도 현장에로 가보니 가지런히 쌓은 돌무더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박교수는 조심스럽게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주변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호미로 파고 빗자루로 그곳을 쓸어내기를 여러번하니 어느정도 돌더미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쯤 되는 규모로 돌을 가지런히 쌓이 놓고 그 위를 넓은 돌로 덮은 그런 상태 였다. 구조물 앞뒤에는 처맛돌같이 돌을 세워 놓은 것도 특이 해 보였다. 심상치않은 박교수의 눈빛을 보고 나는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돌더미가 종택의 주춧돌이 아니라면?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계산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선사시대의 장묘형태입니다. 아마도 약 3,000년전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 추정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이 곳이 지형적으로 선사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충분한 조건을 갖추어서 기대반, 우려반이었는데, 이런 것이 나왔군요.” 여기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왔으면 좋겠네요.라고 어는 종친이 말하니 박교수는 빙그러 웃으면서,
“그런 유물이 나오면 안동김씨 집안에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온다면 이곳은 종택 주춧돌까지 다 들어내고 다시 일대를 발굴해야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이 일대는 발굴이 끝나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종택복원도 불가능하구요”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모두들 작업을 중단하고 식사하고 계속하기로 하였고, 박교수는 연구원에게 주과포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듣는 순간. 아, 이제 종택 복원은 완전히 물건너 갔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와 가슴이 무거워 졌다.
점심은 종손녀가 사는 집에서 어제 만들었다는 손두부에 곰삭은 김장김치를 곁들여 맛있게 먹으면서 박교수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의논했다. “현재상황으로서는 청동기시대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상세히 발굴하여 유물이나 자료가 나오면 학계에 보고하여야합니다. ”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발굴팀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이동하여 간단한 제사가 시작되었다. 연구원이 준비해온 포와 과일을 놓고 술을 올려 3000여년전에 묻혀계시는 분께 정중한 제사를 지냈다.
이때 핸드폰이 울린다. 항용씨와 주회씨가 여기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의정부까지 전철을 타고와서 포천까지 버스로. 그리고 다시 창수로 오시겠다는 것이니 그 열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두분께서 점심을 못했고 시간이 촉박하니 빨리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여 종송녀댁에 두분의 점심을 부탁하고 다시 발굴현장으로 돌아오니 측량도구로 현장을 정확히 측량하고 또 그림을 그리고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
박교수는 어제 샀다는 600만원짜리 카메라의 처녀촬영이란다. 아마 100여장의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머리 속에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현장사진과 함께 ***청동기시대 묘 발견-- 포천군 창수면에서 안동김씨종택 발굴하다 발견-- 이런 기사가 날 것 아닌가 하고 속이 끓기 시작했다. 항용씨와 주회씨가 도착했다. 종손녀댁으로 안내하여 점심을 들게 하고 나는 곧바로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변의 흙을 호미로 걷어내고 빗자루로 쓸어내기를 수십차레 반복하니 떡을 굴려도 티끌하나 안 묻을 만큼 깨끗해졌다. “이제 맨 앞쪽에 있는 이맛돌부터 걷어내세요”
박교수의 이 말에 나는 이속에서 유물이 나온다면? 고고학적으로는 대 경사가 되겠지만 종택복원은 어쩌란 말인가? 또다시 머릿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고고학적 대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래야 하나, 아니면 내 욕심대로 그저 아무것도 아닌 돌무더기이기를 바래야 하는가! 머릿속 대 전쟁이 나는 듯 했다. “안동김씨집안에서는 아무런 유물이 안나오기를 기도하세요” 박교수의 이말에 “광도씨! 문온공 단소에 가서 절하면서 빌어 봅시다” 이렇게 내가 말했다.
옛날 청송심씨할머니(도사공 휘 김대섭의 배위. 경기감사 심전의 따님)는 외아들(철원부사공 휘 김확)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니 주변에서 푸닥거리를 하기를 권했단다. 이에 할머니께서는 “기도할 만한 神이 있다면 우리 先祖만한 신이 또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고 가묘(사당)에 정성껏 제사지낸 결과 아들(김확)의 병이 과연 낳았다는 기록이 있지 않는가? 이 내용은 상촌선생(신흠)이 지으신 [의금부도사안공김공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조심스레 이맛돌(앞쪽과 뒤쪽에 세워져 있는 돌)을 걷어내기 시작하였다. 다시 덮개돌을 하나 걷어냈다. 아래쪽이 검은 그런 돌이었다. 이어서 덮개돌 서너개를 거두어 냈지만 모두 안쪽이 검게 그을린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면 이는 무덤이 아니지 않는가? 무덤에 불을 놓았다는 말인가? 왜 돌들이 모두 검게 그을려 있을까? 덮개돌을 모두 들어내서 옆으로 모아놓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속으로 이는 무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웃움이 나왔다. 그제서야 내 옆에 어느새 주회씨와 항용씨가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맞은편에는 발용씨와 태우씨의 긴장된 모습도 보였다. 할아버님께 기도했던 영험이 나타나는 것인가? 이는 분명히 무덤은 아닌 듯 했다.
발굴단원. 인부들, 그리고 우리 안동김씨 일행 모두 박교수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좀더 내부를 파 보아야 하겠지만, 무덤은 아니 듯 싶고 선사시대의 초기 온돌구조인 듯 싶습니다. 이런 자료 또할 귀해서 무덤 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 잠깐동안 가슴속에서 무덤이 아닐거라는 안도감이 있었는데 이 무슨 액운이란 말인가? 점점더 희망과는 멀어져 가는게 아닌가! 조상님께 기도를 잘 못한 것인가? 다시또 차근차근 발굴이 시작되었다.
조심조심 흙 한줌 한줌을 파 내려가면서 모두들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박교수의 예리한 눈빛이 돌틈에 내리 꽂히고, 작업하는 연구원들과 인부들의 손끝에서 흙한덩어리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섬세함에 우리들 안동김씨일동은 숨을 죽이며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길이 2미터 남짓하고 폭이 1미터쯤되는 타원형으로 둘러쌓인 돌더미 가운데에 흙을 조심조심 파내기를 이십여분... 문득 내눈에 조그만 기와파편이 들어왔다.
연구원은 즉시 이 파편을 거두어내고 박교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박교수 얼굴에 스치는 야릇한 표정에서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뭉클함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건너편에 있는 발용씨에게 눈빛을 주었다. 아!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앞으로 선사시대의 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한 분명히 이 돌더미는 선사시대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증거가 충분히 되리라.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기와파편이 출토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추리는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는 듯 했다. 계속해서 옆의 흙을 모두 거두어 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깨어진 기와파편을 손으로 만지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아무 쓸데 없는 기와파편은 내가 고마운 기념으로 갖어야겠다고 했더니 박교수는 그것이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니 따로 처리해야겠다고 했다.
아무려먼 어떻한가! 이 돌무덤이 선사시대 유물만 아니라면.... “구둘장이 모두 검게 그을러 있고 옆의 세운 돌들도 모두 그을러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기와 파편으로 미루어 보면 이 돌무덤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근세의 온돌인 듯 합니다. 그러나 바닥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을 때는 다른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아, 밖에서 불을 땐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불길이 들어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만, 어쨌던 선사시대의 유물이 아닌 것은 틀림 없습니다.“
박교수의 이말에 우리(안동김씨 일행)은 모두 지옥에서 천당으로 다시 올라온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몇시간 동안 모두 얼마나 가슴 조리며 조바심했던가? 그제서야 우리 모두는 환한 웃음으로 주위를 맞을 수가 있었다. 언제 오셨는지 김도만 부회장님의 모습도 보이고, 긴장에서 풀린 종손 광도씨와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흐르는 안사연 식구들(태우,발용,항용,주회)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때의 기분을 글로 쓸 수 없는 내 재주가 몹시 한탄스럽기만 하다. (이틀후 내가 다시 현장을 갔을때 이 돌더미 발굴 현장은 흙으로 덮여져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팠던 흔적만 있을 뿐.. 당시 애탔던 우리의 마음만 허고에서 맴돌고.. 모든 지표면은 비닐로 덮여저 있었고 주춧돌만이 열병식하듯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보면서그제의 애탔던 상황을 다시한번 새겨보았다..)꼬리 짧은 겨울해는 벌써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초석이 반듯반듯 줄지어 있는 발굴현장을 한발한발 더듬어 가면서 이 종택이 원래의 모습으로 재현복구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요새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가상의 재현도 하는 것을 본적이 많은데(역사스페셜 같은데서) 그렇게라도 해불 수 있다면 얼마나 장대하겠느가? 박교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은 초겨울 해는 저물어 가기 시작하였다. 저녁먹고 가라고하는 종손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부지런히 포천으로 향했다. 아침에 올때 건성으로 지나친 조경선생의 묘를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포천안동김씨 종가집터 발굴조사 보고서> (매장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총서 제28책)
박경식, 최문환, 강형웅 2005.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포천시 (2005. 3. 영환(문) 제공) 1. 서언 안동김씨 종가집터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한 곳이며, 영평천과 접하는 완만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종가집터는 동남쪽에는 포천시 향토유직 제17호인 ‘금수정’이 위치하고 있다. 포천시에는 조선시대 절경이 맑은 계곡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영평8경이라 불리던 명소가 있었으며, ‘금수정’은 영평8경중의 하나였다. 특히 금수정은 양사언, 이덕형, 박순, 이의건, 김수항, 김창협 등 저명한 문사가 자주 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금수정 주변에는 여러 문인들이 새긴 암각문이 있다. 그 중에서 동천석문(洞天石門)은 학석봉의 친필로 유명하며 냇가 한 복판 바위에 새겨진 ‘경도(瓊島)’는 양사언이 금수정에서 소요하면서 각자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일대의 암각문은 서체가 조선조 4대 명필가에 속하는 양사언과 한석봉의 글씨라는 점에서 금석학에서 뿐만 아니라 서예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동김씨 종손인 김광도(67)님의 전언에 따르면 안동김씨 종가집과 금수정은 6.25전쟁 당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고 한다. 휴전협정 이후 김광도님이 기단 및 초석만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일부 유구 위에 가옥과 기타 건물을 세웠고, 최근까지 이곳에서 생활을 하였다.
건물지 일대는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고 초석과 기단석이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어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 일대는 포선 지역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훈련지역이어서 유구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포천시에서는 안동김씨 종가집터에 대한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호하기 위하여 본 연구소에 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본 연구소에서는 2004년 12월 8일부터 2004년 12월 29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번 조사을 위하여 본 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지도위원;조유전(동아대학교 석좌교수),정영호(단국대학교 석좌교수),김동현(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단장;박경식(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장) 조사원;엄기표(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김철웅(동),정성권(동),방유리(동) 조사보조원;이재설(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최문환(동),강형웅(동)
이밖에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 연구소 연구원 김호준 등이 참여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고서 작성과정에서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인 강경남, 박지영, 이순연과 단국대학교 인문과학부 4학년 조충현 등이 참여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현장 조사는 박경식의 총괄 하에 서영일, 김철웅, 엄기표, 정성권, 강형웅 등이 실시하였다. 수집된 유물에 대한 정리 및 실측은 방유리, 최문환, 강형웅, 박지영, 이순영 등이 담당하였다. 현장 사진과 출토된 유물의 사진 쵤영은 정성권, 김호준 등이 담당하였다. 사진 및 도면의 정리는 김호준, 정성권, 강행웅, 조청현 등이 담당하였다. 보고서 작성은 박경식, 최문환, 강형웅 등이 나누어 집필하였고 마지막으로 박경식이 최종 검토하였다.
조사단 이외에도 원활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신 지도워원님들, 행정적 지원을 해주신 박윤국 포천시장님, 문화관광과 ?해정 담당관님, 정만규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조사단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를 도와주신 이승재,이원춘, 이규만, 김정배, 장비기사 신성우님과 박국도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폐기물 처리를 도와주신 김근수 사장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조사지역 일대의 전체 측량과 이번 조사시 필요한 도면을 제공해 주신 한빛토건 이주희 사장님과 최용수씨를 비롯한 직원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조사기간 동안 조사단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주신 김광분님과 김광덕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조사에 늘 아낌없는 지원를 해주시는 단국대학교 연구과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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