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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金水壇 2) 모신 선조님 : 양간공(휘 승택-承澤), 상락군공(휘 묘-昴), 문온공(휘 구용-九구容) 3) 3위 선조님 영단 사진 소개 *삼위 영단 전경
<3위 영단 전경>
(1)양간공(良簡公)-충렬공 三世孫 휘 承澤(승택).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중서시랑평사 도첨의정승. 시호 良簡公 .
(2)상락군공(上洛君公)-충렬공 四世孫 휘 昴(묘)--중대광 중서평장사 上洛君.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金水壇(金水亭 )
(3) 문온공(文溫公)-충렬공 五世孫 휘 九容(구용)--영록대부 진현관제학 성균관대사성 판전교시사. 시호 文溫公 . 初名 齊閔. 字 敬之. 號 小易若齋.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金水壇(金水亭 )
4) 안동김씨 世阡碑 --금수단 경 내에 있음
<세천비문>
吾金璿源은 新羅國 太輔公 金閼智에서 비롯하여 勢漢 阿道 首留 郁甫 仇道 末仇 奈勿王 卜好 習寶 智證王 眞宗 欽運 摩次 法宣 義寬 魏文 孝讓 元聖王 禮英 均貞 神武王 文聖王 安 敏恭 仁慶 孝宗 慶順王에 이르기 까지 제왕후를 상계대로 하고 경순왕 제4자 대안군 휘 銀說 공부사랑공 휘 叔承 태사대광공 휘 日兢 상락군 휘 利請 예부시랑공 휘 義和 우복야공 휘 敏成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중서시랑 휘 孝印을 중계대로하여, 고려국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 개국공 첨의령중찬 諡忠烈 字本然 諱方慶을 경진년에 世祖로써 創譜하였는바 충렬공께서는 서기 1212년 안동에서 탄생하시어 35세인 서기 1247년에는 서북병마판관에 累陞 배임되었으니, 공은 평생을 蒙元과의 정치적 대치속에서 국권의 회복과 정통왕정의 복고를 위하여 진충보국하시었으며 소위 삼별초지란을 토평하고, 2차에 의한 征東시에는 고려군 도원수로써 대마도 博多 太宰府까지 진격공략하나 험한風濤로 회군한 바 있었지만, 麗史는 공을 入則名相이요, 出則名將이라 고려 英雄중의 찬연한 상징적 존재로 숭앙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니라.
서기 1300년 89세에 서거하시니, 幽宅이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죽송동이라. 690여년이 흐른 충렬공의 實墓가 吾金 대종회의 관리하에 엄격수호되고 있음이요, 2세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諱 小宣이니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선영 상단에 설단하고, 3세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영창군 치사 諡 良簡公 諱 承澤이요, 4세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중대광 上洛君 諱 昴요, 5세가 봉익대부 성균관대사성 진현관제학 판전교시사 字 敬之 號 척若齋 諡 文溫公 諱 九容이시니 吾派祖 척약재께서는 북원사신 영접 외교반대의 상소이유로 죽주를 거치어 여흥에 유배되니, 7년 摘居를 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금사지서 앞산 麗江邊 산정에 六友堂을 짓고 살으셨다. 오늘은 금강산이요 내일은 삼일포라 사선정을 거쳐 경포대에 주무시고 삼척에서 안동을 둘러 치악산 속리산을 돌아 다시 여강에 돌아오시니, 때로는 이곳 창수천변을 소요하였었다.
어느 날 척약재는 그 次子 소년 明理와 이곳에 들려 "暮釣蒼江月이요, 朝耕綠野雲이라 " 읊으시다가 문득 이곳에 '소머리像' 이라 하시었으니 후일 성천도호부 부사에서 퇴직하신 6세 호 炭谷野 휘 明理께서 이곳에 둘러 정자를 竪築하고 '牛頭亭' 이라 부르게 하고 長子인 孟獻을 이곳에 보내어 면학수학토록 하시었었다. 서기 1426년 세종8년에 孟獻이 등제하여 관이 예문관직제학하고 퇴직하여 은퇴지를 이곳 영평현 창수에 자리 잡으시니 이때 아우 휘 仲舒는 호조참의요, 끝아우 휘 季友는 의정부舍人이었다. 봉래 淸州楊公 士彦은 이 고장 출신인지라 정주성리학과 주역에 통달한 시인이다. 조선 4대 서예가로써 회양, 철원부사등 수려한 지방만을 자원부임하여 善政하고 은퇴한 詩墨客이니, 그는 금강산 만폭동 바위위에 '蓬萊楓嶽元化洞天' 이라 새기더니, 어느 날 직제학공 孟獻之孫인 진사공 胤福과 더불어 이곳 우두정에서 詩詠할 때 이곳 정자이름을 오금의 '金'과 창수의 '水'를 따서 '金水亭'이라 개명현액하고 軒楹에 '娛樂風月'이라 써서 걸어 달았는데 지금은 정자 礎壁에의 '金水亭' 과 옆바위에 '洞天石門' 이라 새긴 해서와 川中巖上에 새겨놓은 '浮島' 라 쓴 초서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정자 동녘에 멀리 보이는 천주산을 중국의 태산에 비유하여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읊었던 蓬萊詩만이 세상에 전하여 지고 있으니 서기 1618년 광해조 무오문과에 등제한 13세 철원부사공 號 金沙 諱 확 (지봉 이수광, 교산 허균의 처남) 이 퇴직 귀향하여 금수정을 단청보수하고 부대건물을 개축한지 330년간이나 창수면 추동과 주원리 별제공후손 문중의 관리하에 금수정이 유지되어 왔었다. 6.25 戰火는 정각과 부대건물을 앗아가 수십년간 황폐되어 방치되었으니 포천군의 배려로 말끔히 復元된 바 있다.
吾派 직제학공계 후손은 포천 음성 서울 일원에, 참의공계는 전북의 김제 완주 익산 옥구 등지에, 사인공계는 수안 괴산 광주 예천 영천 대구 등지에 집단 거주하고 있으니 그 수는 일만이천여명에 달한다.
이제 늦게나마 吾派대종회가 이곳 역내에 영창군 상락군 문온공 三位를 설단하여 금수단이라 통칭하고 가양리 묘역내의 척약재 壇址에 성천도호부 부사공 휘 明理之墓의 이장 사업을 마치고, 이제 竪碑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 본 사업의 완수를 위하여 포천의 별제공 후손 종중이 적극 협찬하였음은 문중의 경사이기에 높이 찬양하면서 고증 자료를 제공하여 주신 諸宗에게 감사히 여기노라.
서기 1989년 8월 문온공 20세손 在承 撰 문온공 20세손 在洪 書
5) 문온공 척약재 詩碑 소개 장소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정 경내
前面 <小易若齋先生 詩碑>
<확대 모습>
帆急 帆急山如走 돛이 빨리 나부끼니 산이 달리는 듯 舟行岸自移 배가 나아가니 언덕이 스스로 옮기는 듯 異鄕頻問俗 낯선 땅에 이르면 풍속을 묻고 佳妻强題詩 경치좋은 곳에선 억지 시를 읊고요 吳楚千年地 오나라 초나라 오래된 땅에 江湖五月時 양자강과 호수는 오월이구나 莫嫌無一物 내 한푼 없다고 싫어를 말라 風月也相隨 나에겐 아직도 풍월이 서로 따른다네
<後面>
道美寺寄敬之 牧隱 李穡 六友堂中君子居 육우당에 군자가 살고 계시기에 滿天淸興更無餘 온 세상에 가득한 흥취 다시 남음이 없네 滂江家處多苛絶 驪江 가는곳마다 좋은 경치 많아 欲乞殘生對結盧 원컨대 남은 삶 마주보고 집지어 살고 싶다네
揚子江渡望北固山悼 圃隱 鄭夢周 先生豪氣蓋南州 선생의 호기가 중국 남쪽을 다 덮으니 憶昔同登多景樓 다경루에 더불어 오른 옛일 생각나네 今日重來君不見 오늘 다시 왔어도 그대 볼 수 없으니 蜀江何處獨魂遊 양자강 어느곳에 홀로 넋이 떠 계시느뇨
重九感懷 陶隱 李崇仁 去年重九龍山前 작년 구월구일 용산 추흥정에서 坐客望若登神仙 앉아계신 모습 바라보니 신선이 오르는 듯 達可放歌徹寥廓 정포은 노래하니 하늘을 뜛고 敬之下筆橫雲煙 김척약재 글을 쓰니 구름이 도는 듯 하네
<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앞면 하단)
萬物은 죽어서 그 根本으로 돌아가나니 人生의 죽음 또한 끝이 아니다......(物歸其根 其生不窮)이 라고 牧隱 李穡은 金先生의 어머니이신 三韓國夫人 驪興閔氏의 墓誌銘에서 써서 傳하여주고 있다.
金先生께서 돌아가신지 600여년이 흐른 오늘에 이 詩碑가 세워지게 됨은 先生의 얼이 이직도 살아 있다는 覆載哲理를 實證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本詩碑 "帆急"은 先生께서 中國西南大理衛로 流配되어 가시는 途中 荊州와 潘家磎驛을 서기 1384년 5월 8일경에 지나면서 船上에서 읊은 詩로 先生의 豊富한 詩想과 浪漫과 浩然豪氣가 넘처흐르는 詩이다. 牧隱 李穡은 小易若齋 金九容 先生의 詩를 評論함에 있어 平淡精深하다 하면서 그의 詩格은 한 時代에 높이 뛰어나 他人이 흉내 낼 바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三峰 鄭道傳은 淸新雅麗하다하였으며 晉山君 河崙 또한 平섬精深하다 하였다.
김선생의 8세손인 義禁府都事公 金大涉은 이곳 金水亭을 오랫동안 保全한 분이시다. 그의 아들인 鐵源府使公 金穫과 큰 사위인 文間公 芝峯 李目卒光,그리고 작은사위인 許蘭雪軒의 친 오빠 贊成事公蛟山 許筠은 모두 당대의 錚錚한 文人으로 이곳 金水亭을 中心으로 頻繁히 交遊한 분들인 바 許筠 또한 그의 惺 詩話에서 金先生의 詩를 平談精深 淸新雅麗함을 再强調하면서 欽慕하였고 東人論詩集에 近世 朝鮮漢詩聖이라 일컫는 紫霞 申緯는
도화관밖의 하늘 끝 바라보니 (桃花關外望天涯) 대별산은 푸르러 봄날은 저물어가네(大別山靑春日斜) 붓놀림 안개와 구름 같은 척약재(下筆雲煙金小易若) 목은으로 하여금 재주 감탄케 했네(能敎老牧嘆才華)
라고 읊으면서 當代(1845년)까지의 金九容先生의 詩는 朝鮮詩壇에서 首座에 있었음은 再言을 不許한다라고 極讚하고 있다.
이제 漢詩는 漢文學 全盛期의 後退 그늘에서 빛을 못보는 處地에 있다고는 하지만 늦게나마 이를 안타까이 여겨 先生의 五百餘首의 遺詩中 이 한 首와 뒷면에 當代 交分이 두터웠던 牧隱 圃隱 陶隱 三隱이 先生은 敬慕하면서 읊어 남기신 세 首의 詩를 새기면서 遁寸 李集先生과의 交遊詩를 浮刻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멀리 中國 揚子江上에서 殉國하신 先生의 외로운 넋을 달래고자 한다.
<文溫公 小易若齋 安東金公 諱 九容 略史> (뒷면 하단)
文溫公께서는 서기 1338년에서 1384까지의 高麗末葉의 政治家요, 敎育者요, 性理學者이시다. 또한,成均館 直講과 大司成 歷任時에는 많은 後學을 養成하시었으며, 詩에 能하여 東國詩聖, 儒學에 精通하시어 海東孔子라 불리었다. 그러나 公께서는 國運과 더불어 不幸하시었으니 異國땅에서 散華하시기까지 苦難의 一生을 보내시었다. 公의 初名은 齊閔이요, 字는 敬之, 號는 小易若齋, 堂號는 六友堂,諱는 九容, 諡號는 文溫이시다. 崇政大夫 重大匡 中書侍郞平章事 上洛君 安東金公 昴의 長男이며, 아우는 怪僧 辛旽을 없애려다 逆殺된 知製敎公 齊顔과 判敦寧府事 安靖公 九德이며, 어머니는 及菴 閔思平의 無男獨女 三韓國夫人 驪興閔氏이시다. 公은 16세의 擧子科 新進士試에 壯元及第하시고 18세에 禮部試大科에 登第하시어 1363년(26세) 司諫院 正言, 獻納, 1368년(31세)典校寺副令, 1371년(34세) 民部議郞兼 成均館 直講을 하시고, 1372년(35세)에 江陵道 安廉使로 나가시어 善政을 베푸시었다. 1375년(40세) 三司左尹으로 옮겼을 때 鄭道傳, 李崇仁, 權近 等과 더불어 北元에서 온 使臣의 迎接을 反對上訴하다 竹州로 流配되었으며, 다시 驪興으로 옮기시니 江山雪月風花를 벗삼아 많은 詩文을 남기시었다. 7년만에 左司議大夫로 再召되어 禑王을 諫하였으나 虛事였고, 1382년(45세) 成均館 大司成에 이어 判典交寺事로서 經籍과 祝召등을 잠시 다루었는데, 때마침 高麗와 明나라의 國交가 圓滿치 못하여 行禮使로 나가셨으나 途中 遼東에서 貢馬遲援을 事由로 逮捕되어 南京으로 押送되고 明皇帝 朱元章의 命으로 中國 西南쪽 大理衛로 流配되었는데 重京 南쪽 蘆洲 永寧縣 江門站에 이르러 1384년 享年 47세의 殉國하시었다. 著書로는 周官六翼, 選粹集, 척若齋集, 及菴集이 있으며, 公의 仲子 成川都護部使 公 明理의 編著인 若齋詩 500餘首가 收錄된 若齋學吟集이 있는바 그 初刊本은 寶物 제 1004호로 指定되어있으며, 中刊本은 奎章閣, 國立中央圖書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및 各 有名 大學校 圖書館에 備置되어 있으며, 及菴集 初刊本은 寶物 제 708호로 指定, 保管되어있다.
서기 1994년 6월 6일 金在承 謹撰 金在洪 謹書 安東金氏文溫公派大宗會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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