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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재>
문소(聞韶) 고을의 북쪽 자하산(紫霞山) 남록 기수(沂水)의 북안에 날개가 뻗친 듯한 당우(堂宇)가 있으니 가로되 후송재(後松齋)인데 옛날의 후송재선생(後松齋先生) 김공(金公)을 우러러 추모하던 곳이다.
삼가 살피건데 공(公)은 자성(姿性)이 도(道)에 가깝고 기절(氣節)은 월등하게 뛰어났으며 송은옹(松隱翁)의 시례지훈(詩禮之訓)을 이어받고 또한 백중형(伯仲兄)인 만취직장공(晩翠直長公)과 더불어 훈창(塤唱) 지화(拳和) 형제상화(兄弟相和)하며 경서(經書)의 연구(硏究)와 문장(文章)은 이로부터 대(代)를 이어 향국(鄕國)에 울연(蔚然)하니 오히려 한결같이 순수(純粹)하여 내면을 다스리는 공부(工夫)에 부지런히 힘썼기 때문이리라.
항상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강석(講席)에 나아가지 못하였음을 한(恨)스러워 하고 서원(書院)의 상덕사(尙德祠)에 알묘(謁廟)한 후 시(詩)로써 높이 추모하였으며 또한 선생의 글 가운데 예(禮)에 대한 여러가지 논설(論說)의 자료를 분류(分類)하고 편집해서 이책(二冊)을 모으니 곧 계문예설(溪門禮說)이며 대학(大學)의 도(圖)와 가계(家誡)의 팔조(八條)를 지으시니 모두가 실제로 학문(學問)을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때인즉 세대가 멀지 않아 선생(先生)의 남은 은택(恩澤)이 끊어지지 않았고 교유(交遊) 또한 친(親)히 배우거나 사숙(私淑)한 현사(賢士)가 아님이 없었으니 그 학문의 길이 바르고 공부(工夫)가 깊었음은 이로 미루어 가히 알지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서는 팔도(八道)가 놀라서 움직이고 임금이 피란길에 오를 때 중씨(仲氏) 직장공(直長公)과 더불어 소매를 떨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망우당 곽공(忘憂堂 郭公)을 따라 화왕산(火旺山)에 들어가서 피를 머금고 와신(臥薪)을 불태우며 가로되 적(敵)은 섬멸하지 못하고 섶은 이와 같이 있음을 한탄하면서 드디어 한 수 읊으니 E피를 머금고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와신(臥薪)을 불태워도 초지(焦志)는 재가 되지 않으리. F 이 시(詩)로써 병사의 용감한 생각을 분발 고무시켰으며 군무(軍務)의 획찬(劃贊)에 도움을 주어 마침내 산하(山河) 보장(保障)의 공(功)을 이루었다.
란(亂)이 평정된 뒤에 미세(微細)한 공과 수고로움이 훈록(勳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공(公)은 응연(凝然)히 수분(守分)하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창의사(倡義事)에 의병(義兵)이 귀(貴)하다고 한 바는 소욕(所慾)이 없고 나라 위하는 의(義)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진실로 작은 공적도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을 편하게 갖지 않음이 어찌 부끄럽지 아니할까. 이로써 공(功)을 사양(辭讓)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숨어서 정양(靜養)하고 후진을 가르쳐서 성취함을 낙(樂)으로 삼아 감암(嵌巖)에서 여생을 마쳤으나 후회(後悔)하지 않았고 염퇴(恬退)한 지조와 겸공(謙恭)하는 덕망이 또한 고사(高士)와 같았다.
집가에 송은옹(松隱翁)이 손수 심은 만년송(萬年松)이 있는데 그 옆에 두어간 집을 짓고 후송(後松)이라 편액(扁額)하니 이것은 선조(先祖)를 사모하는 정신(精神)과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지송백지후조(知松栢之後凋)의 뜻을 취(取)함이니라.
이제 대(代)를 지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병 신(丙申, 1896년 義兵), 경인(庚寅, 1950년 6·25)의 두 번의 병화(兵火)로 당실(堂室)의 자리가 텅비어 있었고 또한 흥폐(興廢)가 거듭되었으나 옛날의 규모(規模)와 같지 못하여 임시(臨時)로 수보(修補)하였으나 마침내 소략(疎略)함을 면(免)하지 못한지라 이에 후손(後孫) 여러분이 뜻을 모아 회복(回復)을 도모하여 옛집보다 조금 낮게 종택(宗宅) 동쪽에 중건(重建)하니 무릇 사간(四間) 겹집으로 중간은 마루요 양옆은 방이며 옛날의 재명(齋名)을 그대로 살렸다. 정원(庭園)과 화석(花石)이 의구(依舊)하니 이는 옛 어른들이 끼친 향훈(香薰)이며 문창(門窓)과 난간(欄干)은 구형(舊型)을 살렸으니 석일(昔日)의 양상(樣狀)이 완연(宛然)하다. 이에 사모(思慕)하고 추앙(追仰)함이 어찌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당연한 바 아니리요, 공정(工程)이 끝날 무렵 주손(胄孫) 도수보(道秀甫)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하니 돌아보건데 후생(後生)의 작은 식견(識見)으로 어찌 책임을 감당하리요? 여러번 사양해도 거두지 못하고 감(敢)히 참망(僭忘)스럽게 중건(重建)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심중(心中)의 느낀 바를 부쳐서 우모 경앙(寓慕 景仰)의 정성으로 이와 같이 이른다.
세계유(歲癸酉) 1993년 수요절(秀半節) 4월 진성(眞城) 이원윤(李源胤) 근기(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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