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평의공파(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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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26. 석사학위 논문 소개

           

   <동성집단의 정체성 확립과정에서 동제의 역할>

              필자 : 김수미(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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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이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사회집단은 자신의 성원들에게 긍정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긍정적인 가치 특성을 확립할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사회정체성은 “개인이 집단성원으로서의 자신에게 기차와 감정적 중요성을 부여하며 자기가 어떤 사회집단에 소속되어 잇는 느낌” 이라고 정의한다. 만약, 기존의 사회제도 혹은 사회집단이 지속적이고 안정된 정체성을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의 불안이 초래된다.

국가나 지역사회 등의 다른 사회집단과 마찬가지로 동성집단 또한 구성원들에게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성을 지닌다. 동성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동성집단은 주로 현조를 중심으로 한 문중과 종가, 경제적 기반, 학맥과 연혼을 통한 다른 문중과의 연대와 지역적 위상 등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사촌마을 안동 김씨 동성집단도 입향조 때부터 안동지역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안동 권씨·풍산 류씨·영양 남씨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만취당선생 형제가 퇴계를 사사함으로써 다른 동성집단과 연대를 하게 된다. 다른 동성집단과 혼인과 학맥을 통해 연대하고 있는 모습은 병 신의병과 3·1운동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동성집단이 문중을 형성하기 시작할 무렵인 16세기 이후부터 족보·문집·묘비·사묘·서원·누정 등의 사업에 힘을 쏟았다. 안동김씨 대동보 제작은 1580년에 처음 이루어진 뒤 현재까지 7차례에 이르며, 사촌마을 내에 산재하는 亭?만을 헤아려도 10개 정도이다. 정사는 유교이념을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건축물로서 동성집단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고 집단 외부에 대해 위세를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즉, 이러한 문중사업과 각 문중이 배출한 현조에 대한 조상숭배 의례를 통해 동성집단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그러나 동성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 뿐만이 아니며, 각 동성집단과 동성마을의 형성·발달과정에서 독자적인 요소가 생성될 수 있다. 사촌마을의 안동 김씨 동성집단에게 동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사촌마을에서 18세기 川沙선생으로 대표되는 사족들이 성황당을 이건한 사실은 그 후손인 안동 김씨 동성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동성집단의 구성원들과 마을 주민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성리학자인 川沙선생이 현몽에 의해 성황당을 이건했다고 주민들이 믿는 것은 동제가 마을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촌마을의 성황당을 이건한 것은 이를 주도한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정체성의 형성요소인 성황당은 후대에 동성집단이 그들의 현조인 川沙선생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동성집단의 의례적 상징물로 기능한다. 이는 마을 내 동성집단의 지배력, 즉 해게모니 작용과 관련이 있다.

정체성은 사회변동의 시기에 주요문제로 부각된다. 그러므로 마을의 위기 상황에서 동제에 관심을 가지고 성황당을 중수하는 등의 사건은 구성원들의 정체성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카하시 교장은 성황당이 동성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성황당 중수 발의를 하여 동성집단의 우호적인 태도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다카하시 교장이 그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마음에서 성황당을 중수하자고 이야기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시대적 상황은 다카하시 교장의 성황당 중수발의는 당시 미신타파의 외침 속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동제를 미신이 아닌 전통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제가 마을 지배에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성황당 중수는 주재집단 혹은 동성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제의 전승위기는 1970년대와 1990년대 후반에 주재집단의 축소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성집단은 마을과 동제, 성황당의 중수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재인식하고 바로잡음으로써 동제의 정통성과 마을 주민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성집단이 다른 마을과 집단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고 다른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기 꺼려하자 동성집단은 배제와 수용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이는 동성집단의 결속을 강화하여 동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동제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동제는 현재까지도 동성집단에게 종교적으로 유효한 기능을 한다. 이는 금기를 어겼을 때 동티가 났다는 이야기와 마을 주민들이 까닭없이 삼아했을 때 동신을 위무하기 위해 굿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동제에 대한 종교적인 신념은 동성집단 내 여성들에게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동성집단은 동제를 통해 마을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다. 문중의 위선사업을 통해서 계속 동성집단 내의 결속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위상을 강화해 오고 있다. 그러나 동제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동성집단의 결속과 정체성을 강화하고 마을 내 권력을 유지하기에 적당하다. 그들이 현조로 생각하는 川沙선생이 성황당을 이건하여 동제를 지냈다는 사실로 인해 성황당은 동성집단의 의례적 상징물이 되었고, 동제는 조상숭모적인 측면을 지니게 된다. 동성집단에게 동제는 조상 대대로 행해오던 전통이 되어버려 문중의례적인 측면이 일정 정도 내재해 있다. 1990년대 들어와서 생활에 여유가 생긴 사람 - 특히 중·장년층 남자 - 들은 조상 찾기와 ‘예절’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성마을은 특별한 시기가 아니라도 항상 조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문중사업을 함으로써 위상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고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도시인들보다는 강한 정체성을 가지지만, 예전보다는 정체성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동성마을의 구성원들은 전통 찾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제는 그에 부합되므로 이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마을 지배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촌마을의 동성집단과 그들의 현조가 대외적으로 조명받는 것과 시대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사촌마을의 동성집단은 지역 내 유림이나 문중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동성마을에 비해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계명대 한문학연구회는 연구자료총서 발간사업의 일환으로 1990년 퇴계선생문집, 1991년 퇴계학문헌전집에 이어 1992년 川沙선생문집을 발간했고 2001년 5월에는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 ‘晩翠? 金士元·川沙 金宗德 과 義城지역의 퇴계학맥’이라는 소주제를 다루었다. 2002년 4월에는 동방한문학회에서 ‘川沙 金宗德의 文學과 思想’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했다. 그리고 경북 북부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에서 ‘사촌 선비마을’ 로 지정되었다. 특히 ‘사촌 선비마을’ 로 지정된 사실은 동성마을로서 대외적으로 주목받은 것으로 동성집단의 위상과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동성집단은 2003년 봄 도평의공파 門會에서 派潽를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현재 준비중인데, 이 또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동성집단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러한 시기에 동성집단 구성원들이 현조로서 존경해왔던 川沙선생과 밀접하다고 생각하는 동제는 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황당을 보수하고 일제강점기 역사를 재인식하여 바로잡아 동제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있다. 그리고 동제 주재집단에서 탈퇴하려 하지는 않지만 제의를 맡아 지내는 것은 꺼려하는 다른 마을을 동제 주재집단에서 배제함으로써 동성집단의 결속과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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