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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8) <글-상석, 사진-발용> 참석자(존칭생략)-진정임 문화유산 해설사, 영환, 윤만, 우회 내외분, 발용, 태영, 항용, 영식, 상석 가족.
아침 일찍 서둘러 아리수(阿利水)를 끼고 통진 쪽으로 난 길을 재촉한다. 왼편의 구교를 바라보며 4차선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강화대교를 건너간다. 해협건너 저편에는 고려조 풍전등화의 강도(江都)시기 역사를 애써 숨기려는지 자욱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한산한 저잣거리를 지나 고려궁지(高麗宮址)로 가는 길에 선원(仙源) 김상용(尙容)을 만났다. 선원은 김번의 증손이며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당시 왕족들과 함께 강화에 있다가 청병이 달려오자 남문루(南門樓)에서 분신자살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자 장작더미에 화약을 던져놓고 자결을 한다. 임금의 삼전도치욕에 앞서 먼저 죽은 이를 위해 훗날 [선원 김상용 순절비]를 세웠다.
▲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우측의 신비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좌측의 구비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증손인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비각을 옮기던 중 발견되었다. 용흥궁(龍興宮)은 [순절비]아래골목으로 접어드니 초입에 있었다.
이 궁은 철종(哲宗-1831∼1863,사도세자의 증손)의 등극 전 잠저(潛邸)라 하나 실제는 1853년(철종4)에 이르러 강화유수 정세기가 지은 것이다. 그는 (후)안동김씨-일명 장동김씨들과 세도가들에 의해 휘둘린 허울뿐인 왕으로 민간에서조차 강화도령이나 원범으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입궁 후 여덟 명의 정비와 후궁에게서 열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일찍 죽고 하나 남은 딸마저 개화파 박영효에게 시집을 갔으나 석 달 만에 죽었다.
제위 후반에는 강화의 산림에 두고 온 양순이가 죽었다. 이때부터 원범이는 꺼져가는 조선을 붙잡지 못하고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서른셋이라는 짧은 나이로 일생을 마감한다. 궁 안에는 원범이의 숨소리도 양순이의 흐느낌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간절한 사랑과 영혼을 위로라도 하려는지 굳게 잠긴 자물통이 문마다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골목을 나와 주차장 위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구릉에 의지한 [성공회 강화성당]이 보인다. 본관의 현판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 쓰여 있었고 기둥마다 토속신앙과 불교를 접목한 주련이 있어 당시 친근한 포교를 위해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명동성당에 이어 1900년 강화에서 최초로 지어진 성당으로 백두산의 적송으로 기둥을 세웠다고 전해온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에는 태극문양을 본뜬 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내 접하는 십자가를 시문하였다
▲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트롤로프(趙瑪可, M. N. Trollope) 주교가 설계, 감독하여 건축한 건물로 .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사제관으로 구성된 한옥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1칸의 장방형 2층 팔작집이며, 지붕 위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올린 것이 특색이다. 건물 정면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산자락의 오붓한 곳에 고려궁지(高麗宮址)가 있었다.
▲ 왕궁의 정 남문 이었다. 즉 지금의 선원비각 주위에 있었다 하며 왕이 거동할 때에 전용 하였고 환궁할 때에는 조정대신 이하가 문 밖에서 하마(下馬)하여 영입하도록 되었다. 이 문루는 삼문으로 되었으니 가장 광대하였고 오직 임금만이 출입하며 외국사신도 옆문으로 통용케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하세한 후 다음해 태자(太子) 전이 몽고로부터 환도함에 있어 승려(僧侶) 대강화상(大康和尙)과 함께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오게 하셨다고 전례에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궁은 최충헌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장악한 최우(崔瑀,1243년 崔怡로 고침)가 강화천도를 감행한 1232년(고종19)부터 짓기 시작하여 1234년 완성한 궁으로 최우는 같은 해 진양후(晋陽侯)로 봉해지고 이후 강도에서 삼별초를 움직이며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다. 무신정권은 1270년 몽골과의 화의로 조정이 강도를 떠날 때까지 38년간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 왕실을 유린하다가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며 떠났다. 조선조에는 강화유수부로 구실을 하며 정묘호란(1627년,인조5) 때 왕실이 피난을 나왔고 그 뒤 1631년(인조9)에 다시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1636년,인조14) 때 청병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에 모두 다 불타 없어지는 비운의 행궁이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유수부(留守府) 동헌 뜰 앞에 섰다.
우리 안김에서는 여말에 밀직사사공의 아드님이신 유수공(휘天儉) 이후로 조선조에는 낙서공(휘自點), 충익공(휘時讓) 선조님과 아드님이신 사휴제공(휘 徽), 유수공(휘善弼)께서 이곳을 임지로 강화유수(江華留守)를 지내셨다. 최근에는 [외규장각]을 다시 세웠는데 외규장각은 1782년 2월에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조선왕조실록]에 이어 지난 2001년에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1377년,우왕3]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자리이기도 하다.
*현존하는-기록상으로는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다. 이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의종(毅宗) 때 최윤의(崔允儀)가 왕명을 받아 고금(古今)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것을 1234년(고종 21)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할지언정 우리의 인쇄술만큼은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직지(直指)는 독일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으로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다.
-홍릉(洪陵)은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으로 국화리 청소년 수련원 뒤 고려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데 고종은 강종(康宗)의 아들로 어머니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원덕태후이고 비는 안혜태후이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다음 해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팔만대장경을 조판(造板)하였고 1259년엔 몽골과의 강화를 위해 태자 전(뒤에 원종)을 몽골에 보낸 후 개경(송도)으로 환도를 못하고 죽어 여기에 묻힌 것이다. 갑자기 송림을 뚫고 여우비가 흩어지며 봉분을 두드려댔다. 조선조에 와서 비로소 초라한 묘표를 세웠다. 팔만대장경(81,258경판)은 처음에 강화성 서문 밖 판당에 두었다가 선원사(禪源寺)로 옮기고 다시 1398년(태조7)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는데 지금의 해인사로 옮긴 것은 정종 원년인 1399년의 일이었다.
불교로 흥하고 불교에 의해 망한 나라 고려, 그리고 숭유억불의 기치아래 세운 조선은 왜? 고려에서 만든 대장경을 모시고 고종의 묘표까지 세워주었을까? 역사는 무얼 말하려 하는가! 1232년 6월(음), 고종이 강화로 올 때 열흘간 장마비가 내렸다고 전하는데 조선은 아마도 그때 핍박을 받으며 죽어간 백성들과 고려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고려가 받지 못한 신통한 부처의 가피라도 염두 해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초에 뭉개버린 고려의 대장경을 가장 안전한 가야산의 바다에 도장을 찍는다는 곳(海印寺)에 옮기고 세종은 한글을 만들어 스스로 달에 도장을 찍으며(月印千江之曲) 부처를 노래하였다던가. 현재 이 팔만대장경과 경판고(庫)는 1995년 석굴암,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조선과 지키려 애쓴 숭고한 이들의 역할이 컸음이다. 이내 여우비는 그치고 언저리가 밝아오더니 바람이 숲길을 흔들어 자리를 털고 산행길에 나섰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자 해발 436m의 고려산 정상이다.
시야가 흐려 개성의 송악산은 볼 수 없었지만 허물어져가는 고려조정의 국운을 진짜로 달래주기라도 하는지 아직도 봄마다 진달래 군락지가 연분홍 빛으로 타오른다고 하였던가 ------
▲ 고려산은 인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송해면 등 4개 읍·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436m로 강화 최고의 낙조 포인트로도 꼽힌다. 특히 한강, 임진강, 예성강, 송악산, 영종 대교, 63빌딩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사통팔달 전망좋은 곳이다.
고려산은 비록 큰산은 아니지만 진달래 군락만큼은 수준급이다. 4월중순, 20여 만평 산능선과 비탈에 연분홍 물감을 풀어 놓기라도 한듯 천지가 꽃바다를 이룬다. 봄철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있어 장관을 이루는 산이며 또한 낙조봉과 그 서릉상의 진달래빛은 상봉일대의 그것에 못지않다. 낙조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고려산을 통털어 최고이다. 고려산 꽃등산의 백미는 고려산 정상에서 능선 북사면을 따라 펼쳐진 진달래 군락지. 특히 낙조봉까지 4킬로미터 능선 20여만평을 진달래 꽃밭이 수놓는다. 해거름에 낙조봉에 서면 석모도 앞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넘이를 볼 수 있는데 강화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고려산(高麗山)은 고리산이라고도 불려지며, 마식령산맥의 정맥이 강화 해협을 잠룡하였다가 융기하여 혈을 이룬 산이다. 동으로 뻗은 산줄기는 용장현을 거쳐 송악산을 이루고, 원줄기의 일맥은 자문고개와 학미산이 되고 옥포에 이르러 입수한다. 고려산은 고려시대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천도한 후 고려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산이라는 이름은 송도의 고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웅대한 제국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무예를 닦았다는 치마대 능선과 정상에 있다는 오정(五井)의 모형을 뒤로하고 하산하여 고인돌 유적지를 둘러본다. -점심식사를 위해 외포리 항구로 이동했다.
포구는 왕실에 반기를 든 배중손 등이 삼별초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었는데 그들을 부여잡고 우는 아낙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웠다. 떠나는 자들 속에서 한 무리가 도망을 나와 투항했는데 붙잡고 물으니 진도로 간다거나 탐라로 간다거나 각기 말이 달랐다. 1270년의 일이었다. 이제 석모도로 가는 포구에는 고려왕실도 없고 조선왕실도 없으며 삼별초도 없고 몽골군도 없으며 청병도 보이지 않고 프랑스군도 없다. 모두 자기가 갈 길을 간 것이다. 그들은 돌아오지도 돌아올 수도 없다.두은리에 소재한 허유전(許有全)의 묘로 가는 길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허유전 묘는 자연석을 이용한 석축으로 여말 재상의 분묘 양식을 그대로 복원한 봉분과 석물로 안양의 문영공(휘恂) 묘역을 성역화 하는데 있어서 기본 모형으로 삼았었다. 본 홈의 게시판 참조-마지막 코스인 이규보 묘를 찾아 빗길을 재촉했다.
이규보 (李奎報 1168∼1241(의종 22∼고종 28)) 고려시대 문신·문장가. 초명은 인저,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백운산인(白雲山人)·지헌(止軒). 본관은 황려(黃驪;驪州). 말년에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불리었다. 1189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곧 관직에 나가지 못하여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백성들의 피폐함 등에 자극받아 《동명왕편(東明王篇)》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를 지었다. 1199년(신종 2) 비로소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였으나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고, 1202년 동경(東京;慶州) 일대에 반란이 일어나자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 종군하였다. 그 뒤 1213년(강종 2) 40여 운(韻)의 시 《공작(孔雀)》을 쓰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다. 우정언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을 거쳐 1217년(고종 4) 우사간에 이르렀다. 1230년 위도(蝟島)에 귀양갔다가 다시 기용되어 1233년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1234년 정당문학을 지내고 태자소부·참지정사 등을 거쳐 1237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경전·사기·선교(禪敎)·잡설 등 여러 학문을 섭렵하였고, 개성이 강한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등이 있고, 가전체(假傳體) 작품 국선생전(麴先生傳)》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
▲ 1967년에 묘역이 정화되고,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백운재가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는 후학들에 의해 그의 위대한 문학적 업적과 풍류정신을 기리는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가 그의 묘소 앞쪽에 세워졌다.
재실과 영정각 사이로 시원스럽고 잘 정비된 묘역을 둘러보고 섬을 나와 다시 아리수를 끼고 서울 도심을 향해 달려간다. 도성에 이르니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어느새 빗줄기는 가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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