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2016년 안사연 하계답사 보고 01

페이지 정보

김윤식 작성일16-08-28 00:20 조회846회 댓글2건

본문

2016년 안사연 하계답사 보고 01
 
■ 일시 : 2016년 8월 20일(토)
■ 장소 :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금수단(金水壇), 영평천 암각문, 추동리ㆍ가양리 선영
■ 참석 : 12명(無順, 경칭 생략)
◇ 별제공문중 : 유만(고문), 계만(회장), 길상(부회장), 광열(감사), 광분
◇ 안사연 : 영환(회장, 문온공파 회장), 태영(부회장, 군사공파 총무이사), 윤만(문), 은회(익), 태우(군), 태철(익), 우식(익), 윤식(문)

 

2016년 8월 20일(토) 안사연 정기행사로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일대 문온공파 종손가 유적인 금수정과 영평천의 암각문, 인근 추동리와 가양리 선영을 답사하였습니다. 올 초부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기상이변으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폭염이 계속돼 이번 행사는 안사연 회원들에게만 공지하여 번개 형식으로 시행하고, 답사지역도 금수정 주위 영평천 암각문을 중심으로 답사지역을 대폭 줄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영환 회장과 태철 씨 승용차로 서울과 수원에서 각각 출발하여 10시경 창수면 오가리의 금수정에 도착했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오가리 일대에서는 도로공사가 이어져 금수정으로 들어가는 길도 왕복 4차선으로 넓어졌습니다. 안사연 답사 소식에 별제공문중 계만 회장과 상만 씨께서 19일(금) 이른 아침부터 금수단(金水壇) 주위를 깨끗하게 벌초를 해 놓았습니다. 금수단에 모신 충렬공 손자 양간공(良簡公) 휘 승택(承澤) 할아버지를 비롯해 상락군(上洛君) 휘 묘(昴) 할아버지와 문온공(文溫公) 휘 구용(九容)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계만 회장과 상만 씨 열성으로 금수단 주위는 일 년 내내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무어라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금수정은 영평 8경 중 으뜸가는 명소로 일반인들도 종종 방문하는 곳이라 파종회에서도 늘 신경 쓰는 곳입니다.

alt
▲ 금수단을 참배하는 답사팀

alt
▲ 왼쪽부터 태철, 우식, 태영, 윤만, 은회, 영환, 태우, 계만

 
잠시 후 광분 씨께서 아로니아 열매로 즙을 낸 시원한 음료를 내오셨습니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에 한여름 더위가 싹 가십니다. 올 때마다 별제공문중 종인들께서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alt
▲ 금수정. 조선시대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시냇가에 지어진 정자 가운데 으뜸으로 쳤다.

alt
▲ 광분 씨께서 내오신 시원한 아로니아 음료 덕분에 더위가 한순간에 가셨다.

 
문온공 종손가의 상징, 금수정(金水亭)
 
동주 이민구 선생은 <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에서 “영평천 강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들어 고요한 소[潭]를 이루는데 그 위에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사뿐히 내려앉은 정자가 바로 금수정(金水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금수정이 있는 종택 인근은 쇠머리처럼 생긴 길지(吉地)라고 합니다. 이곳은 보장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이 종택을 지나 영평천에 이르러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이루는데,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선생은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에서 이곳 풍광을 “절벽이 푸른 강물에 내리꽂힌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금수정으로 자리를 옮겨 영환 회장이 종택과 금수정을 비롯해 인근 영평천 암각문 등을 설명합니다. 금수정에 관한 내력은 금수정 바로 옆 안동김씨세천비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alt
▲ 영환 회장이 금수정과 종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조금 전 광분 씨께서 아로니아 음료를 대접하면서 종손가에 전해지는 금수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지금까지는 금수정이 6·25동란으로 인해 불탔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아군이 철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봉래 양사언 선생이 쓴 금수정 현판을 종택에 보관했는데, 귀퉁이가 깨지긴 했어도 글자는 온전했다고 합니다. 그 뒤 포천시에서 금수정을 복원하면서 봉래 선생 후손이 그 현판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금수정 아래 절벽에 봉래 선생 필적으로 전해지는 금수정 암각문이 있습니다. 지금 정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바로 이 암각문을 탁본해서 보필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실제로는 그 암각문 탁본을 보고 임서(臨書)한 것이라고 합니다.

alt
▲ 금수정 현판

 
금수정 바로 옆 척약재 김구용 선생 시비(詩碑)로 자리를 옮깁니다. 문온공은 고려 말에 목은 이색 선생을 비롯한 당대 석학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등 유학 진흥의 선구자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학자이자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분이기도 합니다. 시비(詩碑) 앞면에는 문온공의 대표작 <범급(帆急)>을, 뒷면에는 평소 문온공과 막역한 관계였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등 세 분 선생의 시를 새겼습니다.
문온공 시비 바로 곁에는 영평천을 향해 봉래 양사언 선생 시비가 서 있습니다. 봉래 선생은 널리 알려진 분이라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봉래 선생은 금수정 주인 금옹(琴翁) 휘 윤복(胤福) 할아버지의 사위입니다. 봉래시집(蓬萊詩集)에 <금옹에게 드리다(贈琴翁)>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세주(細註)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 글귀에 “금옹은 금수정 주인이다. 이 시를 준암에 새겼다.(琴翁。錦水亭主人也。刻此詩於尊岩。)”라고 하였습니다. 금옹 할아버지는 휘 예생(禮生) 할아버지의 서자(庶子)입니다. 휘 예생 할아버지는 예안현감으로 재임할 당시 충렬공 묘소에 묘갈을 세운 분입니다. 금옹 할아버지는 아드님이 없이 따님만 한 분 두었는데, 그분이 봉래 선생에게 시집을 가셨습니다. 이 때문에 금수정이 봉래 선생에게 전해진 듯합니다. 그 후 봉래 선생 사후에 철원부사공 휘 확(穫) 할아버지께서 사들여서 오늘날까지 종손가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봉래 선생이 직접 자신의 시에 금수정 주인이 금옹이라 적었건만 금옹이 어느 분인지 찾아보지 않고, 견강부회하는 글들이 넘치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alt
▲ 척약재 김구용 선생 시비(詩碑)에 대해 설명하는 영환 회장

alt
▲ 윤만 씨가 시비(詩碑) 하단의 설명문을 낭독하고 있다.

alt
▲ 설명문 낭독을 경청하는 답사팀

alt
▲ 시비(詩碑) 하단의 설명문

alt
▲ 문온공의 대표작 중 하나인 <범급(帆急)>

alt
▲ 뒷면의 문온공 약사(略史)

alt
▲ 봉래 양사언 선생 시비(詩碑)

 
이제 금옹 할아버지 유적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안동김씨세천비 옆 편편한 바위에 글자를 새겼는데, 오랜 풍화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태철 씨와 은회 씨가 식수로 떠 온 물을 부어서 씻어내자 ‘금대(琴臺)’라고 적은 글자 윤곽이 어렴풋이 살아납니다. 이 글자도 ‘琴臺’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금방 알아본 것이지 처음 보는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합니다. 얼핏 보면 ‘東臺’로 볼 수도 있습니다. 동주 선생의 <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에 ‘동대(東臺)’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혹시 이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금옹 할아버지께서 거문고에 뛰어나셨는데, 이곳 금대에서 거문고를 즐겨 타셨다고 합니다.
alt
▲ 안동김씨세천비(安東金氏世阡碑)

alt
▲ 정자에서 금대로 올라가는 돌계단

alt
▲ 금대(琴臺)를 살펴보는 답사팀

alt
▲ 금대(琴臺). 붉은 기운이 도는 부분이 글자 획이다. 얼핏 보면 ‘東臺’로도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琴臺’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38선 이북지역입니다. 금수정에서 건너다보이는 작은 산이 할미산인데, 38선이 바로 그 산 정상을 통과합니다. 금대를 살펴보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풀숲을 헤치고 ‘동천석문(洞天石門)’과 ‘회란석(廻瀾石)’을 새긴 바위로 향합니다. ‘동천석문(洞天石門)’은 ‘동천(洞天)’으로 들어가는 ‘돌문[石門]’이라는 뜻으로 석봉 한호 선생의 필적입니다. ‘동천(洞天)’은 도가(道家)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뜻하며, 인간세상에 모두 36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곳 금수정 풍광이 절경이라는 뜻이겠죠. 본래 이곳은 ‘동천석문(洞天石門)’이 적힌 바위 쪽으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제법 길이 뚜렷했는데, 근래에 영평천이 범람하자 둑을 높게 쌓으면서 길이 사라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이제는 오솔길조차 남아 있지 않네요. 그때쯤 ‘洞天石門’도 흙에 묻혀 ‘洞天石’ 석 자만 보였는데, 얼마 전에 또 ‘石’자마저 묻혀서 ‘洞天’ 두 자만 남은 것을 계만 회장님과 성만 씨께서 무릎 깊이만큼 흙을 파내 ‘石’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더운 날 두 분께서 고생이 크셨습니다. 답사팀이 도착해 두 분이 고생 끝에 파낸 ‘洞天石門’을 감상하다가 은회 씨가 맨 끝에 ‘門’자가 보인다며 얼른 손으로 더듬어 봅니다.
바위 중간에 작은 나무가 뿌리를 내려 줄기를 꽤 크게 뻗었습니다. 이 바위 반대편에는 중국 사신 허국(許國)의 ‘회란석(廻瀾石)’을 본떠서 새긴 글자가 있습니다. 이쪽에서 보는 것과 반대편에서 보는 바위 생김새가 퍽 달라 마치 다른 바위에 새겨진 듯 착각하기 쉽습니다. ‘회란석(廻瀾石)’은 첫 글자 ‘회(廻)’가 떨어져 나가 지금은 ‘란석(瀾石)’ 두 자만 남았습니다. 떨어져 나간 바위조각을 찾으려고 몇 차례 살펴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는데, 올 가을 추수 뒤에 다시 찾아볼 예정이라고 합니다.

alt
▲ 금수정 주위를 빙 둘러 수로(水路)를 내면서 양수시설(揚水施設)을 설치했는데, 이제는 방치되고 있다.

alt
▲ 동천석문(洞天石門). 한석봉 선생 필적이다.

alt
▲ 은회 씨가 맨 끝 ‘門’자를 파내고 있다.

alt
▲ 동천석문(洞天石門)이 새겨진 바위 반대편에 ‘회란석(廻瀾石)’이 새겨져 있다.

alt
▲ 태철 씨가 뒤엉킨 잡풀을 걷어내고 있다.

alt
▲ 회란석(廻瀾石).
회(廻)자는 바위가 깨지면서 떨어져 나갔다.

<2편으로 계속>

 
 


댓글목록

김규철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규철
작성일

지난 5월에 문온공, 상계2대조 할아버님묘소에 참배드리고 금수정과 주변의 사적과
특히 우리안김의 서랑인 봉래 양사헌의 시비등을 꼼꼼이들러보고 온바 있는데 급번
안사연의 하계 답사기를 보고 더 자세한 내용을 공부하게 됬습니다,
방손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학공22세손  규철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답사기의 바이블입니다.
2편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