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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애 김몽린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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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1-19 16:22 조회76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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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애공(洛崖公)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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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병자호란(丙子胡亂)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을 때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가 서로 대립하였다. 화의(和義)를 주장한 사람은 대부분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중신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의(義)를 굳게 지키고 힘써 싸운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임금과 신하의 큰 절개를 밝히고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분별을 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오랑캐의 말발굽이 온 나라를 짓밟고, 성(城)들이 잇달아 함락되자 화친(和親)하자는 논의가 기세를 떨치고 국론이 분열되었으니 누군들 애써 싸워도 공이 없음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눈물을 삼키고 통곡하며 부자(父子) 군신(君臣)들과 더불어 성곽을 등지고 싸우려 했던 것은 임금과 신하의 큰 절개는 뒤바꿀 수 없고,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분별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의리를 알고 있었고 쌍령(雙嶺)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하여, 평소에 쌓아 둔 학문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이러한 절의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낙애(洛崖) 김몽린(金夢麟 1584-1637)역시 이러한 분들 중에 하나이셨다. 공(公)은 안동(安東)사람으로 휘(諱)는 몽린(夢麟)이며, 자(字)는 성서(聖瑞)이고 낙애(洛崖)는 호(號)이다. 공의 조상들은 고려조부터 크게 이름을 떨쳐 먼 조상이신 충렬공(忠烈公) 휘 방경(方慶)께서는 고려의 충렬왕(忠烈王)을 섬기셨으며 국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공훈이 있었다. 이분의 후손으로 문영공(文英公) 휘 순(恂),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휘 영후(永煦), 영삼사사(領三司事) 휘 천(蕆)이 계셨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휘 사형(士衡)께서 개국(開國)의 큰 공을 세워 관직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익원(翼元)이다. 이분이 공에게 9대조가 되신다. 고조부인 휘 건(湕)께서는 판관(判官)을 지내셨고, 증조부 휘 언준(彦濬)께서는 부사(副司)를 지내셨다. 조부이신 휘 열(悅)께서는 정략장군(定略將軍)을 지내셨으며, 선친 휘 흥려(興礪)께서는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지내셨다.

선비(先妣)선산(善山)박씨(朴氏)께서는 문과(文科)정랑(正郎)박춘원(朴春元)의 손자이신 처사(處事)부(孚)의 따님으로 아름답고 정숙하여 여자다운 행실(行實)을 갖추셨다. 만력(萬曆)년간(年間)갑신년(甲申年;1584년)에 소산리(素山里) 저택에서 공을 낳으셨다.

공께서는 용모와 威儀가 빼어나시고 器量이 탁월하여 어린 시절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놀이를 하실 때부터 이미 큰 듯을 품고 계셨다.

8세가 되어 학문을 시작하셨는데, 글을 읽다가 순(舜)이금이 효성과 우애를 다하셨다는 구절에 이르자 “순임금이 누구이신가? 후세 사람들도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또 백이(伯夷)숙제(叔齊)가 굶어 죽었다는 구절에 이르자, “죽음을 통해 올바른 도를 이루었구나”라고 탄식하셨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의 부친 부위(副尉)공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공의 나이가 십사세이셨다. 공께서 피눈물을 흘리고, 죽만 마시며 애례(哀禮)를 다하자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김씨 집안의 효자”하고 칭찬하였다.

공께서 글을 읽는 여가에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을 겸해서 익히셨다.

천계(天啓)신유년(辛酉年1621년)에 아우 몽웅(夢熊)과 나란히 武科에 합격하셨다.

급제한지 16년이 되던 해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지부사(知富使) 신준(申埈)과 토포사(討捕使)선약해(宣若海)가 군사를 이끌고 임금을 호위하면서 공을 전대(前隊)로 추천하였으나 공은 노모가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셨다. 그러자 노모께서는 “나라의 큰 일이 일어났으니 나는 염두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공께서는 마침내 관할 부(府)에 병사들을 불러 모아, 아우 및 부교(府校)권극상, 부사(府史)권용휴와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는 데 호령은 엄격하고 군용(軍容)은 가지런하고 엄숙하여 도로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출발한지 십일 만에 쌍령(雙嶺)아래에 도착하여 경상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과 충청병사 이의배등과 함께 진을 치고 다음날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공께서는 아우 몽웅을 돌아보시며 “우리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늙으신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너는 군영을 지키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고 말씀하시고, 마침내 칼을 쥐고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가 노모께 절을 올렸다. 당시에 눈이 몹시 내리고 있었다. 노모께서는 놀라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임금께서 적진 속에 계신데 너는 왜 돌아왔느냐?” 공께서 대답하셨다.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고하러 왔습니다. 국사를 위해 죽는 것이 저의 직분이며,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공께서 집을 나서자, 아들 상경(尙敬)이 울면서 공을 따라 나셨다. 공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으셨다. “너희는 집에 남아 내 늙으신 어머니를 잘 모시거라.” 그리고는 곧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병사들을 정비하고 갑옷을 입고 창을 쥐고는, 영서(嶺西)와 영남의 모든 군대에 격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막 출전하려던 차에 뜻밖에 오랑캐 병사들이 쌍령(雙嶺)의 고갯길을 좌우에서 둘러싸고 쳐들어 왔다. 공께서는 오랑캐를 꾸짖으셨다. "벌레만도 못한 오랑캐 놈들아! 너희가 감히 우리 예의지국(禮儀之國)을 범하려 하다니!“ 당시 이조판서 최명길, 진창군 강인 등은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추진하였고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공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격분하며 말씀하셨다. ”우리는 대(大)명(明)나라의 신하로 어찌 감히 오랑캐 조정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철총(鐵銃)을 쥐고 육칠명의 오랑캐를 내려치시고, 또 철궁(鐵弓)으로 수십 명의 오랑캐 군사를 쏘아 죽이셨다. 이로 인해 오랑캐들은 대오가 흐트러져 큰 혼란에 빠졌다. 조금 있다가 매서운 바람이 일어나고 흙먼지가 눈 앞을 가렸다. 이 혼란 속에서 영장(營將) 선약해는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주장(主將)허완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군영(軍營)은 무너지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니 오지 공의 형제만 쏟아지는 화살과 돌 속에서 의연히 서 계셨다. 공께서 서쪽을 향해서 네 번 절을 하시고는 ”아직 오랑캐의 간을 도려내기도 전에, 이몸이 먼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구나{未剪仇肝身殉國]라는 시를 읊으시고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결심하셨다. 그 때 서기(書記) 남묘생, 진시군(進矢軍)송두선이 잠시 후퇴하였다가 훗날을 도모하자고 간청하였으나, 공께서는 정색을 하시고는 말씀하셨다. “이 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 그대들은 나를 나라를 등질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그리고는 “흰 태양[白日]이 머리 위에 떠있고, 붉은 마음([丹心]은 칼 밑을 쫒네..”라는 구절을 읊으셨다. 공께서 몸을 일으켜 세우시고는 용맹히 앞으로 돌진하여 무수히 많은 오랑캐군을 죽이셨다. 오랑캐들은 이러한 공의 모습을 보고 귀신같은 용맹함을 지녔다고 생각하고는 급히 공경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공께서는 십여 군데 상처를 입으셨다. 이 때 공께서는 칼을 붙잡고 슬퍼하시면서, “이 오랑캐를 다 죽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이 벌판에 눕게되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대 명나라의 천자(天子)를 뵈올 것인가.”라고 말씀하시고 아우 몽웅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셨으니, 이때가 정축년(丁丑年1637년) 정월 초 삼일이었다.

아들 상경, 상민, 조카 상길은 이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보았지만 오랑캐가 불을 질러 놓아 쌓여 있는 시체들이 이미 재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에서 함께 죽을 결심을 하였지만 잠시 후에, “할머님께서 생존해 계시니, 우리가 죽는 것은 아버님의 유명(遺命)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여겨 생각을 바꾸고, 이 분들의 의관(衣冠)을 가지고 가 선영(先塋)옆에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던 날,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모여 들고, 구름과 안개가 순식간에 하늘을 뒤 덮었다. 이 날 밤, 무덤 안에서는 쇠북 소리, 전장터의 말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후 수 년동안 공의 무덤에 풀이 말라 죽었고, 또 몇 년이 지나자 묘소 앞에 한 무더기의 대나무가 자라 났는데, 이것는 모두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낙애공께서는 정축년에 사도시(司䆃寺) 주부(主簿)에 추증되셨고 병신년에는 다시 병조(兵曹)참의(參議)에 추증되셨다.

숙부인(淑夫人)께서는 예천(禮泉) 임씨(林氏)로 문정랑文正郞) 승종(承宗)의 따님이셨다. 슬하에는 두 아들을 두셨는데 장남 상경은 전연시(典涓司) 직장(直長)을 지내셧고, 차남 상민은 호조(戶曹)참의(參議)에 추증되시었다. 손자 유항은 종사랑을 지냈으며, 선항은 호조참의에 추증되셨다. 증손 만표는 공조참판을 지내셨다. 이 분들께서는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명성이 자자하셨다.

아아! 낙애공께서는 깨끗하고 강직한 기품과 신령스럽고 굳센 자질로 일찍부터 학문을 떨쳤으니, 어사중승 장순(張巡709-751)의 박학(博學)강기(剛氣)와 같고, 병법에 두루 통하였으니 무목, 악비의 영민함과 뛰어난 책략을 갗춘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여 삼강오륜의 크고 중한 임무를 자임하였으며, 위대한 순 임금의 효도 누구나 다 따라갈 수 있고, 백이 숙제의 충성도 누구나 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여길 정도였으니, 그 평소에 쌓은 학문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강력한 오랑캐가 온 천지를 집어 삼킬 기세로 쳐들어오고, 어리석은 선비들은 투항하자는 주장을 내게워 천지의 강상이 땅에 떨이지고 인륜이 무너져 내려 춘추의 도리를 찾을 수 없게 된 환난속에서도 삶과 죽음을 버리고 취함에 있어 미혹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남아대장부에게는 하나의 죽음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칼을 쥐고 천리를 걸어 집을 찾아가 아들에게 노모를 잘 봉양하라고 당부하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어머님께 고하여 올리니, 충성을 지키면서도 효를 소흘히 하지 않고, 효의 도리를 다하면서 동시에 충성을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영에 돌아와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싸우니, 온 군대가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오랑캐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신념으로 형제가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활과 창으로 적진에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죽이니, 흉폭한 오랑캐라도 우물쭈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당시 조정에 낙애공과 같은 분이 열 분이라도 있어서 충과 의를 다했더라면 더러운 기운을 쓸어내고 치욕을 씻어내 종묘사직에 보답하고 천하만세에 영원토록 떳떳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적을 맞아 싸울 의지가 부족하였고, 주장(主將)은 스스로 목을 베어 장렬히 전사하였으니, 우리의 낙애공 형제만이 더욱 기세가 오른 백만의 오랑캐군을 맞아 싸우다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황량한 벌판에서 목숨을 다하고, 찬 재 속에 뼈를 묻게 되었으며, 끝내 삼전도(三田渡)에서 삼층단을 쌓아 청나라 임금께 항복하고 세세년년 황금과 비단을 오랑캐의 조정에 바치게 되는 꼴을 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의 성취를 돌아보면, 하나의 순절(殉節)한 선비로 그치고 말았으니, 역사를 돌아보는 지사의 감회에 어찌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충성과 공적은 이미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에 수록되고 또 [존주록(尊周錄)] 배신열전(陪臣列傳)]등의 역사서와 학식이 뛰어난 여러 군자(君子)들의 기록에 두루 실리게 되어, 한유(韓愈768-824)가 어사중승 장순(張巡)의 전기를 쓰고, 진준경이 무목, 악비의 행장을 기록한 것과 같아져 그 공이 우주에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후세에 주희(朱熹)가 담주(潭州)에서 했던 것과 같이 지난 날의 사실들을 수집하며 묘당(廟堂)을 세우고, 조정에 편액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해 올릴 사람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때를 기다릴 뿐이다.

지금 낙애공의 후손들이 재삼 간청해 오니 부족한 글솜씨나마 사양 할 수 없어, 유사(遺事)에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삼가 행장(行狀)을 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전(前)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이휘녕(李彙寧)이 삼가 행장(行狀)을 짓다.

 


 


이휘녕[ 李彙寧 ]

조선 후기의 문신. 관직에 있으면서 학문에도 주력하여 이황의 성리학에 전심하여 <십도집설(十圖集說)>을 지었고, 한편 <반경무도사(頒慶舞蹈辭)>라는 가사를 지었다.

1788년 ~ 1861년 자 : 군목(君睦)호 : 고계(古溪) 본관 진성(眞城)

아버지는 승순(承淳)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종가의 지순(志淳)에게 입양되어 이황(李滉)의 10세종손이 되었다. 순조 16년(1816년) 그의 나이 29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순(純), 헌(憲), 철(哲)의 삼조(三朝)를 차례로 섬겼다. 철종 2년(1851년) 동래부사를 거쳐 185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1855년 돈녕부도정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학문에도 주력하여 이황의 성리학에 전심하여 <십도집설(十圖集說)>을 지었고, 한편 <반경무도사(頒慶舞蹈辭)>라는 가사를 지었다. 저서로는 ≪고계집(古溪集)≫ 8권이 있다.

경력사항

1816년 ~ 순조 16년 진사시 합격

1851년 ~ 철종 2년 동래부사 역임

 


[네이버 지식백과] 이휘녕 [李彙寧]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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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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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할아버지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