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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안사연 답사 미리보기-7. 이양중(李養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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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1-26 11:02 조회8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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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양중(李養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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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우참의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색, 정몽주, 길재, 서견, 이방원[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려고 도모 하였다. 이때 이양중은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내부 변란이 생길까 염려한다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태조 혁명 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으로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었다.

 


태종이 석탄을 광주로 찾아와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석탄이 답하기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태종이 또 이르기를, ‘한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아니 했는가?’

석탄이 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이에 태종이 궁중에서 가져온 좋은 음식과 귀한 선물을 내려 주려 하였으나 公은 詩로써 답례 할뿐 한사코 받지 않았다.

 


도성으로 환궁(還宮)한 태종은 거듭 탄식하며 좋은 거문고를 하나 가져 오게 하여 친필로 이렇게 새겨 석탄 이양중에게 하사하니 내용이 이러하다.

“술 석잔에 거문고 한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로다” ‘白酒三盃彈琴一曲 富春千載嚴瀨高節終不能屈’

 


동생 이양몽(李養蒙)도 벼슬이 형조판서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남한산아래 수리골(현 하남시)로 은거하였다가 태종이 형 이양중을 찾아오자 원적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양중은 사후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묘는 수리골에서 광주시 초월면 무갑산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하고 동고(東皐) 김노(金魯)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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