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 - 이민구 <동주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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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7-06-14 19:57 조회972회 댓글1건본문
이 자료의 원문은 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의 『동주집(東州集)』 (이민구李敏求 지음)에서 퍼 왔습니다. 『동주집(東州集)』은 몇 해 전부터 목원대에서 번역 중인데 일부 완료되어 최근에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등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글은 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공부 삼아 풀이하고 주석을 단 것인데, 잘못 처리한 곳이 많습니다. 두루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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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동주집(東州集) > 東州先生文集卷之二 > 序 / 金水亭詩序
金水亭詩序
白鷺洲在洞陰縣1)南十里而遠。其水北流。抱縣治而下。轉長林一牛鳴地2)。稍西迤。水益大。翠屛開張。爲浮雲壁。壁有韓石峯書壺中日月醉裏乾坤八大字。水滙而爲潭。有亭翼然其上。爲金水亭。堪輿家以其上地形如牛頭。又名牛頭亭。其傍曰東臺3)。明沙鋪石。可坐百人以上。碧樹成幄。夏日銷暑。登亭以望。山巒川陸四面朝拱之勢。使人應接不暇。野秀而林芳。木茂而陰濃。風霜厲而淸瘦。氷雪刻而明潔。四時之景。莫不具備。雖善毀者無以措其喙。自亭西十餘武4)。有大石峙於水涯。上陷而爲窪尊5)。受酒可七斗。其傍鐫楊蓬萊詩曰。綠綺琴伯牙心。一鼓復一吟。鍾子是知音。泠泠虛籟起遙岑。江月娟娟江水深。其石下嵌空。群魚所聚。沿溪北下又三里許。爲蒼玉屛。故相朴思庵拜鵑窩6)在焉。蓋蓬萊好爲山澤遊。足跡遍嶺東西。而常流連於是亭。思菴錦城人。捨風詠俛仰之勝不論。而惓惓於斯。竟死而葬焉。必有取爾也。夫名區勝地在吳越遼絶之鄕。人莫不命棹蠟展7)願一往遊焉。今去神京8)三舍9)之外有此絶境。天作地藏。以餉輦轂遊客。豈不異哉。吾舅氏金沙公10)少而專壑。且以先壟不遠。終始爲歌哭之所。自余年十一己亥。始省外王母11)于此。及長而文酒逍遙。無歲而不遊。至癸酉。舅氏亡而余亦老。則亭之上再無余跡矣。蓋蓬萊,思菴。邈爾先輩。文彩風流髣髴影響而已。雖以余眇末後生希蹤於曩轍。而風燭相催。忽焉耄及。人代之感。居然可見。唯其亭宇景物。今古一致。舅氏有孫曰正字奐。嗣守先業。脩治封殖12)。無廢舊觀。乃請余爲文。而繫以詩曰。天豁郊平眺望宜。金沙13)亭子澗之涯。窪尊剔字苔文古。雲壁鳴舷石勢危。丘壑風流如宿昔。山河人代有遷移。臺前逝水14)無情極。不爲光陰駐少時。甲辰仲秋。東州山人李敏求書。
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
백로주(白鷺洲)는 동음현(洞陰縣) 관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다. 그 물길이 북으로 흘러 현(縣)의 관아를 감싸 안아서 아래로 흐르다가 물길을 돌려 길게 뻗쳐 있는 숲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약간 서쪽으로 굽이지는데 수량(水量)이 더욱 많아지고 취병(翠屛)을 펼쳐서 넓게 벌려 놓은 듯하니 부운벽(浮雲壁)이다. 부운벽에는 한석봉이 쓴 ‘호중일월취리건곤(壺中日月醉裏乾坤 : 항아리 속 해와 달이 취중에 하늘과 땅이로다.)’이라는 큰 글자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강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들어 담(潭)을 이루는데, 그 위에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정자가 있으니 금수정(金水亭)이다. 풍수가들이 그 위의 지형(地形)이 쇠머리[牛頭] 같다고 하여 또 다른 이름이 우두정(牛頭亭)이다. 그 옆을 동대(東臺)라 하는데, 모래가 곱고 얇은 돌이 깔려 있어서 1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다. 푸른 나무들이 휘장을 펼친 듯하여 여름에 더위를 가시게 할 만하다. 정자에 올라가 바라보면 산과 봉우리, 시내와 언덕이 전후좌우 사면(四面)에서 두 손을 공손히 맞잡아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형세이니 심부름꾼을 시켜 손님을 맞아들여 접대하느라 겨를이 없다. 들판이 수려하고 수풀이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고 그늘이 짙으며, 바람과 서리가 매서우나 말쑥하며, 얼음과 눈이 혹독하나 맑고 깨끗하여 네 계절의 경치를 고루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없으니, 비록 아무리 헐뜯어도 그 말을 그만 둘 수 없다. 정자에서 서쪽으로 10여 무(武)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물가에 우뚝 솟아 있다. 위쪽이 움푹 파였는데, 와준(窪尊)이다. 술 7말을 채울 수 있다. 그 옆에 새긴 양 봉래의 시는 이러하다.
綠綺琴伯牙心 녹기금(綠綺琴) 타는 백아(伯牙) 마음
一鼓復一吟 한 곡 뜯으면 또 한 수 읊조리니
鍾子始知音 종자기(鍾子期)만 알아듣네
冷冷虛籟起遙岑 맑디맑은 바람소리 아득한 봉우리에서 들려오고
江月娟娟江水深 강물에 비친 달 곱디고운데 강물은 깊기만 하네
그 돌 아래에 깊숙이 뚫려 있는 빈 공간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곳이다.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흘러내려가서 3리쯤 되는 곳이 창옥병(蒼玉屛)이다. 작고한 재상 박사암(思庵 朴淳)의 배견와(拜鵑窩)가 있다. 봉래는 산택(山澤 : 山川, 山林川澤) 유람을 좋아하여 발자취가 영동(嶺東 : 關東)과 영서(嶺西)에 두루 퍼져 있으나, 항상 이 정자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사암(思庵)은 금성인(錦城人 : 전남 나주)으로 음풍영월(吟諷詠月)이나 주위를 올려다보고 굽어보는[俛仰] 경승(景勝)을 떨쳐 버리고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간절히 원하여 마침내 죽어서 장례를 치렀으니 틀림없이 이를 취한 것이다. 무릇 명승지는 오(吳)·월(越)·요(遼)의 절향(絶鄕)에 있는데, 사람들이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나막신을 신고 산으로 올라가 한번 즐겨 보는 것을 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제 한양[神京]에서 불과 3일 거리 바깥에 이 같은 절경이 있는 것은 하늘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을 땅이 감춘 것이다. 서울[輦轂]에서 건량(乾糧 : 양식)을 가지고 놀러 오는 사람들이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내 외숙부 금사공(金沙公)이 젊어서 독차지했는데, 또한 선산이 멀지 않으니 태어나고 죽음 곧 살아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고 죽어서 곡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가 11살 나던 기해년(1599년, 선조 32년)에 처음으로 외할머니를 이곳에서 뵈었으며, 자라서 글을 배우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였으니 즐기지 않은 해가 없었다. 계유년(1633년, 인조 11년)에 이르러 외숙부께서 돌아가시고 나 역시 늙었기에 정자에 다시는 내 자취가 없을 것이다! 봉래와 사암은 내게 까마득한 선배인 데다 문채(文彩)와 풍류는 (그분들에 비해 나는) 그림자와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비록 내가 우매하여 보잘것없으나 후생(後生)으로서 앞선 자취를 즐거이 따르려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서둘렀으나 홀연히 늙고 말았다. 인간 세상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는데, 오로지 정자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만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외숙부에게는 손자인 정자(正字) 김환(金奐)이 있는데, 선대의 가업(家業)을 이어 지킬 만하다. 집과 정자를 수리하고 묘소의 흙을 북돋아 새롭게 단장하여 예전의 경관을 쇠퇴하게 하지 않으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시 한 수를 붙들어 맨다.
天豁郊平眺望宜 하늘은 탁 트이고 들판은 아득하여 바라보기 좋으니
金沙亭子澗之涯 금사공(金沙公) 정자는 맑은 물가 벼랑에 자리했네
窪尊剔字苔文古 와준(窪尊)이라 새긴 글자에 이끼 끼어 예스럽고
雲壁鳴舷石勢危 부운벽(浮雲壁) 앞 뱃전에서 물새 우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아슬아슬하여라
丘壑風流如宿昔 산과 골짜기에 부는 바람과 흐르는 물은 예전 같아
山河人代有遷移 산천은 그대로건만 사람만 바뀌었네
臺前逝水無情極 동대(東臺) 앞 서수(逝水)는 무정하기 한이 없어
不爲光陰駐少時 흘러가는 시간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네
갑진년(1664년, 현종 5년) 중추(仲秋 : 음력 8월)에 동주산인(東州山人) 이민구(李敏求) 지음.
<주석>
註1) 동음현(洞陰縣) : 영평현(永平縣 : 포천시 영중면 일대)의 옛 이름.
註2) 일우명지(一牛鳴地) :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라는 뜻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를 이르는 말.
註3) 동대(東臺) : 금수정 계단 위에 해서체로 새긴 암각문을 가리키는 듯한데, 그 글자는 ‘琴臺’이다. 이곳은 너럭바위가 땅에 묻혀 있는데, 이 글에서 말하듯이 수십 명이 앉을 만한 장소이다. 지금은 이곳에 안동김씨세천비(安東金氏世阡碑)가 서 있다. ‘東臺’는 ‘琴臺’로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두었다.
註4) 무(武) : 반보(半步), 석 자.
註5) 와준(窪尊) : 웅덩이 모양의 술단지.
註6) 배견와(拜鵑窩) : 사암 박순 선생이 만년에 영평현으로 물러나 거처하던 곳의 당호(堂號). 배견와 곁에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文友)들이 모여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사암은 적자(嫡子)가 없이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두었으나 외동딸과 사위에게 의지하여 영평에서 삶을 마쳤다. 박응서는 ‘칠서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註7) 전(展) : ‘극(屐)’의 오자. 목판본 원문 이미지파일에는 ‘극(屐)’으로 적혀 있는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잘못 판독하였다.
◇ 납극(蠟屐) : 밀칠한 나막신. 남조 송(南朝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산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나막신을 신은 데서 온 말.
◇ 사극(謝屐) : 사공극(謝公屐)의 준말로, 등산용 신발을 말한다.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명산을 유람할 적에 산을 오를 때에는 나막신[屐]의 앞굽을 떼어 버리고 산을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어 걷기에 편리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 권67 사영운열전(謝靈運列傳) 참조.
註8) 신경(神京) : 명나라의 서울 또는 조선시대의 한성(漢城)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한성의 미칭(美稱)으로 쓰였다.
註9) 삼사(三舍) : 중국에서 군대의 3일간의 행정(行程)을 이르던 말. 총 90리로 360km 정도 된다. 1사는 30리이다.
註10) 금사공(金沙公) : 문온공(김구용)의 8대손 김확[金矱 1572년(선조 5년)∼1633년(인조 11년)] 선생으로 자(字)는 정경(正卿), 호(號)는 금사(金沙)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郞)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 김대섭(金大涉) 선생이며, 아들은 김정지(金鼎之)로 1627년(인조 5년) 식년시 생원으로 후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 계대 : 김구용(金九容) - 명리(明理) - 맹헌(孟獻) - 자양(自壤) - 예생(禮生) - 윤종(胤宗) - 진기(震紀) - 대섭(大涉) - 확(矱) – 정지(鼎之) - 환(奐)
註11) 외왕모(外王母) : 동주 이민구 선생의 외할머니, 즉 도사 김대섭 선생의 배위 청송심씨로 청성군 심전(沈銓) 선생의 따님이다.
註12) 수치봉식(修治封植) : 집을 수리하고, 무덤에 흙을 북돋아 단장함.
註13) 금사(金沙) : ‘금사(金沙)’는 철원부사 김확(金矱) 선생의 호인데, 여기서는 그의 호를 사용하여 금수정의 주인이 김확이라는 뜻과 금수정 아래 고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절경을 동시에 나타낸 중의적(重意的) 표현이다.
註14) 서수(逝水) : 흘러가는 냇물이라는 뜻이며, 세월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천(逝川)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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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동주집(東州集) > 東州先生文集卷之二 > 序 / 金水亭詩序
金水亭詩序
白鷺洲在洞陰縣1)南十里而遠。其水北流。抱縣治而下。轉長林一牛鳴地2)。稍西迤。水益大。翠屛開張。爲浮雲壁。壁有韓石峯書壺中日月醉裏乾坤八大字。水滙而爲潭。有亭翼然其上。爲金水亭。堪輿家以其上地形如牛頭。又名牛頭亭。其傍曰東臺3)。明沙鋪石。可坐百人以上。碧樹成幄。夏日銷暑。登亭以望。山巒川陸四面朝拱之勢。使人應接不暇。野秀而林芳。木茂而陰濃。風霜厲而淸瘦。氷雪刻而明潔。四時之景。莫不具備。雖善毀者無以措其喙。自亭西十餘武4)。有大石峙於水涯。上陷而爲窪尊5)。受酒可七斗。其傍鐫楊蓬萊詩曰。綠綺琴伯牙心。一鼓復一吟。鍾子是知音。泠泠虛籟起遙岑。江月娟娟江水深。其石下嵌空。群魚所聚。沿溪北下又三里許。爲蒼玉屛。故相朴思庵拜鵑窩6)在焉。蓋蓬萊好爲山澤遊。足跡遍嶺東西。而常流連於是亭。思菴錦城人。捨風詠俛仰之勝不論。而惓惓於斯。竟死而葬焉。必有取爾也。夫名區勝地在吳越遼絶之鄕。人莫不命棹蠟展7)願一往遊焉。今去神京8)三舍9)之外有此絶境。天作地藏。以餉輦轂遊客。豈不異哉。吾舅氏金沙公10)少而專壑。且以先壟不遠。終始爲歌哭之所。自余年十一己亥。始省外王母11)于此。及長而文酒逍遙。無歲而不遊。至癸酉。舅氏亡而余亦老。則亭之上再無余跡矣。蓋蓬萊,思菴。邈爾先輩。文彩風流髣髴影響而已。雖以余眇末後生希蹤於曩轍。而風燭相催。忽焉耄及。人代之感。居然可見。唯其亭宇景物。今古一致。舅氏有孫曰正字奐。嗣守先業。脩治封殖12)。無廢舊觀。乃請余爲文。而繫以詩曰。天豁郊平眺望宜。金沙13)亭子澗之涯。窪尊剔字苔文古。雲壁鳴舷石勢危。丘壑風流如宿昔。山河人代有遷移。臺前逝水14)無情極。不爲光陰駐少時。甲辰仲秋。東州山人李敏求書。
금수정시서(金水亭詩序)
백로주(白鷺洲)는 동음현(洞陰縣) 관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다. 그 물길이 북으로 흘러 현(縣)의 관아를 감싸 안아서 아래로 흐르다가 물길을 돌려 길게 뻗쳐 있는 숲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약간 서쪽으로 굽이지는데 수량(水量)이 더욱 많아지고 취병(翠屛)을 펼쳐서 넓게 벌려 놓은 듯하니 부운벽(浮雲壁)이다. 부운벽에는 한석봉이 쓴 ‘호중일월취리건곤(壺中日月醉裏乾坤 : 항아리 속 해와 달이 취중에 하늘과 땅이로다.)’이라는 큰 글자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강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들어 담(潭)을 이루는데, 그 위에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정자가 있으니 금수정(金水亭)이다. 풍수가들이 그 위의 지형(地形)이 쇠머리[牛頭] 같다고 하여 또 다른 이름이 우두정(牛頭亭)이다. 그 옆을 동대(東臺)라 하는데, 모래가 곱고 얇은 돌이 깔려 있어서 100명 이상이 앉을 수 있다. 푸른 나무들이 휘장을 펼친 듯하여 여름에 더위를 가시게 할 만하다. 정자에 올라가 바라보면 산과 봉우리, 시내와 언덕이 전후좌우 사면(四面)에서 두 손을 공손히 맞잡아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형세이니 심부름꾼을 시켜 손님을 맞아들여 접대하느라 겨를이 없다. 들판이 수려하고 수풀이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고 그늘이 짙으며, 바람과 서리가 매서우나 말쑥하며, 얼음과 눈이 혹독하나 맑고 깨끗하여 네 계절의 경치를 고루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없으니, 비록 아무리 헐뜯어도 그 말을 그만 둘 수 없다. 정자에서 서쪽으로 10여 무(武)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물가에 우뚝 솟아 있다. 위쪽이 움푹 파였는데, 와준(窪尊)이다. 술 7말을 채울 수 있다. 그 옆에 새긴 양 봉래의 시는 이러하다.
綠綺琴伯牙心 녹기금(綠綺琴) 타는 백아(伯牙) 마음
一鼓復一吟 한 곡 뜯으면 또 한 수 읊조리니
鍾子始知音 종자기(鍾子期)만 알아듣네
冷冷虛籟起遙岑 맑디맑은 바람소리 아득한 봉우리에서 들려오고
江月娟娟江水深 강물에 비친 달 곱디고운데 강물은 깊기만 하네
그 돌 아래에 깊숙이 뚫려 있는 빈 공간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드는 곳이다.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흘러내려가서 3리쯤 되는 곳이 창옥병(蒼玉屛)이다. 작고한 재상 박사암(思庵 朴淳)의 배견와(拜鵑窩)가 있다. 봉래는 산택(山澤 : 山川, 山林川澤) 유람을 좋아하여 발자취가 영동(嶺東 : 關東)과 영서(嶺西)에 두루 퍼져 있으나, 항상 이 정자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사암(思庵)은 금성인(錦城人 : 전남 나주)으로 음풍영월(吟諷詠月)이나 주위를 올려다보고 굽어보는[俛仰] 경승(景勝)을 떨쳐 버리고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간절히 원하여 마침내 죽어서 장례를 치렀으니 틀림없이 이를 취한 것이다. 무릇 명승지는 오(吳)·월(越)·요(遼)의 절향(絶鄕)에 있는데, 사람들이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나막신을 신고 산으로 올라가 한번 즐겨 보는 것을 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제 한양[神京]에서 불과 3일 거리 바깥에 이 같은 절경이 있는 것은 하늘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을 땅이 감춘 것이다. 서울[輦轂]에서 건량(乾糧 : 양식)을 가지고 놀러 오는 사람들이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내 외숙부 금사공(金沙公)이 젊어서 독차지했는데, 또한 선산이 멀지 않으니 태어나고 죽음 곧 살아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고 죽어서 곡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내가 11살 나던 기해년(1599년, 선조 32년)에 처음으로 외할머니를 이곳에서 뵈었으며, 자라서 글을 배우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였으니 즐기지 않은 해가 없었다. 계유년(1633년, 인조 11년)에 이르러 외숙부께서 돌아가시고 나 역시 늙었기에 정자에 다시는 내 자취가 없을 것이다! 봉래와 사암은 내게 까마득한 선배인 데다 문채(文彩)와 풍류는 (그분들에 비해 나는) 그림자와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비록 내가 우매하여 보잘것없으나 후생(後生)으로서 앞선 자취를 즐거이 따르려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서둘렀으나 홀연히 늙고 말았다. 인간 세상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는데, 오로지 정자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만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외숙부에게는 손자인 정자(正字) 김환(金奐)이 있는데, 선대의 가업(家業)을 이어 지킬 만하다. 집과 정자를 수리하고 묘소의 흙을 북돋아 새롭게 단장하여 예전의 경관을 쇠퇴하게 하지 않으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시 한 수를 붙들어 맨다.
天豁郊平眺望宜 하늘은 탁 트이고 들판은 아득하여 바라보기 좋으니
金沙亭子澗之涯 금사공(金沙公) 정자는 맑은 물가 벼랑에 자리했네
窪尊剔字苔文古 와준(窪尊)이라 새긴 글자에 이끼 끼어 예스럽고
雲壁鳴舷石勢危 부운벽(浮雲壁) 앞 뱃전에서 물새 우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아슬아슬하여라
丘壑風流如宿昔 산과 골짜기에 부는 바람과 흐르는 물은 예전 같아
山河人代有遷移 산천은 그대로건만 사람만 바뀌었네
臺前逝水無情極 동대(東臺) 앞 서수(逝水)는 무정하기 한이 없어
不爲光陰駐少時 흘러가는 시간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네
갑진년(1664년, 현종 5년) 중추(仲秋 : 음력 8월)에 동주산인(東州山人) 이민구(李敏求) 지음.
<주석>
註1) 동음현(洞陰縣) : 영평현(永平縣 : 포천시 영중면 일대)의 옛 이름.
註2) 일우명지(一牛鳴地) :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라는 뜻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를 이르는 말.
註3) 동대(東臺) : 금수정 계단 위에 해서체로 새긴 암각문을 가리키는 듯한데, 그 글자는 ‘琴臺’이다. 이곳은 너럭바위가 땅에 묻혀 있는데, 이 글에서 말하듯이 수십 명이 앉을 만한 장소이다. 지금은 이곳에 안동김씨세천비(安東金氏世阡碑)가 서 있다. ‘東臺’는 ‘琴臺’로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두었다.
註4) 무(武) : 반보(半步), 석 자.
註5) 와준(窪尊) : 웅덩이 모양의 술단지.
註6) 배견와(拜鵑窩) : 사암 박순 선생이 만년에 영평현으로 물러나 거처하던 곳의 당호(堂號). 배견와 곁에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文友)들이 모여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사암은 적자(嫡子)가 없이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두었으나 외동딸과 사위에게 의지하여 영평에서 삶을 마쳤다. 박응서는 ‘칠서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註7) 전(展) : ‘극(屐)’의 오자. 목판본 원문 이미지파일에는 ‘극(屐)’으로 적혀 있는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잘못 판독하였다.
◇ 납극(蠟屐) : 밀칠한 나막신. 남조 송(南朝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산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나막신을 신은 데서 온 말.
◇ 사극(謝屐) : 사공극(謝公屐)의 준말로, 등산용 신발을 말한다.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명산을 유람할 적에 산을 오를 때에는 나막신[屐]의 앞굽을 떼어 버리고 산을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어 걷기에 편리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 권67 사영운열전(謝靈運列傳) 참조.
註8) 신경(神京) : 명나라의 서울 또는 조선시대의 한성(漢城)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한성의 미칭(美稱)으로 쓰였다.
註9) 삼사(三舍) : 중국에서 군대의 3일간의 행정(行程)을 이르던 말. 총 90리로 360km 정도 된다. 1사는 30리이다.
註10) 금사공(金沙公) : 문온공(김구용)의 8대손 김확[金矱 1572년(선조 5년)∼1633년(인조 11년)] 선생으로 자(字)는 정경(正卿), 호(號)는 금사(金沙)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篈)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郞)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 김대섭(金大涉) 선생이며, 아들은 김정지(金鼎之)로 1627년(인조 5년) 식년시 생원으로 후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 계대 : 김구용(金九容) - 명리(明理) - 맹헌(孟獻) - 자양(自壤) - 예생(禮生) - 윤종(胤宗) - 진기(震紀) - 대섭(大涉) - 확(矱) – 정지(鼎之) - 환(奐)
註11) 외왕모(外王母) : 동주 이민구 선생의 외할머니, 즉 도사 김대섭 선생의 배위 청송심씨로 청성군 심전(沈銓) 선생의 따님이다.
註12) 수치봉식(修治封植) : 집을 수리하고, 무덤에 흙을 북돋아 단장함.
註13) 금사(金沙) : ‘금사(金沙)’는 철원부사 김확(金矱) 선생의 호인데, 여기서는 그의 호를 사용하여 금수정의 주인이 김확이라는 뜻과 금수정 아래 고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절경을 동시에 나타낸 중의적(重意的) 표현이다.
註14) 서수(逝水) : 흘러가는 냇물이라는 뜻이며, 세월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서천(逝川)이라고도 한다.
댓글목록
김광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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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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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