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順王-忠烈公 사이의 代數에 대한 考察-제2회 안사연 학술발표회(2001. 1. 27. 김용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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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5 조회1,450회 댓글0건본문
敬順王-忠烈公 사이의 代數에 대한 考察 2002. 1 安東金氏 按廉使公 19代孫 長在 在哲 (容辰) 족보는 씨족의 발상과 더불어 그 성장과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수록한 혈통사요 가계사입니다. 또한 족보는 자기의 근본을 일깨워주고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관을 북돋아주며 세(世)와 대(代)를 초월한 조손공존의 영육이 살아 숨쉬는 가보로서 한 종문의 가풍을 가늠하는 지상의 보감으로 중시되어 왔으니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숭조 애친사상으로 승화된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의 일부 청소년층은 서구사회로부터 무분별하게 유입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서 비롯되어 조상과 부모를 경시하고 종족 알기를 노변에서 마주치는 행인 보듯 하는 세태에 까지 이르러 심히 우려되고 있는바, 이제 우리는 이같은 현상을 강건너 물구경하듯 수수방관하고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국민정신교육 차원에서의 정책적인 배려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 가정과 학교, 사회 등 각계각층이 모두 후세계도(後世啓導)에 지혜를 모으고 조력하여 가일층 심려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동김씨는 천년사직을 주도한 신라국성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여 민족사상 초유의 통일 대국을 건설하였고 그 위에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움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한민족의 슬기와 기량을 세계만방에 자랑하고 있으며 항시 성덕으로 일관한 왕실의 후예임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시조 태보공으로부터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경국, 치세, 목민에 있어 항시 인(仁), 의(義), 예(禮)를 바탕으로 한 덕업으로 보본함으로써 라조(羅朝) 38대왕님을 비롯한 현군 양상이 부지기수로 속출하여 소위 삼한갑족으로 추앙받아 왔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중시조이신 충렬공 방경(忠烈公方慶) 조상님께서는 삼별초란을 투별하시어 국내가 평온을 되찾아 질서가 안정되게 하셨고, 대외적으로는 혼도, 홍다구와 합세하여 일본 대마도를 2회에 걸쳐 정복하시어 국위를 선양하셨으며, 그 공헌으로 추봉 선충협모정난 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 靖國功臣 壁上三重大匡) 시(諡) 충렬(忠烈)을 하사 받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고명하신 충렬공의 후예라는 긍지를 가지고 후손들에게 선조님들의 숭고한 얼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이 우리 세대의 책무임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과제는 조상의 얼을 고무선양하는 것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그에 앞서서 해야할 일은 우리 종중의 역사관을 바르게 잡아주는 것임을 상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역사관 없이는 후손들에게 올바른 조상의 얼을 선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으로부터 본인이 생각하는 우선과제는 외적인 측면과 내적인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적인 측면은 선김과 후김과의 관계요, 내적인 측면은 대안군 은열공(大安君殷說公)이하 충렬공 방경중시조(忠烈公方慶中始祖)님 사이의 세대수 차이입니다. 이 두 가지 큰 문제를 저버린다면 조상님들의 얼을 선양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위선사업에만 치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의심나는 문제들을 확실한 고증이 없는 관계로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할지라도 후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족보를 발간하는 일이 우리세대의 당면과제라고 생각되오며 의문점에 대하여는 대안군의 묘지문에 주안점을 두고 있사오니 그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大譜 134面. 1列-4列. 誌石文 내용일부 兄은 鎰이요 다음은 湟이며 그 다음은 鳴鍾이요 아우는 重錫, 鍵, 鐥, 錘요 아들은 江陵君 泰華이니 후에 子孫들이 혹시 詳考할 일이 있으면 誌石을 墓위 정북으로 五步地點에서 파 보라고 하였으니 우리 族譜에는 殷說公의 아드님이 泰華, 繼 , 叔承, 濂, 碣, 女尹執행으로 記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泰華 한 분만 名記되어 있는 點 2) 大譜 136面. 4列∼12列. 墓誌記事內容一部誌文에 말하되 敬順王七世孫檢校太子少輔金景輔 父는 工部侍郞漢公이요 祖는 追封工部尙書繼參이며 아들은 儒林郞監察御史로서 緋魚帶를 下賜받은 作斐라 하였으니 여러 世譜를 詳考하여도 비록 어느 派의 祖上인지는 알 수 없으나 墓貌가 荒蕪하기 때문에 일체로 改封하고 세 곳의 誌石을 옛날 자리에 다시 묻었다 이미 失傳된 墓所를 이제 다시 찾게되어 같은 山안에 영역이 如舊하니 어찌 여러 宗親의 多幸이 아닐까 簡略하게 後日의 考證으로 하노라, 하였으니 綜合分析하여 본 즉 殷說公은 아드님이 江陵君 泰華公 한 분이고 또 景輔公 祖가 繼參으로 나타나 있으니 우리 貫祖이신 叔承公은 泰華公과 繼參公의 사이의 世系로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大安君 卒年이 1028年이고 忠烈公卒年이 1300年이니 그 사이가 272年인즉 7代로 計算하면 1代數가 39年 平均이 되고 1代를 30年으로 假定한다면 7代를 除하고도 62年의 年차가 생기게 되니 2代하고도 2年이 남는 점, 또 敬順王 薨年이 978年이고 忠烈公 卒年이 1300年이니 其年差가 322年이 되니 8代를 除하면 82年이 年差가 생긴다는 點 (先祖님들의 代數와 年差異點에 대하여 別紙의 安東金氏 世系表와 慶州金氏 世系表를 參照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大譜考異辨. 149面 18列.-104面 4列 好植씨 집 家牒과 大安君 墓誌에 의하여 敬順王 子女 九男三女와 大安君 子女 四男 二女가 있음을 알았고, 오직 우리 大安君殷說公, 侍郞公叔承, 太師公日兢, 上洛君利請의 四世 名諱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어 의심할 바가 아니므로 이로써 계해보와 동원록을 모두 이에 따라서 간행하였다. 大安君 墓誌文이나 墓誌記事에는 아들 江陵君 泰華라고 한 분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전혀 언급한 바 없으며 大安君 後裔 61개 分貫姓氏族譜에도 全部 同一하게 기록되어 있고 孫子에 대하여는 전혀 言及이 없으니 이 記事는 考證이 없음으로 신빙성이 없어 부적합한 듯 싶습니다. 考異辨의 144面에서 152面까지의 記事는 理解하기 어렵고 제한된 시간관계상 이 紙面에 일일이 설명하지 못하게 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大譜 내용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안군 후예 61개 分貫 성씨중 敬順王-殷說-泰華-正矩-繼 - 漢公 순으로 된 姓氏가 38個 姓이며, 大安君-泰華,繼 ,叔承,濂-日兢-利請 順으로 된 姓氏는 우리 貫祖에서 分貫된 8個 姓氏이고, 濂公의 後裔인 15個 분관성씨는 殷說公의 子, 泰華,叔承,濂까지는 兄弟間으로 되어 있으나 그以下는 各樣各色으로 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4) 경순왕 15代孫 忠烈公이라는 傳記에 의하여 敬順王의 15代孫이 忠烈公으로 記錄된 庚辰譜에 의한다면 敬順王 薨年이 978年이고 忠烈公의 卒年이 1300年이니 年差가 322年이고 15代로 나누게 되면 平均 21年이 안되고 敬順王과 孝印公 사이는 275年이니 14代로 나누면 1代數가 平均 18年이 弱하게 됩니다. 만약에 早失父母하게 되면 一代에서는 있을 수가 있어도 十代, 十五代가 平均 二十年 미만이라는 事例는 옛날 文獻이나 俗言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敬順王의 15代孫이 忠烈公이라는 記事는 考證하기 어려우며 심히 憂慮되는 바입니다. 이어서 別紙 敬順王이하 承澤公까지의 安東金氏와 慶州金氏와 의 代數比較表와 代數年度表에 의한 差異점, 敬順王의 15代孫 忠烈公이란 考證등을 說明하겠습니다. - 敬順王 以下 忠列公 사이의 代數差異 考證 - 1) 大譜 忠列公行狀文 內容 新羅王金傅十五世孫也--庚辰譜 2) 大譜 139面 世系考異 3) 敬順王金傅十一世孫-利請-庚辰譜, 1580年 刊行 4) 東國與地勝覽 安東編 敬順王의14代孫 金孝恭 5) 文英公墓誌文 內容中 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徒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자之鄕也 6) 己未大譜 忠烈公行狀文 新羅王金傅九世孫也(舊譜十五世孫 誤傳也) 本人은 安東金氏大宗會 創立 後 4, 5년간 理事로서 참여했을 뿐이며 宗事에 관함은 물론 사회적 식견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서 오래 전 先祖님들께서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시고 심사숙고하시어 종친간의 가승과 문헌, 또는 他姓간 교류 등 다각적인 연구 끝에 발간하신 귀중한 족보에 대해 잘 잘못을 평가할 인품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己未大譜(1979)를 발간한 지 于今 23년이 경과되었으니 30년을 1代數로 추산하여 大譜를 발간한다고 가정한다면 이제 7년이란 기간밖에 여유가 없는 관계로 지금부터라도 가칭 <족보심의기구>등의 조직을 구성하여 뜻있고 식견이 넓으신 종친들로 하여금 3개월이나 6개월을 주기로 硏究發表會를 갖도록 하자는 案을 이 자리를 빌어서 大宗會 會長님께 提案하는 바입니다. - 앞으로의 우리 大譜發刊에 대한 硏究課題 - 1) 先祖님들의 史蹟探究 2) 太輔公과 大譜公과 名稱關係 3) 貫祖, 叔承公, 日兢公, 利請公, 忠烈公에 대한 考察 4) 先金과 後金과의 關係 5) 文英公 墓誌文 內容一部 19字缺의 疑問點 6) 上洛君 忠烈公(諱方慶) 神道碑文 墓碣 = 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 僉議中贊世子師上洛郡開國公諡忠烈公金方慶之墓 以上 上洛君과 上洛郡의 差異點 7) 大安君 誌石文 內容中 敬順王의 第二子 湟은 敬順王의 朴妃孫인지 王妃孫인지 疑問點 8) 族譜 先祖님들의 中國年度改正 이상으로 저의 설명을 마치오며 여기에 참석하여 주신 대종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종친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빌려서 두서없는 발표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1월 27일 按廉使公 19代孫 長在 在哲(容辰) 別紙) 考異辨 145面 得顯公의 解釋과 比較表 ▷ 敬順王以下 承澤公까지의 代數年度表 以上과 같이 計算한 즉 大略 1代를 30年으로 計算하면 2代의 錯誤가 發生함. ▷ 慶州金氏 代數年度表 以上과 같이 2代를 추가하게 되면 근사한 대수로 이해할 수 있음. *참고자료: 1.<안동김씨 게시판> 김윤만 종친 자료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윤만 작성일 : 2002/01/19 02:36 조회 : 19 수성최씨. 수안김씨. 사천김씨 그리고 우리. 안동김씨 시조 숙승공은 은열공의 차자냐? 삼자냐? 저는 안동김씨대동보 卷之一(1979년 기미) 및 문온공파세보 卷一(1992년 임신)에 의거 우리 안동김씨 시조이신 공부시랑 평장사 숙승(叔承)공이 은열(殷說)공의 삼자(三子)이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본 홈페이지를 비롯한 여타 많은 자료에서 차자(次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소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안동김씨에서 분관(分貫)된 수성최씨, 수안김씨, 사천김씨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고, 나아가 경주김씨, 의성김씨, 청풍김씨 등 타 본관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살펴 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안동김씨대동보(1979 기미) : 은열(殷說)-태화(泰華), 계령(繼 ), 숙승(叔承) ○ 수성최씨세보(1997년 정축) : 은열(殷說)-계령(繼 ), 숙승(叔承) ○ 수안김씨세보(1986년 병인) : 은설(殷說)-태화(泰華), 계령(繼 ), 숙승(叔承) ○ 사천김씨족보(1991년 신미) : (殷說) - (泰華), (叔承) ○ 경주김씨대동보(년대 미상) : 은열(殷說)-태화(泰華)-정구(正矩)-계령(繼 ). 숙승(叔承) ※ 증손자로 표기됨. ○ 경주김씨병판공정평파보(1995년 을해) : 은열(殷說)-태화(泰華)-정구(正矩)- 계삼(繼蔘). 숙승(叔承) ※ 증손자로 표기됨. ○ 의성김씨문학공파세보(1982년 임술) : 은열(殷說)-계령(繼 ), 숙승(叔承) ○ 청풍김씨세보(1989년 기사) : 은설(殷說)-정구(正矩)-계삼(繼蔘) ※미표시 이상과 같이 차자, 삼자 및 증손자 등 각양각색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한가지 추가로 알게 된 것은 경순왕에서 충렬공까지의 대수문제인데, 이 대수문제 또한 바로 은열, 태화, 계령, 정구, 숙승 간의 세계(世係) 미정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천만다행으로 항용 조카님이 말씀하신대로 문중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 원로 연구가 안렴사공파 용진(在哲) 아저씨께서 1월 27일 사이버 종친 모임에서 (충렬공 代數에 관한 고찰)로 주제 발표를 하신다고 하니 참으로 고맙고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다음은 안동김씨에서 분관된 씨족의 족보를 살펴보고 느낀 소감을 간략하게 언급하오니 종친 여러분께서도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성최씨(隋城崔氏), 수안김씨(遂安金氏), 사천김씨(泗川金氏)는 안동김씨 대동보 중편과 하편에 의하면 우리 안동김씨에서 분관(分貫)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상서공(尙書公) 효인(孝印)께서는 아드님 삼형제를 두셨는데 맏아드님이 상 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이신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이시고, 차자가 밀직부사공 지경(之慶), 삼자가 충순공(忠順公) 현경(玄慶)이신데 수성최씨의 시조 수성백(隋城伯) 문혜공(文惠公) 영규(永奎)께서는 충순공 현경의 손자 이십니다. --수성최씨세보 권지일(隋城崔氏世譜 卷之一, 1997년 정축 5월 발행)을 살펴보면, 수성최씨 시조 문혜공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에 있고, 재실은 어천리에 있습니다. --위 세보 간행사(刊行辭)에 의하면 수성최씨는『범신라김씨(汎新羅金氏)』로 시조이신 영규공은 경순왕의 11세손이 되신다. 시조께서는 충렬왕 28년 임인(壬寅 : 1302년)에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을 다스린 공이 높다하여 최씨로 사성(賜姓)되시고, 수성백의 봉작을 받으시고, 문혜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시니 수성최씨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문혜공은 경순왕의 11세손이시다.』시조 문혜공께서는 경순왕의 17세손 혹은 13세손으로 많은 비명과 옛날 여러 족보에 기록되어 왔다. 그러다가 근자의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이신 은열공 묘정(殷說公 墓庭)에서 태화(泰華)와 정구부자 (正矩父子)의 지석(誌石)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계대에 혼선이 빚어지게 되었다. 정사보(丁巳譜)를 보면 태화공 자(子)로 정구공 손자(孫子) 숙승공(叔承公)으로 되어 있으나 태화공과 숙승공은 형제간임으로 우리 시조 문혜공 영규께서는 경순왕의 11세손이 되시는 분이다. --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11세) --경순왕 - 은열 - 숙승 - 일긍 - 이청 - 의화 - 민성 - 효인 - 현경 - 준 - 영규 --이상에서 보듯이 수성최씨의『근본 큰 뿌리는 경순왕의 11세 후예이시다.』 --수성백 문혜공 신도비명(隋城伯 文惠公 神道碑銘)에도 공의 본계는 김씨로 신라 마지막왕이신 경순왕의 11세손이시다. --그리고 세보(世譜) 말미(末尾)의 세계(世系)에는 경주김씨본원신라세계(慶州金氏本源新羅世系)를 인용하였는바 경순왕을 수성최씨 원조(元祖)로, 숙승공을 후위안동김씨(後爲安東金氏)로, 충렬공 방경은 상락백(上洛伯) 안동김씨 시조(上洛伯 安東金氏 始祖)로, 문혜공 영규는 봉수성백 사성최씨 수성최씨 자차시언(封隋城伯 賜姓崔氏 隋城崔氏 自此始焉)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 기록에서 제가 느낀 소감은 수성최씨세보는 안동김씨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수성최씨세보가 '범신라김씨'임을 주장하며 '경순왕의 11세손'임을 무수히 강조하고 있고, 세계도 '경주김씨본원세계'를 인용하고 있는 반면 안동김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안동김씨 시조를 숙승공으로 보지 않고 충렬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숙승공은 직계 선조이시고 충렬공은 방계 선조이시기 때문에 안동김씨와 무관함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직계 선조 숙승공이 아닌 방계 선조 충렬공을 안동김씨 시조로 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또한 충렬공 할아버지 작위 상락백(上洛伯) 기록도 명백한 착오임을 지적해 봅니다. ○ 수안김씨(遂安金氏)는『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은열의 8세손 상락군(上洛君) 방경의 장자 선( ) 시조님이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지신 이후로 수안으로 위관(爲貫)되었다.』하고 있어 예상밖으로 다음 세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 바 사실 여부는 좀더 연구하여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1. 본 세보에서도 사천김씨 족보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충렬공의 작위가 上洛君으로 잘못 기록된 점. --2. 충렬공의 장자이신 선( )께서 수안군에 봉군(封君)되셨다는 기록. --3. 선( ) - 자(資) - 위(爲) - 득남(得男) - 이(履). 유( ). 정(精)으로 이어지는 세계중 아래 후손 중에서 시조가 아니되시고 우리 안동김씨 선( )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고 있는 점. --(판서공 선은 군사공파, 문온공파, 도평의공파 등의 직계 선조이심) --수안김씨 또한 충렬공의 장자이신 판서공 선( )을 시조로 하고 선의 장자 자(資)는 수안김씨로 차자(승용)와 삼자(승택)는 안동김씨를 계승한 것으로 기록한 것은 어찌보면 충렬공의 적통이 수안김씨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다만 판서공 선의 묘소 실전 사실과 안동김씨로 승계된 후손 등이 합모출력(合謀出力)으로 1967년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에 설단(設壇)하여 매 음 3월16일에 시향하는 기록을 남겨 주었습니다. ○ 사천김씨(泗川김씨)는 시조가 정의공(貞義公) 부(阜)이시고 경순왕 13세손 상락군 묘(昴)의 아들이 제안(齊顔, 문온공 구용의 동생)이고 부(阜)는 묘의 손자이시다. 제안께서 수안김씨로 분적된 김정(金精, 제안이 정의 재당숙) 등 7인이 요승 신돈(辛旽)을 모주(謨誅 : 베어 죽일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유(杖流)당하시다 화(禍)를 당하게 되자 부(阜)도 그 영향으로 사천으로 유배되시다. 정사년(丁巳年)에 이르러 왜군이 창란하니 공이 수군장군(水軍將軍)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패하게 하고 정벌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바 신돈이가 시중(侍中)으로 불렀으나 사양하다 공양조(恭讓朝)에 이르러 사성대원군(泗城大院君)의 봉작(군?)받고 정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사천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1984년 8월15일 전북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 77번지 선인산(仙人山) 하에 초혼설단(招魂設壇)으로 년시향(年時享)을 모시게 되었다. 하고 있습니다. --사천김씨 족보는 대체로 우리 안동김씨와의 관계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2.(117) 충렬공이 경순왕의 15세손이라는 자료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03 19:39 우리 안동김씨의 중시조이신 충렬공은 과연 경순왕의 몇대손인가?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각종 자료를 발굴하여 연구하고 확인하여 밝혀야 될 일이니, 우리 모두 노력하는 자세로 자료를 모아 보아야 겠습니다. 우선 경순왕의 15세손이라는 자료 몇가지 찾아서 올립니다. 그렇다고해서 15세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두면서 현재 우리가 9세손으로 쓰고 있는 것은 기미대보(1979년) 발행때 정리하여 그후로 쓰이고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둡니다. 1. 안동김씨성보(경진보;萬歷8年서기 1508년)는 우리 안동김씨 족보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바, 서기 1508년 4월에 간행된 것이다. 安東金氏姓譜 新羅敬順王金傅-事見麗史墓在長端端南八里 ↕ 十一代孫 利請 ↕ 子 義和 ↕ 子 敏成 翰林直史官兼掌冶署令追封尙書右僕야묘재안동부서일서화림촌 ↕ 子 孝恭 개명창무후관지평장사...... 孝印 등제관지병부상서한림학사추봉중서령부인김녕송씨봉금관국부인... ↕ 子 方慶 추충정난정원공신삼중대광첨의령중찬판전리사사....... **십일대손 이청-의화(12)-민성(13)-효인(14)-방경(15)....... 上洛忠烈公行狀 公金方慶安東大都護府人兵部尙書翰林學事追封中書令孝仁之子直史官敏成之孫 新羅王金傅十五代孫也...... 中略 至正十年庚寅二月 匡靖大夫檢校都僉議參理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安山君安震跋 2)성천도호부사안동김공명리묘지명 공의 성은 김이요 휘는 명리이니 안동인이시다. 신라 경순왕15대손인 김방경의 5대손이다..... 이하 생략. 홈페지 각파문종회 문온공파 24번 참조 3)동국여지승람 인물고.. 한림민성의 아들 효공(충렬공의 백부)은 경순왕의 14세손이다. 3.(125) 충렬공이 경순왕의 15대손이라는 자료 (2)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11 21:01 조회 : 7 충렬공 (김방경)이 경순왕의 15대손이라는 다른 자료가 있어서 올립니다.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幷序 夫人姓金氏彦陽郡人..... 중략 生一女適判軍器寺事金昴 新羅王諱傅十八代孫也金氏子男曰齊閔曰齊顔曰九德女適密直副使金士安.....이하 생략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급암 민사평 처 김씨 묘지명)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_)사람니다. 고조의 휘는 취려이니, 태사 문하시랑으로 시호는 익대요, 조부는 ... 중략.... 딸하나를 낳아 판군기사사(判軍器寺事)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慶順王)18대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 제안,(齊顔)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密直副使)김사안(金士安)과......이하 생략. 자료출처:목은집16권. 동문선126권 김방경(15)--김선(16)--김승택(17)--김묘(18)-------- 언양군부인 김씨는 문온공의 외할머님으로서 급암 민사평의 부인이시다. 새로운 자료(9대손이라던지,15대손이라던지...) 있으시면 계속 올려주세요 이렇게 하여 자료를 모으고 하여서 정리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 (134) 충렬공이 경순왕의 15세손이라는 자료(3)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25 19:06 충렬공 할아버님이 경순왕할아버님의 15세손이라는 또 다른 자료가 발견되어 여기에 소개 합니다. 충렬공이 경순왕의 15대손이라는 자료(3) 출처: 陽村(權近)先生文集 第 35卷 東 賢史略 金中贊方慶 公字本然安東人祖敏成直史館父孝仁兵部尙書翰林學士 贈中書令新羅王金傅十五世孫也初仕爲式目錄事.... 이하 생략(양촌집 35권 참조) 번역 中贊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시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仁)은 병부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김부(金傅)의 15세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록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埈)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그 뒤로 내직(內職),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치직(治績)을 이루었다. 충경왕(忠敬王)이 강도(江都)에 있을 때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멋대로 폐립(廢立)하였는데, 이때 충렬왕은 세자로 원(元)에 가 있었다. 공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세자가 있는 곳에 달려가 알리매, 세자가 연 의 죄를 다스리고자 군대를 청하니 제(帝)가 몽가독(夢哥篤)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세자는 공을 선도(先導)로 삼아 본국에 채 못 왔을 적에 왕이 복위(復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처음에, 공은 원군(元軍)이 대동강을 건너면 나라가 진동되어 변이 생길 것은 우려하여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어, 원군으로 하여금 서경(西京;평양)에 주둔하여 성원(聲援)만 하게 하고 강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 지방의 반민(反民)들이 난을 이용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속셈으로 무고하기를 "고려가 원군을 섬멸할 것을 도모, 배반하여 제주(濟州)로 들어가려 하니, 사냥한다 소문내고, 대동강을 건너가 서울을 엄습하여 여자와 재물을 모두 얻는 것만 못합니다."하니, 몽가독이 따르려 하므로 공이, "조서(詔書)를 어기고 강을 건너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중지하였다. 왕이 조서를 받들고 다시 송도(松都)로 옮겨올 때에 연(衍)의 무리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웅거했다가 다시 제주로 들어가니,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모두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제수하였다. 지원(至元:元世祖의 年號) 갑술년(元宗15,1274년)에 제의 명을 받들고 동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대마도 등 3도를 쳤다. 충렬왕이 즉위하여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삼아 제에게 포로를 바치게 하니, 제가 금호부(金虎符:漢代에 州郡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차던 符信이었다. [元史 兵誌에 의하면"萬夫를 통솔하는 자는 金虎符를 찬다"하였다. 銅虎.銅符라고도 한다)를 차게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금호부를 찬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정축년(충렬왕3.1277년)에 위 득유(韋得儒), 노 진의(盧進義)두 사람이 공과 한 희유(韓希愈)를 무고하여 '반역을 모의한다.'고 하므로, 원(元)에 사자를 보내어 국문(鞠問)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어서, 은혜를 입어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어찌 거짓 자복하여 나라에 환을 끼칠 수 있겠는가?"하고 끝까지 승복(承服)하지 않자 조서(詔書)로 공과 위. 노 2인을 불려 같이 경사(京師)에 와서 변명하게 하였는데, 노는 도중에 혀가 문드러져 갑자기 죽었고, 위는 중서성(中書省)에 소장(訴狀)을 낸지 10일 남짓하여 역시 혀가 문드러져 죽으니, 사람들은 '천벌을 받았다' 하였으며, 공은 석방되어 돌아왔다. 경진년(충렬왕6년,1280)에 조서를 내려 중봉대부(中奉大夫)를 제수하여 고려군 도원수를 맡게 하고, 이어서 다시 일본을 정벌하라 하므로 신사년(충렬왕7년.1281)6월에 진격하여 일기(壹技) 및 박가대지하(朴加大志賀:博多를 말함)등의 섬을 쳤다. 강남군(江南軍)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으므로 머물러 그들을 기다리던 중, 8월에 태풍을 만나 전함(戰艦)의 반 이상이 전복되어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자, 공은 보든 배에 영을 내려 말과 갑옷을 버리게 하고 패선(敗船)의 군졸 1천여명을 싣고 돌아왔다. 을유년(충렬왕11년.1285)에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병술년에 89세로 졸하였는데 조용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미더우며 엄하고 과묵하였으며 근검으로 몸을 단속하여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았고 세수하는 물은 한 사발은 넘지 않았으며, 친구를 잊지 않고 상(喪)을 당하면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가서 조문(弔問)하였다. 5, (42) 경순왕에서 김방경 할아버지까지 작성자 : 김주회 작성일 : 2001/07/08 21:54:05 224 경순왕 - 김은열 - 김숙승 - 김일긍 - 김이청 - 김의화 - 김민성 - 김효인 - 김방경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신라를 넘겨주고 왕건과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인 유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큰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김방경께서 태어나신 1212년 사이는 277년으로 30년으로 나누면 9,2가 됩니다. 김방경 할아버지께서 경순왕의 9세손이 되시니 연도계산에는 무리는 없는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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