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전대종회상임부회장과의 대화 (2004. 11. 10.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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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3 조회1,199회 댓글0건본문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전(당시 33세), 12월 여름방학을 맞아 휘경동의 대종회 사무실에 처음 인사 갔다가 윤회 상임부회장님을 만나 말씀하신 내용을 채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찾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 1. 일시 : 1985년. 12월 (2004. 11. 9. 정리) 2. 장소 : 대종회 사무실(동대문구 휘경동 ) 3. 대담자 : 윤회님(안렴사공파. 대종회 상임부회장. 세) 4. 대담 내용 가. 충렬공의 현손에서 나온 성씨에 대하여 1)대동보 1권 2P. 전서공파의 손자대에서 定山金氏가 나옴. 이북에 많이 살고 있음. 일부는 안동김씨로 환원한 사람도 있음. 2)대동보 1권 2P. 지제교공의 손자대에서 泗川金氏가 나옴 3)대동보 1권 4P. 之衍 동생 之彦의 아들이 淸州金氏로 됨. 4)대동보 1권 1P. 資의 후손에서 遂安金氏가 나옴. 5)대동보 1권 8P. 哲의 손자에서 寧海金氏가 나옴. 함경도에 많이 살고 있음. 6)대동보 1권 8P. 達-대구김씨 시조 7)方慶의 아우 玄慶의 손주 憶敏-隨城崔氏 시조
나. 경순왕-충렬공 代數에 대하여 1)<신라김씨 이천년사>(김헌범, 김병종 편저. 보연각. 1982)에 충렬공이 경순왕의 15세손이란 기록. 2)우리 대종회에서는 기미보(1979년)에 경순왕으로부터 9세손(8대손)으로 정리. 그 근거는 을해대보(안동김씨 대동보. 1935년 간)에 9세손으로 기록했기 때문.
다. 선조님들의 한시, 시조 등에 대하여 1)<대동시선> 1권 참조할 것. 德龍 종친(익)이 많이 연구함.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관우( ? )씨께 문의할 것.
라. 낙서공(휘 自點)에 대하여 1)낙서공과 관련한 상소문이 있는 곳<松崖先生 文集>(譯本. 松崖 金慶餘先生 기념사업회 간. 松崖堂. 1983) 2)낙서공의 후손이 일본에 있다. 을해대보(1935년 간) 발간 당시 족보를 발행할 경우 총독부의 학무국 허가 받아야 했는데(조선조때는 예조의 허가) 학무국의 소사로 있던 사람(당시 윤회씨는 중2년)이 보소에 찾아와서 ‘자신은 낙서공의 후손인데 우리 선조님이 일본으로 도망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함. 가승과 가첩을 갖고 와서 보여 줌. 일본에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고관대작, 국회의원 등 많이 있다고 함. 전 가네야마대사는 ‘자신의 조상은 한국인이며 그 며느리는 한국인이라 함. 이에 누가 일본에 가서 족보 수단 초고를 가져와 을해대보에 실었다 함. 그런데 그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모름.
*일본에 있는 낙서공 후손 또는 안김 후손예상 유사 성씨 가네야마(金山), 가네꼬(金子), 안또(安藤), 가네모또(金元, 金本), 하나야마(花山), 가네다(金田) 등
마. 한일간의 혈통관계에 대하여 -- 일본의 秦씨(하다- )는 고려의 귀화인이다. 고려신사가 있다.
바. 기타 1)厚에 대하여 고려사에서는 나쁘게 평하고 있다. 밀직사공 七祐가 죽음 (부자간 확인)
사. 정인지의 고려사와 관련하여 1)고려사를 집필함에 있어 우리 문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은 집필 인상 있음. 2)사육신, 생육신 계열에서는 우리 문중과 혼인을 안 함.(문정공-휘 질-과의 사이 때문인 듯) 3)정인지는 고려말의 명신록에 우리 선조들은 많이 쓰지 않음. 안렴사공에 대해서도 많이 빠짐.
아. 후안동김씨의 근원에 대하여. 1)조선조 광해군때 김극효(후안동 청음공계의 중시조)가 어렸을 때 면목동 뒤(청량리)에서 나무장사를 하고 살았음. 하루는 정유길(광해군때의 영의정)이 나무장사하는 김극효를 보니 잘 생긴 젊은이임. 이에 나무를 사서 집으로 데려와 부리게 함. 이 때 김극효가 정유길의 집을 보니 영의정의 운수가 있는 집으로 보임. 집에 와서 정유길이 김극효에게 성을 물어보자 ‘안동김씨이나 선조를 모른다’고 대답함. 당시 정대감에게는 불구자인 딸이 하나 있었음. 정대감이 김극효의 관상을 보니 정승벼슬 관상임. 이후 정대감은 늘 김극효에게서만 나무를 삼. 이후 정대감은 김극효에게 혼인을 요청하고 사위를 삼아 공부를 시킴. 그 후 극효는 도정(도정-정3품 당상관) 벼슬을 함. 임당 정유길의 동서는 유자광의 형. 子는 김상용, 김상헌
자. 최초의 족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560년 조선조의 종친부에서 만든 이씨 왕가 족보이다. 이것을 한 사신이 중국으로 가져 갔다고 한다. *우리 문중의 족보는 1580년(만력 8)에 만든 경진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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