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백범 김구선생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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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5-07-18 14:09 조회52회 댓글1건본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지묘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白凡 金九 之墓
〈풀어쓴 백범 김구선생 비문〉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1876년(丙子) 음력 7월 11일 오후 11시 황해도 해주시 백운면 텃골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순영(보명 在夏)과 어머니 현풍인(玄風人)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해주인(海州人)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여 인(仁), 신(信) 형제를 나았다. 글을 즐겨하여 17세에 과거를 보았다. 아버님 임종 직전에는 허벅지를 베어 살과 피를 먹였다. 늙어서도 어머님의 가르침 받으며 의(義)로운 인격으로 굳게 성장하였다. 갑오동란(동학농민혁명)에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점령할 때는 나이가 19세 였다. 선비 고능선(高能善, 화서학파)께 충(忠)과 의(義)를 배우고, 21세에는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치하포(황해도 안악군)에서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한 칼로 살해하여 체포되고 사형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광무황제(고종)의 분부로 풀려나서 중[僧]이 되었다. 25세에 예수 믿어(상동교회에서 안창호(安昌浩)가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대) 새 교육 이르키며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36세에 안명근(安明根, 安重根의 사촌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됨)의 일과 양기탁(梁起鐸, 애국계몽활동을 하며 독립협회, 신민회 등 창건)의 일에 걸려 17년 형을 받고 감옥에서 5년 만에 나왔다. 44세인 기미년(1919년) 3·1운동 때에 상해로 건너가 우리 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하였고, 52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끝내 태극기를 지켰다. 55세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끌었고, 56세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니 이듬해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이 조직에 들어왔다. 이때 중국 장개석(蔣介石) 주석을 알게되면서 국민 대접을 받게 되었다. 2차 대전으로 정부와 동지를 중경(重慶)으로 옮기니 63세였다. 65세에 한국광복군을 결성하여 훈련을 시작했으며, 67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일본에 선전하였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주석이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말하였고, 을유년(1945년) 8·15 해방으로 만세 속에 서울 오니 70세라. 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반탁운동을 일으켰다. 국민의회를 소집하여 미소군정(美·蘇軍政)이 아닌 우리 자주정부(自主政府)로 결의하고 회의를 마치다. 73세에 평양 남북협상에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우리 민족의 말이다. 1949년(己丑) 6월 26일 오시(午時)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총탄에 쓰러질 때가 74세라. 아들 공군 중령 신(信, 공군참모총장 예편))이 이으니 집 한칸, 밭 한 뙈기 물려 받은 것이 없었다. 7월 5일 국민장(國民葬)으로 서울 효창원에 모시니 태백(太白)의 정기(精氣)가 서리더라
단기 4282년(서기 1949년) 11월 24일 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 세움
찬자 :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완구(趙琬九, 1881~1954)
서자 : 예술원회원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서기 1999년 4월 12일 부인 최준례 여사와 효창원에 합장(合葬)
▶조완구(趙琬九)
비문을 지은이로 호는 우천(藕泉). 1881년 3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내무주사직을 사직하고, 10년 국권피탈 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동지사(同志社)를 결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어 1921년 임시정부 내무차장, 1923년 상하이 한국인거류민단의사회 의사장, 1924년 노동총판이 되었다.
1935년 광복전선(光復戰線) 결성에 참여하여 난징[南京]에서 전단·표어 등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6년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과 함께 한국국민당 결성을 주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이어 재무부장을 역임하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그 후 한국독립당 비서부장으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비상국민회의 재무위원장, 민주의원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신탁통치반대·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등 시종 김구의 중립노선을 따랐으며,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남북 15요인 회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충현(金忠顯)
비문의 글씨를 쓴 서예가로 1921년 김윤동(金潤東)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경(恕卿), 호는 일중(一中)이다. 증조부 김석진(金奭鎭)은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조부 김영한(金甯漢)은 광무연간에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 후기 학예를 주도했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가학을 이었다. 한글 서예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은 동생이다.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당시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하여 고안한 서체를 선보였는데,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일명 ‘고체(古體)’로 명명된 글씨였다. 궁중에서 쓰던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한글 서예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
경동공립중학교·경동고등학교 국어교사,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창립, 일중묵연(一中墨緣) 개설, 오산학교(梧山學校) 이사장 등을 통해 후진 양성을 하였고, 한국 서예가 협회장, 국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등을 역임하며 서단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6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작품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1949), 「백범 김구 선생 묘비」(1950), 「사육신 묘비」(1955), 「4.19혁명 기념탑」(1960), 「탑동공원 사적비」(1967), 「삼국통일 기념비」(1977), 「인촌 김성수 선생 묘비」(1989) 등이 있다. 저서로 『우리 글씨체』, 『서도집성(書道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 『일중 김충현 서집(一中金忠顯書集)』 등이 있다.
댓글목록
김태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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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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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잘보았습니다.
수고하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