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김방경을 기려야 하는 이유
페이지 정보
김태영 작성일25-12-19 14:53 조회546회 댓글2건본문
우리가 김방경을 기려야 하는 이유
우리 역사에서 숭앙(崇仰)의 대상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김방경이 활동한 고려시대 인물로는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등을 들 수 있고,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왕, 이순신,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그리고 근대에는 백범 김구, 안중근 등 수 많은 군주, 명현, 열사들의 이름이 우선 떠오른다.
선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역사의 뒤안길에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큰 인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굳이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필자는 고려의 인물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내세우고 싶다. 다소 주관적이지만 김방경이 많은 것을 고루 갖춘 다재다능한 인물이며 특히 오늘의 공직자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전범(典範)이라 믿기 때문이다.
김방경의 핵심은 글을 다루는 재주[文]와 무술을 다루는 재주[武]를 겸비한 지성과 체력, 학문적 능력과 실천적 능력을 두루 갖춰, 밖으로는 군대를 이끌고 적을 물리치는 장군의 재능이 있고, 안으로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킨 재상의 지혜로 출장입상(出將入相)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덕목을 보여준 큰 인물이다.
김방경이 첨의중찬(시중)으로 치사(致仕)하자 첨의령을 가자하고 상락군개국공의 공작 작위와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내렸다. 89세에 개경에서 훙서하니 유언 때문에 묘소를 고향 안동에 모시고 왕명으로 충렬왕과 같은 ‘충렬’로 시호를 내리고 신도비를 세우라 명했다. 숭의전에 위패가 모셔져 있고, 물계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1. 김방경을 기려야 하는 이유
1) 청렴(淸廉)
역사 인물의 정직과 근검은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로 돌아온다. 눈부신 권력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김방경은 1244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창(右倉)을 감사하면서, 청탁을 거절했다. 어떤 재상이 감찰어사(監察御史) 김방경(金方慶)에게 힐책하여 말하길, “지금의 어사(御史)는 지난번 어사가 한 봉공(奉公)만 못 하다.”라고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지난번 어사처럼 하고자 하면 나도 또한 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창고를 축낼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헐뜯었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겼다.
1265년 김방경(金方慶)이 진봉사(進奉使)로 몽골에 사행을 다녀오면서 남은 노잣돈과 물품들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국고에 반납하였다.
2) 애민(愛民)
몽골의 침략이 끝난 후에도 많은 고려인이 공물 또는 인질로, 혹은 납치되어 원나라로 끌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김방경이 원나라에 사행 갔을 때, 마침 한 고려 여인과 그녀의 어린 아들이 비참하게 사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인은 몽골군에게 끌려가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고향인 고려로 돌아갈 길은 막막한 상태였다.
김방경은 해당 지역 총관부 관리에게 이 모자가 고려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 문서를 발급받게 하고, 사비로 음식과 수레를 제공하여 먼 길을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 여인은 김방경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인 강원도 명주(현 강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79세의 고령이었는데, 오랫동안 생사를 알지 못했던 딸을 보자 너무 기쁜 나머지 갑자기 졸도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진도에서 삼별초를 진압한 후, 고려 출신 몽골 장수 홍다구는 포로들을 몽골로 끌고 가거나 죽이려 했다. 김방경은 삼별초의 핵심 지도부를 제외한 일반 병사와 백성들에 대해서는 "협박에 못 이겨 가담한 백성일 뿐"이라며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왕과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 끝까지 방어막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방경은 "포로를 몰래 풀어주고 재물을 빼돌렸다"는 홍다구의 시기와 무고를 받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국민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일화들은 김방경이 단순히 전쟁을 지휘하는 무장이나 외교관을 넘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원나라에 끌려간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삶 속에서, 김방경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경을 넘어 동족을 구제하려는 인도적인 노력을 실천했다. 이는 그의 애민(愛民) 사상을 가장 따뜻하게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외교(外交)
김방경은 원 간섭기에 사신으로서 그의 외교 활동은 원나라의 군사 요구에 응하면서도 고려군의 위상과 독자성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외교적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며 약소국 고려의 국익을 지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1차(1274년) 및 2차(1281년) 일본 정벌 당시 고려군 도원수로서 여몽 연합군의 지휘를 맡았으나 태풍에 의해 실패의 책임 문제로 원나라의 탄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뛰어난 지략과 당당한 태도로 위기를 극복했다.
김방경은 무력 충돌 없이 외교적 능력과 논리를 통해 원나라의 군사적 압박을 견제하고, 고려 왕도(개경)의 안정을 지켜냄으로써 백성들의 불안과 피해를 막았다.
“원군이 대동강을 넘으면 왕정(개성)이 스스로 소란해져서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넘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니, 쿠빌라이 칸은 김방경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나라 군대는 대동강을 건너지 말라는 조서(詔書)를 내렸고, 몽가독의 남진 시도는 중지되었다.”
이 사건은 김방경이 원나라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국가 보존에 대한 고려의 주권과 안정을 지키려 했던 지혜로운 외교관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일본 원정 이후에도 그는 성절사 등 원나라를 수차례 왕래하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고려의 뜻을 쿠빌라이 칸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고려의 자주적인 국정을 원나라에 설득하고, 원나라의 간섭을 줄이려는 충렬왕의 외교 노선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한 것이다.
1278년 홍다구(洪茶丘)의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원나라의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나라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씌워진 '원나라 모반' 혐의를 결코 거짓으로 자백하지 않았다. 이는 개인의 안위보다 고려의 국익을 우선시한 그의 강직한 외교적 신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방경의 외교적 평가]
김방경은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충직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원나라 고위층에게도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여몽 관계 속에서, 외교관으로서의 강단과 지혜를 발휘하여 고려의 국난을 헤쳐나가고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던 문무겸전의 외교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치수(治水)
➀서북면 위도(葦島) 간척 및 치수 (1248년)
몽골군의 침략이 심해지자, 당시 서북면 병마 판관이었던 김방경은 백성들을 위도(葦島, 갈대섬)로 옮겨 방어했다. 위도는 조수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던 땅이었으나 백성들을 동원하여 제방(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농지(간척지)를 만들어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 사업은 농지조성 목적의 간척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려 시대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➁ 강화도 둔전 조성 간척 (1256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상태에서, 병란으로 인해 조세(租稅) 수입이 크게 줄었다. 이에 군대 주둔 및 국가 경비 보충을 위한 둔전 확보가 중요해졌다. 김방경은 문무관을 동원하여 제포(梯浦)와 와포(瓦浦)에 둑을 쌓아 좌둔전(左屯田)을 만들었다. 또한 이포(狸浦)와 초포(草浦)에도 둑을 쌓아 우둔전(右屯田)을 설치했다. 이는 군량미 자급을 위한 강화도 방어 체제의 일환이자, 국가 주도의 간척사업을 시행한 기록이다.
➂ 밀양 수산제 개축 (1279년경)
그는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등 기존의 대형 저수지 시설을 개축하고 보수하는 사업에도 관여했다. 이는 주로 일본 원정(여몽 연합군) 준비 등 군대 지휘 활동과 연계되어 군량 조달을 목적으로 수리 시설을 정비했다.
[김방경의 수리사업 평가]
백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치수 및 간척사업은 그의 강직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책임감과 애민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몽골 침입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백성들의 생존과 국가 방어에 필수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롭고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했다.
북계(강화도의 북쪽을 의미)에 있는 위도(葦島)에 10여 리의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있었지만, 바닷물이 흘러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경작하는 자가 없었는데, 병마판관 김방경(金方慶)이 영을 내려 여기에 방죽을 쌓아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처음에 백성들이 매우 힘들어했지만, 가을의 큰 풍년에 힘입어 생기가 돌았다.
또한, 김방경이 위도와 강화도에서 행한 간척사업은 한국 농업사에서 국가 주도 간척사업의 시초로서 경제사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5) 병비(兵備)
김방경(金方慶)은 몽골 침입이라는 격변기에 고려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정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행정가로서, 군사적 방어와 공격뿐만 아니라 군량 확보와 병제 정비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김방경의 병비는 주로 대몽 항쟁과 삼별초 진압, 그리고 일본 원정이라는 세 가지 대외적 과제에 대응하며 이루어졌다.
➀ 몽골군의 기동력에 맞서 섬(위도)으로 병력과 백성을 옮겨 방어하며, 장기 항전에 대비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수지를 파고 간척 제방을 쌓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➁ 삼별초 진압을 통한 군 기강 확립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의 강화를 결정하자,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거점을 옮기며 항전했다. 김방경은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가 되어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삼별초 진압을 총지휘했다.
김방경은 진도와 제주도의 역적 삼별초를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고려군의 병권을 재정비하고 중앙집권적 군사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군 기강을 어지럽히는 부하를 엄벌하는 등 군율을 철저히 세웠다.
➂ 여원연합군 군비 총괄
김방경은 1차(1274년) 및 2차(1281년) 일본 정벌 시, 고려국 도원수를 맡아 고려군을 총 지휘하며 전함을 건조하여, 1차 정벌 실패 후에는 원나라식보다는 해상 전투에 강한 고려식 전함을 건조하도록 주장하여 고려의 해상 방어 능력을 간접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김방경은 원나라 측 지휘관인 홍다구 등과 협력 및 갈등을 겪으면서도, 고려군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군사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2. 김방경의 후대 평가
1)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고려 때 문신이자 학자인 이승휴는 “우리 상락공과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가서는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은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大道)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라고 〈단모부(旦暮賦)〉를 지어 칭송하였다.
2) 원감국사(圓鑑國師) 석복암(釋宓菴)
<도원수 김 시중을 축수한 소(疏)>에서 성스러운 시대에 걸출한 인물로 나시어 불법(佛法)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교화가 있어 그 이치를 통달하였으며, 제갈공명이 촉(蜀) 땅을 나올 때와 같고, 왕준(王濬)이 오(吳)나라를 정벌한 일보다 위대하다고 칭송했다.
3) 《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 고려사 저자의 평가에서는 "김방경은 사람됨이 엄숙하고 너그러웠으며,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는 나라의 환란을 당해 분연히 일어나 공을 세웠으니, 고려의 사직을 지킨 공로가 그보다 큰 이가 없다." 조선 건국 세력은 고려의 부패를 비판하면서도 김방경의 개인적 도덕성과 구국(救國)의 공로만큼은 훌륭한 재상의 표본으로 높이 평가했다.
4)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조선시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는 《해동명장전》을 통해 “고려 오백 년 사이에 거란, 몽골, 홍건적 등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고 그때마다 의인(義人)이 나와 대응하였으니 태사 강감찬(姜邯贊)과 상락 김방경(金方慶) 등은 그중에서도 걸출하게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술회했다.
5)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김방경이 일본 원정 당시 억울한 모함을 받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은 기개를 높이 샀다. 그는 김방경을 "환란 속에서도 변치 않는 충절을 지킨 인물"로 꼽으며 선비들이 본받아야 할 지조의 상징으로 여겼다.
6)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근대 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김방경을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민족의 명예를 회복한 5인의 위인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높이 찬양했다. 신채호 선생 외에도 여러 독립운동가는 김방경을 '외세(원나라)의 간섭 속에서도 실력을 길러 나라를 보존한 지혜로운 영웅'으로 보았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실력을 키우고 자주성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모델이 되었다.
7) 물재(勿齋) 송순기(宋淳夔)
언론인 송순기는 <고려의 대인물 김방경을 논함>이란 서술에서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넘어, 학문적 깊이와 체계를 갖추고, 다양한 분야와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폭넓은 경험과 견문을 지닌 분이라 하여 <박학광문(博學廣聞)>, 지식과 지혜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다지다능(多知多能)>,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을 넘어, 글 속에 담긴 사상이나 철학, 예술성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을 갖추었다며 <문장대가(文章大家)>,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대지대려(大智大慮)>”로 사자성어를 들어 김방경을 찬양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은 한국 역사의 인물사를 정리한 저서에서 김방경을 “항쟁과 굴종 사이를 오간 고려의 버팀목”이라고 정의하였고, 역사학자 민현구(閔賢九) 고려대 명예교수는“ 삼별초의 대몽 항쟁이 몽골의 침입에 대응한 자세는 일반적인 관점이며, 고려 정부를 지켜내기 위한 김방경의 자세를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타당한 이론이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밖에도 현대 역사학계의 조명은, 김방경을 '현실적 자주론자' 이며 '가장 현실적인 애국자'로 평가했다. “무모한 항전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기보다, 원나라와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고려의 체제를 유지한 '실질적 자주'를 실현했다”라는 점이다.
김방경은 단순한 무장(武將)을 넘어 경제(간척), 기술(조선), 외교(쿠빌라이 설득), 복지(포로 구제)를 아우른 '융합형 리더'였다. 특히 억울한 모함(홍다구의 무고)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던 그의 당당함은 오늘날 공직자와 리더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 |
김영환 |
|---|---|
| 작성일 |
제3자적 관점에서 정확하고 몀료하게 상락공 김방경에 대해 글을 써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연님의 댓글
![]() |
김태연 |
|---|---|
| 작성일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