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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역문] 교관 김공 묘갈명 갑신 - 미암 김대래 / 약천 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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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6-04-22 15:55 조회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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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교관 김공 묘갈명 갑신 - 김대래 / 약천 남구만

 

 

우리 세종대왕이 즉위한 지 26년 되던 해에 상은 아직 궁중을 나가지 않은 여러 종친들을 위해서 스승을 가려 뽑아 미리 기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명해서 인물을 신중히 선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모두들 말하기를 생원으로 성은 김()이고 이름이 대래(大來)인 자가 있는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이름이 조정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다시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니, 이에 교관(敎官)으로 불렀다.

공은 이때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개산(蓋山) 아래에 있었는바, 모부인을 모실 적에 뜻을 받들고 물건으로 봉양함에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밖의 일은 사모하지 않았다.

공이 왕명에 따라 입조하자, 상이 말하시기를 내 그대가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줄을 아니, 멀리 어버이를 떠나 벼슬하게 된다면 어찌 날짜를 아끼는 정()이 없겠는가. 역말을 타고 돌아가 모친을 맞이해 오라.” 하였다. 공이 이에 역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곱게 꾸민 가마를 받들고 길에 올라 오고 가는 행차가 찬란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많이 시장(詩章)을 지어 주었는바, 성공 삼문(成公三問)의 시에

공과 같은 분 끝내 초야에 버릴 수 있겠는가 / 如公可使終野遺

예로 발탁하여 종영의 스승을 삼으셨네 / 以禮擢爲宗英師

우는 말 하루 아침 구름 속의 궁궐문에 들어오니 / 鳴騶一朝入雲扃

아들이 어머니 뒤를 따라 사마를 달리네 / 兒隨母後駟馬馳

라고 하였으며, 박공 팽년(朴公彭年)은 공과 동방(同榜)에 합격한 분의 자제로 또 시권(詩卷)의 서()를 지을 적에 공이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효성이 독실하며 은총을 골고루 받은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는 두 분의 시와 서문을 보면 증험하여 믿을 수 있다. 그 후의 일로 말하면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어서 기록할 수가 없다.

공의 묘소는 결성현(結城縣) 벽지산(碧池山) 은하봉(銀河峯) 아래 어령리(魚寧里) 갑좌(甲坐)의 산에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현()과 진()인데, 현의 7대손 흥구(興九)와 하구(夏九)는 아직도 공의 묘소를 지키면서 때맞춰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린다. 진은 벼슬이 정평 부사(定平府使)이고, 아들 인상(麟祥)은 강원도 철원부(鐵原府)로 이사하였는데 벼슬이 예조 정랑으로 판교(判校)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인()은 벼슬이 병조 정랑으로 승지에 추증되었고, 아들 지사(地四)는 일찍 죽었는바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지사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름이 응하(應河)와 응해(應海)인데, 응하는 광해군 무오년(1618)에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있다가 건주(建州)를 정벌할 적에 종군하였는바, 두 원수(元帥)는 살아서 항복하였으나 공은 홀로 싸우다가 죽으니, 절의(節義)가 천하에 드러났다. 이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표창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으며, 용만(龍灣 의주(義州) )에 사당을 세웠다. 응해는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다.

충무공의 아들 익련(益鍊)과 손자 세귀(世龜)는 모두 수사(水使)이고, 증손 중우(重禹)는 충무공의 제사를 받든다 하여 조정에서 대대로 이어가는 상을 내려 지금 벼슬이 판관이고, 중기(重器)는 총융사(摠戎使)이다. 응해의 손자 세익(世翊)은 한성부 좌윤이고, 증손 중원(重元)은 병사이고 중삼(重三)은 수사이고 중구(重九)는 영장(營將)이다.

우리 조선조에는 세종의 정치가 가장 훌륭하여 수많은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종영(宗英)의 스승을 뽑을 적에 여러 사람들이 공을 천거하여 맡겼으며, 역말을 달려 돌아가 어머니를 가마로 모시고 와서 서울에서 녹봉으로 봉양함에 이르러는 특별한 영화와 남다른 예우가 실로 전대에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높은 인품과 뛰어난 학행을 백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만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쌓아 놓은 경사와 남은 아름다움이 충무공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서, 다만 일시적으로 그 문호를 번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수의 가문에 장수가 배출되어 부절을 잡고 병마를 호령하여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으니, 복록의 유구함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공은 신라의 국성(國姓)이니, 고려 때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에 이르러 관향을 안동(安東)으로 옮겼다. 고조는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휘 승용(承用)이고, 증조는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인 휘 구()이고, 조고는 밀직부사 휘 천순(天順)이며, 선고는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된 휘 담()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입신양명은 / 立身揚名

굳이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 不必在高位

오직 효도와 학문이라오 / 惟孝惟學

후손에게 넉넉한 복을 남김은 / 垂裕後昆

근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 不但在近代

멀수록 더욱 빛나도다 / 愈遠愈焯

지금 사람들 / 凡今之人

만일 이것을 믿지 못하거든 / 如不信者

이 명문을 보라 / 請視斯銘

 

공에게 증거할 수 있으리라 / 於公徵也

 

5. 敎官金公墓碣銘 甲申

維我世宗大王二十六年上爲未出閤諸宗豫養擇師命集賢殿愼簡其人咸曰有生員金其姓大來其名者學問旣精又以孝登名于朝上又議于承政院皆曰可於是以敎官召之公在忠淸道結城 縣蓋山下奉母夫人專心於志物之養無慕乎其外及膺命入朝上曰予知某孝親離違從宦能無愛日之情乎其傳歸迎母公於是以馹還家奉雕軒登途往來有煒一時榮之朝廷賢士大夫多贈以詩章成公三問詩有云如公可使終野遺以禮擢爲宗英師鳴騶一朝入雲扃兒隨母後駟馬馳朴公彭年以公同年子又作詩卷序備言公窮經篤孝備承恩寵之實此則得於二公詩若序可以徵信乃若其後事傳聞不及無從而記焉公墓在本縣碧池山銀河峯下魚寧里負甲之原公有二子曰鉉曰鎭鉉之七代 孫興九夏九尙守公丘墓時奉香火鎭官定平府使子麟祥徙于江原道鐵原府官禮曹正郞贈判校子軔官兵曹正郞贈承旨子地四早歿贈戶曹參判有二子曰應河應海應河光海戊午以宣川郡守從征建州二元帥生降而獨戰死節義暴於天下事具載忠烈錄褒贈領議政諡忠武立祠龍灣應海御營大將忠武之子益鍊孫世龜並水使曾孫重禹以奉忠武祀朝家推延世之賞今官判官重器摠戎使應海孫世翊漢城府左尹曾孫重元兵使重三水使重九營將維我朝世廟之治爲極盛藹藹吉士盈于朝廷而宗英之師之選僉擧公而屬之至若馳馹輦母養以祿于京中其殊榮異數實前世之所未有然則公之人品之高學行之卓百載之下猶可想見而似續之不大顯久矣積慶餘休及忠武始發不但一時大其門戶而已將門出將擁節旄列棨戟累累而未艾福祿之悠長伊誰之自也公新羅國姓至高麗上洛公方慶移籍安東高祖寶文閣大提學諱承用曾祖監察司掌令諱玖祖密直副使諱天順考通禮門奉禮郞贈戶曹佐郞諱談銘曰

立身揚名不必在高位惟孝惟學垂裕後昆不但在近代愈遠愈焯凡今之人如不信者請視斯銘於公徵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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