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중에 잘 못 알려진 사실들(2007.8.22.영환(문) 제공)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11-10-26 15:43 조회1,412회 댓글0건본문
2007년 안동김씨여름캠프 학술발표자료
우리 문중에 잘 못 알려진 사실들
-안사연이 밝혀낸 자료를 중심으로-
발표자 김 영 환 (충렬공 21대손. 문온공 17대손 016-363-0543)
1.충렬공 묘소의 실전시기
2.충렬공 묘소를 되찾은 시기
3.충렬공 신도비의 건립시기 및 실전시기
4.충렬공의 알려지지 않은 글
5.충렬공의 최종 관직명
6.비조(휘 알지)의 관직명
안 동 김 씨 사 이 버 학 술 연 구 회
우리문중에 잘못 알려진 사실을 중심으로 -안사연이 밝힌 자료 -
1,충렬공 묘소의 실전시기
충렬공의 묘소와 신도비는 임진왜란때 파괴되어 실전되었다?
우리 일부 문중어르신들께서는 충렬공의 묘소와 신도비가 임진왜란때 파괴되어 실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사연이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충렬공묘소의 실전 시기는 임진왜란 때가 아니고 임진왜란
약 90 여년 전 쯤으로 확인 됩니다.
임진왜란전 가장 가까운 기록을 살펴겠습니다.
현존하고 있는 묘비석(현재 충렬공 묘소 왼쪽에 마모된 비석- 오른쪽에는 마모된 비문을 다시 새겨놓은 비석이 있음)은
벽오 이시발선생께서 지으신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미대동보에 있는 번역문을 보면
[... 묘는 예안 서쪽 지례촌에 있으며 신도비는 옛날 고려왕이 세운 것으로 세월이 오래되어 실징할 수 없고
성손 예생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비석을 세워 표지를 하였더니 이제 이 비석까지 부러져 버렸으니
아!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공의 묘소인줄 알 수 있을까 ]
윗글로 보아 충렬공 후손 김예생이 예안현감으로 오셨을때 비석을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예생의 예안현감 재임기록을 찾아보면 예안향교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전략..김예생) : 통선랑(通善郞),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 체직,
송사 처결이 오직 명확하고 동헌(東軒)과 남청(南廳)을 구축함.
--<후략>--
이로 미루어 보아 김예생 선조님이 세운 비석은 예안현감으로 마지막으로 계신 1498년(연산군1년)까지는 보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후 어느 때부터 실전되어 되찾은 1594년 충렬공묘소를 디시 찾기까지 최대한으로
계산해도 96년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김예생 선조님은 문온공의 현손(문온공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이십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문은 홈페이지 자료실에 [충렬공(忠烈公) 묘소(墓所) 실전(失傳) 시기(時期)에 관한 고찰(考察)(2004. 4. 2. 학술발표회 자료. 윤만(문) 제공] 실려 있습니다.
|
2.충렬공묘소의 실전후 되찾은 시기
충렬공의 묘소를 되찾은 시기는 1594년이 틀림이 없습니다.
문중 전설에 의하면 현 충렬공묘소 위에 있는 광산김씨 김효로공의 장사때 찾았다고 하나
여러 가지 증빙자료에 의하면 김효로공의 후손인 근시재 김해(金垓 - 광산인)의 장례(1594년-김해는 1593년 12월에
죽어 1594년 봄에 장사지냄)때 발견된 것이 김해의 묘지명과 그의 자손들의 문집및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족보에도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족보내 충렬공 묘소 발견과 관련한 내용 발췌>
가. 인용 문헌 출전 : 안동김씨 제학공 파보 13P. 충렬공 조.
나. 출판년도 : 1990.
다. 내용
--<전략>-- 墓所 舊譜云 安東府禮安縣 時 禮安爲安東屬縣. 而失傳二百年 萬曆甲午 始尋瑩域. 麗王所爲神道碑 姓孫禮生 所竪碣 破折. 壬寅 改封立碑. 天啓丙寅 十二世孫時讓 按節本道 以失墓時 故翰林金垓之塚 逼近犯葬 啓請掘移 且以 床石狹小 改備. 姓孫 尙璘 議置墓田定以十月上旬 每歲享祠
라. 해석문
묘소는 옛 족보에 이르기를, "안동부 예안현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때 예안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만력 갑오(1594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천계 병인(1626년)에 12세손인 시양(時讓)이 본도(경상도) 안절사(관찰사)로 와서 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 해(金垓 - 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 몰래 장사지냄)해 있었으므로 묘를 파내어 옮기도록 요청하였고, 또한 상석이 협소하여 다시 설비하였다.
후손 상린(尙璘)은 의논하여 묘전(墓田)을 설치하였고 10월 상순에 매년 향사하기로 정하였다.
《출전 : 안동김씨 홈페이지, 작성자 : 김항용, 작성일 : 2002/09/17 15:43》
위 내용은 1880년 경진보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윗 족보상의 200년간 실전되었다는 기록도 100여년간 실전되었었다고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3. 충렬공 신도비의 건립 및 실전시기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충렬공의 신도비가 왕명으로 세워졌는데 그 후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옛 일본정벌에
앙심을 품고 깨뜨려 묻었다] 라고 전해집니다.
1971년에 이병도박사가 찬하여 세운 신도비에도 ....公(공)의 옛 神道碑(신도비)가 不幸(불행)히도 壬辰倭亂(임진왜란)에 毁損遺失(훼손유실)되어 .....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러 문중의 전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선 신도비가 언제 건립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 충선왕때 그를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하였으며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라고 분명히 있고. 충렬공의 행장에도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라고 되어
있으니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틀림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는 우리나나에서 최초로 세워진 신도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현재 전해오지 않아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그러면 과연 언제 없어졌을까요? 전해오는 이야기대로 임진왜란 때 일본 놈들이 훼손하여 없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충렬공의 묘소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2년후
1594년에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도비가 임진왜란 당시까지 있었다면 실전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도비는 묘소 바로 앞에 세우지 않고 묘소 입구에 좀 떨어진 곳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므로 신도비는
임진왜란 당시까지 존재 했으리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란 후 1602년 묘비를 세우면서 묘비명을
벽오 이시발선생이 쓰셨으며 현재 마모된 상태로 묘소 오른쪽에 있으며 이를 1966년 오은공문중(안렴사공파문중)에서
그 글을 그대로 옮겨서 김사옥씨의 글씨로 묘소 왼쪽에 세웠습니다. 만약 신도비가 임진왜란때까지 있었다면
당연히 이 묘비문에 그 사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과 임란 발발 후 10년이 지나지 않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묘비의 기록를 보면....[..... 성손 예생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비석을 세워 표지를 하였더니 이제 이 비석까지
부러져 버렸으니 아!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공의 묘소인줄 알 수 있을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비문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이미 신도비는 없었고 임란 훨신 이전에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일찍이 없어져다면 언제쯤일까 추정해봅니다.
우리나라 지리지에는 오래된 순서대로 보면 1454년(단종2년)에 에 간행된 세종실록에 각도의 연혁 물산, 고적, 지형등를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 성종때 노사신등이 지은 사찰, 고적, 누정, 제영등을 실은 동국여지승람, 중종때 이행등이
왕명에 따라 동국여지승람을 다시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지리지에 당시 충렬공 신도비가
존재했다면 기록이 있음직도 한데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세종 이전 조선초나 고려말에 없어진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이는 그런 사유로 추정할 뿐이지 명확한 것은 아님을 밝혀 둡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