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譜牒에 登載되지 않은 文獻과 선조님(2006. 2. 24. 재철(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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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6:06 조회1,386회 댓글0건본문
우리 譜牒에 登載되지 않은 文獻과 선조님
1. 新羅三性淵源譜
侍郞公 叔承(淑)子 - 習敦 - 相國 - 正林 - 근 - 富倫
天兢
- 元康 - 文雄 - 日兢 - 利請 - 義華 - 敏成
大同譜 140面 世系考異
叔承 子 - 習敦 - 相國 - 正林 - 근 - 富倫
- 位言 - 利請 - 義華 - 瞻 - 敏成
이상을 상고한즉, 장자 습돈 이하의 차이가 없고 차자 이하에만 착오 가 있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며 아무 근거 없이 이 문헌이 부합 되겠는가. 경주김씨와 안동김씨 세계비교표와 敬順王이하 承用公 사이의 연대 대조표를 고찰.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상고 하여야 할 것이다.
2. 敬順王 誕降日 882年 壬寅4月6日生
911年 朴破娑王女 25세 竹房夫人과 婚姻 生3男1女
927年 견훤왕도 침입 景哀王 弑害 敬順大王 卽位
835年 侍郞金封休로 하여금 王建에게 遜國에 관한 國書傳達
935年 11月 22日 王建妃 神明順成王太后女 樂郞公主와 婚姻
3. 大安君 殷說 937年 大安君 殷說出生
978年4月4日 松都 柳花宮에서 薨 하심, 壽97세
1024年 大安君 殷說辭職
配 全州李氏 父 工部 侍郞 義興君贍
卒 1028 壽 92세
4. 侍郞公 孝恭(敞) 1212年3月 고시합격, 文科 薦擧, 1243年 4月 考試官,
1256年 2月 乙丑日 卒
우리와의 연관 사료
5. 金宣平 901年(辛酉)에 新羅52代 孝恭王 官殿인 興德官에서 誕生
926年(丙戌)에 古昌城主로 就任
930年 正月에 高麗國 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을
除授하였고 古昌郡을 安東郡으로 昇格하였다.
6. 開國公爵 忠烈公
문헌이 방대하여 여기에 등재하지 못하고 별도 공개하여 大宗會에 제공함.
7. 文英公 金恂
문헌이 방대하여 여기에 등재하지 못하고 별도 공개하여 文英公 宗會 또는 大宗會에 제공함.
본관의 근원
사람의 생활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혈연과 지연으로 얽혀있다. 성이 부계의 혈연을 나타내면서 시간상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보여준다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정착하였던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냄으로 공간상의 지명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성과 본관이 같다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부계 친족의 친근성과 밀접해진다. 여기에서 성과 본관의 상관관계를 열거하면 同姓同本 ․ 同姓異本 ․ 異姓同本 ․ 異姓異本의 경우가 있다.
본래 성씨와 본관 제도는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써 대두되었기 때문에 왕실귀족, 일반 지배계급, 양민, 천민 순으로 수용되어왔다. 우리나라의 성씨와 본관제도는 중국의 것을 수용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신라말기부터 고려초기로 생각된다. 신라 眞骨의 3성 朴, 昔, 金과 六頭品階의 6성 李, 崔, 鄭, 孫, 裴, 薛 등의 성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 와서는 지배층과 일반에게도 성이 보급되는 동시에 본관제도가 정착되었다.
이에 우리 안동김씨 본관의 근원을 살펴보면 관조에 관하여 여러 갈래의 의문점을 나타내고 있다.
安東金氏 貫祖에 대한 의문점
叔承公 工部侍郞平章事 自公 始封安東
大譜篇을 살펴보면, 敬順王의 孫子이시며 대안군의 子이신 叔承公 께서는 工部侍郞平章事를 지내셨으니 根據地가 開京이었을 것이며 안동과는 아무 연관이 없을 것으로 여겨짐.
日兢, 金紫光祿大夫 尙書 右僕射 三韓功臣 太師大匡
朝鮮氏族統譜 云 安東金氏 始祖 日兢
利請, 上洛君 一云 安東太守 公居 古寧 卽安東也
輿地勝覽 本府 人物記 世載 名德 受籍 安東自公始
註. 이청공께서 안동태수를 지내셨고 상락군으로 봉하여 졌으니,
안동이 연고지가 되어 수적한 것으로 여겨짐.
方慶,
1. 大安君墓碣 전면 내용 일부(대보 137면)
김씨가 籍을 경주로 함은 鷄林君 諱 稇을 始祖로 한 것이고 籍을 안동으로 함은 上洛公 諱 方慶을 始祖로 한 것이니 모두가 公의 후손들이다.
2. 己未譜 우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와서 고려 上洛 충렬공에 이르러 비로소 안동으로 분적 되었다.
3. 上洛公으로 중시조로 삼는 것은 안동으로 관적을 하였기 때문에 上洛公으로 시작된 것이다.
안동김씨의 관조에 관하여, 처음으로 안동태수로 안동에 정착하신 利請公 을 관조로 보는 것에 심증은 가지만 여기에는 여러 갈래의 의아심이 있다. 우리 문중의 어느 파에서는 비석문에 휘 利請公께서 안동 태수로서 안동의 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인에게도 심증은 가지만 우리 관조는 叔承公으로 받들고 있으니 자기의 심증이나 또는 派의 중의라고 하여 대보에 기록된 관조를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정당화 하려면 대종회의 이사회의 또는 총회에 부의하여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가부는 결정에 따를 것이로되 선현들께서 기록에 남긴 문헌을 이제 와서 아무 고증 없이 개정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오니 문중 재현께서는 이에 혼동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며 간략하게 전말을 서술하여 후세 명현들의 참고에 기하고자 하는 바이다.
안동김씨에서 분관된 성씨 중 대보에 등재되지 않은 성씨
1. 求禮 金氏 대제학공파
시조 평장사공 숙승 - 중시조 상락군 개국공 방경 - 판서 愃 -
대제학 承用 - 평리 厚 - 군사공 七陽 - 求禮 金氏
求禮 金氏 족보에 등재
가. 중시조 상락군 개국공 김방경의 묘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 사진
나. 문영공 김순의 단소 (안양시 관양동 산록) 사진
다. 충렬공 김방경 존영 문관복, 무관복 사진
라. 익원공 김사형의 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사진
註. 구례 김씨는 시조가 金斗南으로 경순왕의 아들 金殷說의 7세손 김방경 후손이라 하며, 고려조 求禮 太守를 지냈다. 1985년 당시 충북, 제주도를 제외한 각지에 86명이 산거한 것으로 집계 되었다.
2. 海州 金氏 金文東派
海州 金氏는 二派가 있는데, 그 중 一派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말에 안렴사를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에 은거했던 金士廉을 遠祖로 하고, 조선조에서 全羅 都事를 지낸 金文東을 중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世系表 金文東系
遠祖 金士廉 (梧隱公) - 一世祖 文東 (都事公) - 佑漢 - 鉉
- 鼎斗(縣監)
- 鼎(判書)
3. 稷山 金氏 稷山派 叔承 十三世 理生 1930년 국세조사 함경북도 明川 17家口 생존.
按廉使公 19代孫 在哲(容辰)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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