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하담 김시양 선조님의 유배길을 따라서-임자일기(10)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5-03-15 20:42 조회1,687회 댓글0건

본문

  20일.  (상감께서)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알았노라. 김정목(金庭睦)은 이미 갇혀졌으니, 윤효선(尹孝先)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하셨다.
  윤(尹)은 공사(供辭)에서 대략 말하기를,
「신(臣)은 김시언(金時言)이 집어준 학림옥로(鶴林玉露)를 펴서 읽어보니 사로안유시멸유(四老安劉是滅劉)의 논이 있기에, 그 말의 뜻이 이치에 어긋나서 아주 이상하기에 시관(試官)과 더불어 얘기하며 말하기를,  “천지간에 어찌 이와 같이 무리한 논이 있겠는가.”하자, 시언(時言)은 말하기를,  “아주 색다르다. 이는 논제(論題)로 할 만한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험장에서 출제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제(改題)하고 난 후에, 시언(時言)이 다시 학림옥로(鶴林玉露)를 펴서 새로 보는 말을 제(題)로 삼아 낸 것입니다. 신(臣)들은 그 뜻에 대해 반대로 논할 것으로 여겼지, 그 말이 시사에 가깝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생이 변설(辨說)을 하고 난 다음에야 사악한 길에 들게 되리라는 유생(儒生)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명사직서(命史直書)의 제(題)에 이르러서는 김정목(金庭睦)이 강감대성(綱鑑大成)을 보고 다른 시관(試官)과 상의하여 낸 것이고, 신(臣)역시 다시 자세히 생각하지 못하고 덤덤히 논해 볼 만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이외에 다시 무슨 정황이 있겠습니까. 운운」하였다.
  위관(委官)이 회계(回啓)하며 말하기를,
「효선(孝先)의 공사(供辭)와 시언(時言)등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다름없이 같고, 세 사람이 공술 하는 바가 모두 전지(傳旨)에 말씀하신 사연에 범한 바가 없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말에 모두 이 범한 것이 무심히 망령되게 짓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은 즉, 비록 지만(遲晩-조사 받을 때 오래 끌며 속여 미안하다는 뜻의 자복)하는 말이 없다해도 그 실상은 이미 승복을 한 것입니다. 신(臣)들은 단죄를 의논하여 집행하려는 바이나 역시 정황이 있었는지, 정황이 없었는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정황이 있었다고 여기면 죄는 대벽(大辟-死刑)에 관계되고, 정황이 없었다고 여기면 실로 망령 된 짓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臣)등이 보는 바는 이미 전후의 계사(啓辭)에서 죄다 하여서 오직 상감의 재단에 있을 뿐입니다」고 하였다.
  (상감께서)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참작하여 의논하여 계(啓)하라」고 하셨다.
  위관(委官)이 회계(回啓)하며 말하기를,
「과장(科場)의 격식이 지극히 존엄하고도 지극히 기밀스러운데, 시인(詩人)이란 읊을 때에 주로 해학하기를 잘함이 많습니다. 고시(考試)에 출제(出題)함에는 당연히 명백하고 정확하게 사실에 근거한 것을 제(題)로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두목(杜牧)이 역사를 읊은 작품은 모두 실로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신(臣)은 이런 일을 단연코 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태위(太尉-周勃)가 ‘왼쪽 어깨를 풀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시인(詩人)이 한 이 말 때문에 허다한 가짓말[枝辭]을 연출하여 이런 말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설령 두목(杜牧)이 이일을 친히 논했다 하더라도, 그 주장하는 견해는 단연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읊은 가운데 기분이 발산되어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 외에 역사를 읊은 작품들은 이런 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한(漢)의 고조가 황제로 일어나자, 천명(天命)으로 사람들을 귀속시키고, 항우(項羽)는 궁하게 찌그러 들어 이미 필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강동(江東)의 자제(子弟)들은 많은 재주 있는 사람들이 권토중래(捲土重來)할 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이 칠성단(七星壇)에서 바람을 빌었다는 말도 방문(旁門- 정통이 아닌 異端)소설에나 어지럽게 나오지, 역사책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동풍은 주랑(周郞-吳의 周瑜, 赤壁戰 당시 24세이므로 郞이라 했음) 편이 아니던가. 동작대(銅雀臺-魏의 수도 鄴의 三臺 중 가운데 것)에 봄이 깊으니 이교(二喬- 喬公의 두 딸로 절세 미인. 큰 딸은 孫策이, 작은 딸은 周瑜가 받았다)에 녹아나네.(․주: 杜牧의 「赤壁」詩句 四句중 뒤의 二句임)」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두목(杜牧)이 평생동안 역사를 읊은 작품을 미루어 보면 모두가 해학을 잘 했던 것으로 돌릴 수 있지 사실의 말이 못됩니다. 시관(試官)된 자가 명을 받고 선비를 고르는 데서 이 무엇과 같은 행동거지입니까. 그리고 이에 시인(詩人)의 해학이 넘치는 실마리를 걸어 제(題)로 삼아 많은 선비들의 격식으로 삼으려 했으니,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당세(當世­時事)를 나무라 풍자하려고 마음에 둔 논제라고 함에는, 감히 꼭 그렇다고 여기지 못하겠습니다. 세 사람의 공사(供辭)를 살펴보면, 저물어 가는데 찾을 데까지 해보다가 다시 살피지 못하여 여기에 이르러서, 아마 말을 꾸민 게 명사직서(命使直書)에 이르지 않았나 합니다.  말의 뜻은 멸유(滅劉)등의 말과는 비록 대략 경중의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역시 더욱 덤덤하게 하였음을 들지 않을 수 없고, 글자를 보면서 전부 상세함에 이르지 못하고, 그 군색하고 급함 때문에 어찌 어지럽게 집어내어 제(題)로 했는지…
  이 양설(兩說)을 가지고 반복하여 논의를 해 봤는데, 만약 나무라 풍자한 율[譏刺之律]로 시행하면, 아마 불안할 듯 합니다.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이 시사책문(時事策問)을 직접 거론하였다가 많은 인사들의 말이 크게 기피에 저촉되고 난 후, 선비들이 오히려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될까 불안해하였습니다.․주 : 蘇軾이 試館職 때 策問으로 낸 「師仁組之忠厚, 法神考之勵精」으로 洛蜀党爭이 6,7년이나 일어났다
  신(臣)들의 뜻 또한 알지 못해 망령된 짓으로 죄가 된 것으로 여기며, 나무라 풍자함에 그 뜻을 두었다고는 반드시 감히 못 하겠습니다. 마침 의논하여 계(啓)하라는 말씀을 받고 감히 이렇게 아울러 계(啓)합니다」고 하였다.
-오늘 사간(司諫)은 이성(李惺)과 지평(持平) 남이준(南以俊)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