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열전 김방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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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9:01 조회2,097회 댓글0건본문
그 해 가을에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
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
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
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
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
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
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
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
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
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
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
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
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
(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
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
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
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
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
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
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
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
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
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
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
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
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
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추밀 부사 장일(張鎰)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먼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
였으며 그에게 상주국(上柱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의 관직을 주었다.
원년(충렬왕)에 관제를 고치게 되자 그를 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로 임명하
였다.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
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
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
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
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
(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
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흔도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고 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
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 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서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
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김방경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
소?”라고 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들과 유사한
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고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
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
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고 사람들에게 굴복하
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주가 원나라에 공장(工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건축 공사를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는
데 목장 제령(木匠提領) 노인수(盧仁秀)가 큰 나무 한 개를 골라 내어 가지고 암시하는 방법으로 충고하
려고 김방경, 유경(柳璥)과 인후(印候), 장순용(張舜龍)더러 각각 톱을 가지고 나무의 두 끝을 자르게 하
고는 “신하로 된 자들은 응당 이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
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
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
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
기를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석말 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유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유경(柳璥)의 열전에 기
록되어 있다.
일본 정벌의 전역 당시 김선(金侁)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김방경이 위득유(韋得儒)가 자기의 상관 김선
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위득유의 관직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으며 또 낭장 노진의(盧
進義)도 김방경을 따라 진도를 공격하였을 때 힘써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약탈하였기 때문에 김방
경이 그의 재산들을 국가의 것으로 몰수해 버린 일이 있었으며 김복대(金福大)란 자도 역시 당시의 전역
에 김방경을 따라 갔던 자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김방경에게 악감을 품고 있었다.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
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
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
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
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
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
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
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
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
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
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
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
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
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
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
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
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
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
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이에 흔도는 3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석말 천구와 더불어 국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비록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망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마는 하는 수없이 유경, 원부(元傅), 이분희(李汾禧), 한강
(韓康), 이습(李褶)에게 명령하여 흔도, 천구와 더불어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위득유와 함께 연명 고발
한 궁득시(宮得時) 등 4명이 고하기를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위득유가 우리들을 속여 말하기를 ‘여기에 참여하면 너도 다 같이 공
로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우리와 함께 여기에 연명하여 관작과 상품을 받도록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
에 우리가 이름을 연서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글에 고발한 것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득
유가 또 흔도에게 고하기를
“을해년에 김방경이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관군(몽고군)을 모조리 격멸하고
해도에 들어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만일 저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면 그와 대
질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성품이 침묵을 잘 지키는 데다가 분하고 성이 난지라 마치도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다. 유경이 말하기를
“위득유가 이미 여덟 가지 일을 들어 김방경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를 들으니 이
는 더욱 엄중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고발장에다 먼저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여러 죄수들
은 무서워 떨고, 위득유와 노진의 두 사람도 감히 눈을 똑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김천록이 그들을 돌아다
보며 꾸짖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 같은 놈들이다. 진도를 공격할 때 너희들 둘이 군율을 범하였기에 중
찬(中贊-김방경)이 너희들이 훔친 물건들을 몰수하여 국가에다 드린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에 대
한 악감을 품고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있지도 않은 말들을 꾸며내어 대신을 모함하고자 하
니 하늘이 만일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였다. 김복대 등 14명이
또 고하기를
“위득유가 자꾸 꾀이기에 서명하였을 뿐, 우리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더욱 더 고발
이 무근거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갑옷을 감추어 둔 한희유 등 12명의 죄만을 다스려 그들에게 곤장
을 치게 하고 석방하였다.
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 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
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
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
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
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왕이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먼저 번에 내가 흔도와 함께 이미 문초를 다 끝내었는데 하필 다시 문초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다구는 듣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낭가대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다. 왕이 그들과 함께 문초하자
고 하였더니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곧 조정에로 돌아가겠는데 황제께서 만일 고려 일에 관하여 물으면 응당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
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다구도 상당히 휘어 들었었다.
그 후에 다시 문초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을 받들기를 하늘을 받들 듯이 하고 귀국을 사랑하기를 친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
데 어찌 하늘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거슬러 스스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원통하게 죽을지언정 감히 무근거한 고발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홍다구는 반드시 그를 자복
시키려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기 때문에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었으며 죽어 넘어졌다가 다시 살아나
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홍다구는 왕의 측근자들을 가만히 달래기를
“지금 한창 아주 춥고 비, 눈이 그치지 않는 때여서 왕도 역시 심문에 피로하였다. 만일 김방경으로 하여
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며 법에 따라 다만 귀양을 보내게만 될 것이니 고
려를 위해서도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
통을 받고 있느냐?”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
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홍다구는 사람
을 보내 황제에게 무고하기를 “김방경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 갑옷을 감추
어 두고 불칙한 짓을 하려고 꾀하였으니 왕경(개경) 이남의 지리 상 중요한 지대를 골라서 방수군을 두
며 또 여러 주와 군에도 모두 달로화적을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 기타 일가 권속들은 모조리 수도
(북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군량에다 충당하도록 하
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
“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
“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
“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
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득유와 노진의가 또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담선 법회(談禪法會)를 개설하는 것은 귀국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홍다구는 그
말을 천구에게다 전하였고 천구는 사람을 보내 중서성에다 보고케 하였다. 왕도 역시 장군 노영(盧英)을
원나라에 보내 대변케 하였다. 평장 합백(哈伯)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황제께 아뢸 만한 일이 못된다. 그대도 귀국해서 국왕 자신이 직접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
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
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
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
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
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 김방경이 무고하게 죄를 당했다는 것을
해명하였는바 그 글에 이르기를
“위득유, 노진의 등이 흔도에게 김방경이 공주, 국왕,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장차 강화도에 들어가려
한다고 고발하였는바 만일 정말 그러하였다면 위득유는 응당 나에게 먼저 고발했어야 할 것인데 왜 바로
수부(帥府-몽고의 원수부)에다 고발하였겠는가? 흔도가 김방경을 고문하였는데 김방경은 일찍이 어떤
병기도 갑옷도 집에 감추어 둔 것이 없었고 다만 나유 등 41명이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유 등
도 한결같이 ‘김방경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위득유 등이 김방경에 대해서 원
망을 품고 그를 해치려 하여 그러나 봅니다’라고 말하였다. 위득유 등도 한번도 직접 김방경의 반역 음모
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다고 하였다. 다만 정동
(일본 정벌)시에 김방경의 부하들이 군기를 관가에다 납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반역 음모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말을 바꾸어서 김방경이 반역 음모를 두 번이나 이
야기하였다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이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또 위득유 등은 지원 12년(충렬왕 1년) 12월 어느 날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흔도가
나의 방원(房院)을 헐어뜨리고 갔다’고 하면서 반역할 데 대한 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수부(원수
부)의 진무(鎭撫) 야속달(也速達)이 보낸 글을 보건대 흔도는 지원 12년 12월 28일에야 왕경에 도착했고
이듬해 정월 초 3일에 염주로 돌아갔은 즉 위득유는 어디서 12월에 갔다는 말을 끌어내게 되었겠는가?
또 노진의는 지원 12년 4월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은 문 앞에 서서 반역 음모를 말하였다 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에는 김방경이 정방(政房)의 동랑(東廊) 밑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했으니 그 말한 바
가 전후가 다르다. 이로써 볼지라도 그들의 말이 모두 허망하게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흔도가 달로화적과 함께 문초를 하였는데 결국 갑옷을 감추어 두었던 자들만 곤장을 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며 다만 김방경 만은 남겨 두어서 황제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던 것
이다.
홍다구는 또 균지(鈞旨)를 받아 한희유, 안적재(安迪材), 김흔 등을 문초하였는데 그들로 말하면 실제는
나 자신이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마치도 김방경이 제멋대로 파견하여 오목강(吳木江)에서 양곡을
적재하도록 한 것처럼 심문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죽주(竹州) 등 군, 현에서 공, 사의 곡물을 운반
하여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김방경이 저축해 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남(潘南) 등지에 있다는
선박들도 모두 다 종전군인(種田軍人-둔전‘屯田’ 군인)들이 갖추어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김방경의
선박들이라고 하여 억지로 문건을 꾸며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거듭하여 반드시 자백하도록 하려고 한 것
이다. 지금 형세로 보면 사태가 저절로 명백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방경의 목숨이라도 살려
두어 우선 섬에 귀양이라도 보내었다가 황제의 명령 내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 하였더니 황
제는 저간의 사정을 다 알고 김방경으로 하여금 수도에 올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번
에 황제께 올린 글과 달로화적이 보낸 글을 자상히 살펴보고 하나도 빠짐 없이 잘 아뢰어 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위득유와 노진의는 또 ‘담선 법회는 장차 귀국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일으키게 하려고 개설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위득유를 불러다가 이것을 물어 본즉 ‘대정(隊正) 김현(金玄)의 말에 의하면 장차 담
선 법회를 개설하려다가 그만 중지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또 군인(軍) 성일(成一)도 역시 어떤 중이 공주
에게 담선을 하는 것은 귀국에 불리하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주가 성일의 누이 우긴(于緊)에게 옷을 기워
오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그 중에게 상으로 주었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김현에게
물어 보니 그는 ‘위득유가 나를 불러서 담선 법회가 무슨 까닭에 중지되었는가를 묻기에 나는 모른다고
하였고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일에게 물어 보니 그는 ‘나는 노진의
네 집에서 기숙하고 있는데 노진의가 나를 데리고 위득유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위득유가 무슨 다
른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못들었나 라고 묻기에 못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주가 중에게 상을 주었다
는 것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위득유에게 했겠습니까? 또 나에게
만약 누이가 있다면 누이의 집에서 기숙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현과 성일의 말이 모두 이러하다. 게다가 선법(禪法)이란 것은 천하에 모두 행해지는 것으로
서 우리 나라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3백60여 년간이나 대개 3년에 한 번씩 봄철이 되는 첫 달에
법회를 개설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는 위득유, 노진의의 무고로 말미암아 나라 안이 소란스럽
기 때문에 4월달에 개설할까 하고 어물어물 시간을 늦추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위득유는 내가 직접 황제
를 보고 말하게 되면 자기 죄가 더해질까 두려워하여 내가 귀국으로 가는 것을 방해할 셈으로 또다시 허
망한 소리를 달로화적에게 하였고 달로화적은 잘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작스레 보고하였던 것이니 실로
황공한 일이다. 황제에게 잘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중서성의 관원들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크게 웃었다. 10여 일 더 있다가 위득유 역시 혓바닥이 헐어서 죽어 버렸다. 그래서 당
시 사람들이 하늘이 그들의 소행을 미워해서 죽여 버린 것이라고들 하였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
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
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6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리어 정
계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잘 타일러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
다. 겨울에 또다시 연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늙었지마는 세운바 훈공과 업적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경솔하게 벼슬살이
를 그만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황제가 일본 정벌의 명령을 내리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응당
황제에게 말하여 원수를 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훈공도 업적도 없는 자를 황제에게 요
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그 후 또다시 글을 올려 퇴관하려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우승지 조인규(趙仁規)를 보내 중서성에다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마음을 다하여 자기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였고 귀국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근면
하게 일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또 진도, 탐라,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관군을 따라서 토벌에 참
가하여 여러 번 승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호두금패를 주어서 그 공적을 장려하고 위로하
여 주었다. 지금 다시 정군(正軍) 만 명, 수수(水手-뱃군) 1만5천 명을 관할, 인솔하고 일본 정벌에로 떠
나는데 만약 그가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호령이 잘 되지 못하며, 또 혹시 실수를 초래하지 않을
까 염려된다. 김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장한 마음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시금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있으니 황제께 잘 아뢰어 원수부의 성원으로 참가케 하여 사업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
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
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
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
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
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
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
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
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
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
었다.
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
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
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그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주었다.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
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
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
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
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
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
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
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
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
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
(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
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
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
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
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
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라고 하였
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더러 말하기를 “병법에 군대가 천 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
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마는 벌써 적의 지
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
陰-한신)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라고 하니 홀돈이 말하기를 “병
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라고 하였
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
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복형이 유시(流矢-날아 오는 화살)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올라가게 되어 드디어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 침몰되었으며 김선은 물
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도착하여 포로들과 노획한 군기, 병장들을 황제와 왕에게 바쳤다.
왕은 추밀 부사 장일(張鎰)을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먼저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
였으며 그에게 상주국(上柱國)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의 관직을 주었다.
원년(충렬왕)에 관제를 고치게 되자 그를 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로 임명하
였다.
2년에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왕이 중서성에 편지를 보내기를
“나의 신하 김방경은 귀국의 명령을 받들어 진도와 탐라를 공격하여 반적들을 격파하였으며 일본을 정벌
할 때에는 전함들을 수리, 건조하며 군사 위력을 떨침에 있어서도 참으로 그 공로가 많았다. 그러므로 호
두 금패(虎頭金牌)를 주어서 일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격려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폐백을 올리는 예식을 끝내고 궁전으로 올라갔는데 이때 망송유주(亡宋幼主)가 김방경의 뒤에
왔는데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붙잡고 인도하였다. 황제가 유주를 황태자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
예식을 맡은 관리가 김방경과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의 좌석 차례를 결정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말하
기를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
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유주의 조부 항렬이며 또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
(방경)의 윗자리에 앉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김방경의 아랫자리에 앉히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이 있으니 호두금패를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동쪽 나라(고려) 사람으로서 금부(金符)
를 차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김방경이 귀국하게 되니 왕은 서울(개성) 성 밖에 나가서 그를 출영하였다. 흔도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고 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
는 매양 일이 있을 때마다 국왕에게 미루고 국왕은 또 그대에게 밀어 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 군의 관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출정시에는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새 새끼가 그들이 앉은 집 뜨락에 와서 있었는데 흔도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
을 잡으라고 하여 얼마 동안 가지고 희롱하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김방경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
소?”라고 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 두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당신이 그것을 죽인 것은 역시 백성들을 가긍히 여기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흔도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한족들과 유사한
데 매양 우리들을 멸시하면서 ‘몽고 사람들은 그저 살육하는 것을 일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미워
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그
렇게 하는 데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고 사람들에게 굴복하
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주가 원나라에 공장(工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건축 공사를 대규모로 일으키려고 하였는
데 목장 제령(木匠提領) 노인수(盧仁秀)가 큰 나무 한 개를 골라 내어 가지고 암시하는 방법으로 충고하
려고 김방경, 유경(柳璥)과 인후(印候), 장순용(張舜龍)더러 각각 톱을 가지고 나무의 두 끝을 자르게 하
고는 “신하로 된 자들은 응당 이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여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은그릇들은 모
두 새로 주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연회가 끝난 다음에 그것들을 내탕(內帑-국왕의 창고)에다 바치었으
며,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
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투서를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
기를 “제안공 왕숙(齊安公淑)과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이었
다. 그래서 석말 천구가 왕숙과 김방경 등을 가두어 놓고 재상들을 시켜 연합 심문하게 하였는데 유경이
그들의 무죄를 역설하여 구원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유경(柳璥)의 열전에 기
록되어 있다.
일본 정벌의 전역 당시 김선(金侁)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김방경이 위득유(韋得儒)가 자기의 상관 김선
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위득유의 관직을 파면시킨 일이 있었으며 또 낭장 노진의(盧
進義)도 김방경을 따라 진도를 공격하였을 때 힘써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약탈하였기 때문에 김방
경이 그의 재산들을 국가의 것으로 몰수해 버린 일이 있었으며 김복대(金福大)란 자도 역시 당시의 전역
에 김방경을 따라 갔던 자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김방경에게 악감을 품고 있었다.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
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
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
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
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
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
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
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
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
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
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
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
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
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
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
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
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
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
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이에 흔도는 3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석말 천구와 더불어 국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비록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망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마는 하는 수없이 유경, 원부(元傅), 이분희(李汾禧), 한강
(韓康), 이습(李褶)에게 명령하여 흔도, 천구와 더불어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위득유와 함께 연명 고발
한 궁득시(宮得時) 등 4명이 고하기를
“우리는 글자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위득유가 우리들을 속여 말하기를 ‘여기에 참여하면 너도 다 같이 공
로가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우리와 함께 여기에 연명하여 관작과 상품을 받도록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
에 우리가 이름을 연서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글에 고발한 것은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득
유가 또 흔도에게 고하기를
“을해년에 김방경이 저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관군(몽고군)을 모조리 격멸하고
해도에 들어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만일 저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면 그와 대
질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성품이 침묵을 잘 지키는 데다가 분하고 성이 난지라 마치도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다. 유경이 말하기를
“위득유가 이미 여덟 가지 일을 들어 김방경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를 들으니 이
는 더욱 엄중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고발장에다 먼저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여러 죄수들
은 무서워 떨고, 위득유와 노진의 두 사람도 감히 눈을 똑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김천록이 그들을 돌아다
보며 꾸짖기를 “너희들은 개나 돼지 같은 놈들이다. 진도를 공격할 때 너희들 둘이 군율을 범하였기에 중
찬(中贊-김방경)이 너희들이 훔친 물건들을 몰수하여 국가에다 드린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이 이에 대
한 악감을 품고 있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있지도 않은 말들을 꾸며내어 대신을 모함하고자 하
니 하늘이 만일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였다. 김복대 등 14명이
또 고하기를
“위득유가 자꾸 꾀이기에 서명하였을 뿐, 우리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더욱 더 고발
이 무근거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갑옷을 감추어 둔 한희유 등 12명의 죄만을 다스려 그들에게 곤장
을 치게 하고 석방하였다.
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 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
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
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
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
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왕이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먼저 번에 내가 흔도와 함께 이미 문초를 다 끝내었는데 하필 다시 문초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다구는 듣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낭가대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다. 왕이 그들과 함께 문초하자
고 하였더니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곧 조정에로 돌아가겠는데 황제께서 만일 고려 일에 관하여 물으면 응당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
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다구도 상당히 휘어 들었었다.
그 후에 다시 문초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을 받들기를 하늘을 받들 듯이 하고 귀국을 사랑하기를 친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
데 어찌 하늘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거슬러 스스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원통하게 죽을지언정 감히 무근거한 고발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홍다구는 반드시 그를 자복
시키려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기 때문에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었으며 죽어 넘어졌다가 다시 살아나
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홍다구는 왕의 측근자들을 가만히 달래기를
“지금 한창 아주 춥고 비, 눈이 그치지 않는 때여서 왕도 역시 심문에 피로하였다. 만일 김방경으로 하여
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며 법에 따라 다만 귀양을 보내게만 될 것이니 고
려를 위해서도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
통을 받고 있느냐?”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
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홍다구는 사람
을 보내 황제에게 무고하기를 “김방경은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 갑옷을 감추
어 두고 불칙한 짓을 하려고 꾀하였으니 왕경(개경) 이남의 지리 상 중요한 지대를 골라서 방수군을 두
며 또 여러 주와 군에도 모두 달로화적을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 기타 일가 권속들은 모조리 수도
(북경)에 압송하여 노예로 만들고 그 소유지는 몰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군량에다 충당하도록 하
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
“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
“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
“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
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득유와 노진의가 또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담선 법회(談禪法會)를 개설하는 것은 귀국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홍다구는 그
말을 천구에게다 전하였고 천구는 사람을 보내 중서성에다 보고케 하였다. 왕도 역시 장군 노영(盧英)을
원나라에 보내 대변케 하였다. 평장 합백(哈伯)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황제께 아뢸 만한 일이 못된다. 그대도 귀국해서 국왕 자신이 직접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
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
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
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
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
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 김방경이 무고하게 죄를 당했다는 것을
해명하였는바 그 글에 이르기를
“위득유, 노진의 등이 흔도에게 김방경이 공주, 국왕,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장차 강화도에 들어가려
한다고 고발하였는바 만일 정말 그러하였다면 위득유는 응당 나에게 먼저 고발했어야 할 것인데 왜 바로
수부(帥府-몽고의 원수부)에다 고발하였겠는가? 흔도가 김방경을 고문하였는데 김방경은 일찍이 어떤
병기도 갑옷도 집에 감추어 둔 것이 없었고 다만 나유 등 41명이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유 등
도 한결같이 ‘김방경이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위득유 등이 김방경에 대해서 원
망을 품고 그를 해치려 하여 그러나 봅니다’라고 말하였다. 위득유 등도 한번도 직접 김방경의 반역 음모
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그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다고 하였다. 다만 정동
(일본 정벌)시에 김방경의 부하들이 군기를 관가에다 납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반역 음모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말을 바꾸어서 김방경이 반역 음모를 두 번이나 이
야기하였다고 하였으니 앞뒤의 말이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또 위득유 등은 지원 12년(충렬왕 1년) 12월 어느 날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흔도가
나의 방원(房院)을 헐어뜨리고 갔다’고 하면서 반역할 데 대한 말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수부(원수
부)의 진무(鎭撫) 야속달(也速達)이 보낸 글을 보건대 흔도는 지원 12년 12월 28일에야 왕경에 도착했고
이듬해 정월 초 3일에 염주로 돌아갔은 즉 위득유는 어디서 12월에 갔다는 말을 끌어내게 되었겠는가?
또 노진의는 지원 12년 4월에 김방경의 집에 갔더니 김방경은 문 앞에 서서 반역 음모를 말하였다 라고
하였었는데 그 후에는 김방경이 정방(政房)의 동랑(東廊) 밑에서 그런 말을 하였다고 했으니 그 말한 바
가 전후가 다르다. 이로써 볼지라도 그들의 말이 모두 허망하게 꾸며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흔도가 달로화적과 함께 문초를 하였는데 결국 갑옷을 감추어 두었던 자들만 곤장을 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며 다만 김방경 만은 남겨 두어서 황제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던 것
이다.
홍다구는 또 균지(鈞旨)를 받아 한희유, 안적재(安迪材), 김흔 등을 문초하였는데 그들로 말하면 실제는
나 자신이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마치도 김방경이 제멋대로 파견하여 오목강(吳木江)에서 양곡을
적재하도록 한 것처럼 심문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죽주(竹州) 등 군, 현에서 공, 사의 곡물을 운반
하여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김방경이 저축해 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남(潘南) 등지에 있다는
선박들도 모두 다 종전군인(種田軍人-둔전‘屯田’ 군인)들이 갖추어 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김방경의
선박들이라고 하여 억지로 문건을 꾸며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거듭하여 반드시 자백하도록 하려고 한 것
이다. 지금 형세로 보면 사태가 저절로 명백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방경의 목숨이라도 살려
두어 우선 섬에 귀양이라도 보내었다가 황제의 명령 내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 하였더니 황
제는 저간의 사정을 다 알고 김방경으로 하여금 수도에 올라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번
에 황제께 올린 글과 달로화적이 보낸 글을 자상히 살펴보고 하나도 빠짐 없이 잘 아뢰어 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위득유와 노진의는 또 ‘담선 법회는 장차 귀국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일으키게 하려고 개설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위득유를 불러다가 이것을 물어 본즉 ‘대정(隊正) 김현(金玄)의 말에 의하면 장차 담
선 법회를 개설하려다가 그만 중지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또 군인(軍) 성일(成一)도 역시 어떤 중이 공주
에게 담선을 하는 것은 귀국에 불리하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주가 성일의 누이 우긴(于緊)에게 옷을 기워
오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그 중에게 상으로 주었다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김현에게
물어 보니 그는 ‘위득유가 나를 불러서 담선 법회가 무슨 까닭에 중지되었는가를 묻기에 나는 모른다고
하였고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일에게 물어 보니 그는 ‘나는 노진의
네 집에서 기숙하고 있는데 노진의가 나를 데리고 위득유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위득유가 무슨 다
른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못들었나 라고 묻기에 못들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주가 중에게 상을 주었다
는 것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위득유에게 했겠습니까? 또 나에게
만약 누이가 있다면 누이의 집에서 기숙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노진의네 집에서 기숙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현과 성일의 말이 모두 이러하다. 게다가 선법(禪法)이란 것은 천하에 모두 행해지는 것으로
서 우리 나라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3백60여 년간이나 대개 3년에 한 번씩 봄철이 되는 첫 달에
법회를 개설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는 위득유, 노진의의 무고로 말미암아 나라 안이 소란스럽
기 때문에 4월달에 개설할까 하고 어물어물 시간을 늦추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위득유는 내가 직접 황제
를 보고 말하게 되면 자기 죄가 더해질까 두려워하여 내가 귀국으로 가는 것을 방해할 셈으로 또다시 허
망한 소리를 달로화적에게 하였고 달로화적은 잘 구명해 보지도 않고 갑작스레 보고하였던 것이니 실로
황공한 일이다. 황제에게 잘 아뢰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중서성의 관원들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크게 웃었다. 10여 일 더 있다가 위득유 역시 혓바닥이 헐어서 죽어 버렸다. 그래서 당
시 사람들이 하늘이 그들의 소행을 미워해서 죽여 버린 것이라고들 하였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
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
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귀국 후 다시 김방경을 중찬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은 10근을 주었다. 6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리어 정
계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보내 잘 타일러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
다. 겨울에 또다시 연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늙었지마는 세운바 훈공과 업적은 보통 사람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경솔하게 벼슬살이
를 그만두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황제가 일본 정벌의 명령을 내리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응당
황제에게 말하여 원수를 두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훈공도 업적도 없는 자를 황제에게 요
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지를 아니하였다. 그 후 또다시 글을 올려 퇴관하려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우승지 조인규(趙仁規)를 보내 중서성에다 글을 보내 이르기를
“나의 신하인 김방경은 마음을 다하여 자기 직무를 충실히 집행하였고 귀국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근면
하게 일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또 진도, 탐라,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관군을 따라서 토벌에 참
가하여 여러 번 승리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호두금패를 주어서 그 공적을 장려하고 위로하
여 주었다. 지금 다시 정군(正軍) 만 명, 수수(水手-뱃군) 1만5천 명을 관할, 인솔하고 일본 정벌에로 떠
나는데 만약 그가 군사 지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호령이 잘 되지 못하며, 또 혹시 실수를 초래하지 않을
까 염려된다. 김방경이 나이는 비록 많으나 장한 마음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시금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고 있으니 황제께 잘 아뢰어 원수부의 성원으로 참가케 하여 사업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내 김방경에게 중선 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의 관직을 주었
다. 이때 김방경은 신년 축하 차로 원나라에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명전(大明殿)에 나와 앉아서 축하를
받았다. 4품 이상 인원들은 전상(殿上)에 올라가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김방경도 역시 이에 참여하
였다. 황제는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좌석을 승상(丞相)의 다음에 잡게 하였으며 진수 성찬을 그에
게 주고 또 흰밥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계속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였고 귀국하게 되자 활, 화살, 검, 백우갑(白羽甲)을 주었으며, 또 활 천
개, 갑옷 백 벌, 반오(솜옷) 2백 벌을 주어 동정에 나가는 장령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이내 동정
조령(東征條令)을 보여 주었다.
승상 안중(安重)은 본래 우리나라에 유익되는 일을 해 준 일이 있는 자인데 때마침 삭방(朔方-원나라 북
방 지방)에 나가고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따로 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김방경이 은우(銀盂-은제 술잔
의 일종)와 모시 베를 그 부인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재상이 보내 준 것이 아
닌가? 승상이 북쪽으로 가고 난 뒤에는 국가적 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공(김방경)이 아니면 누가 이
런 부녀자를 생각해 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에 선물을 가져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국
가적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가 혹 나머지가 있게 되면 사신으로 간 자가 대개 자기의 사사용으로 써버리
곤 하였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진봉사가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나머지들을 모두 다 도로 국가에 갖다 바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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