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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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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3-18 20:43 조회1,50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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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조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배들은 전투용 군함과 무역 및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과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뉘었다.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받아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데 사용하던 배로 초마선의 경우 한강 유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배는 적재량을 200섬으로 제한했지만 원래의 초마선의 적재량은 1000섬이나 되는 큰 배이다.

전투용 군함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이다.

『고려사』에 914년에 ‘태조가 전함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중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이며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말을 달릴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방이 16보(1보는 6자)라는 것은 배의 길이가 약 36.6미터나 되며 말이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 넓은 갑판을 가지고 있는 배임을 알 수 있다. 이 규모로 배를 만들면 250여 명의 학생들이 줄을 서면 윤곽선을 채울 수 있다.
과선이란 말 그대로 적선을 찔러 물리칠 수 있는 고려 특유의 군함으로 11세기초부터 약 100년 동안 함경도 지방 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면서 사용한 중요한 전투선의 하나였다.

이 당시 여진(동여진)의 해적들은 동해안 각지에 자주 침범하여 현종 2년(1011) 8월에는 100여 척이 떼지어 경주에 침입한 적도 있을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고려는 해군기지사령부라 할 수 있는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각 지에 두어 대치했는데 이때 동북 방면에 배치된 군선이 바로 과선이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된다. 『원사』에 원나라의 왕운이 해전에서의 실패에 대해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쳐 크고 작은 많은 우리 함선들은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원의 세조가 일본에 원정할 대함(大艦) 300척을 포함한 군용선 900척을 요청하자 고려의 김방경은 배를 중국식으로 만든다면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기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설계도면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관철시켰다.

김재근 박사는 이 당시 고려의 배들은 한선의 구조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당시 원은 군량미 3000∼4000섬을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요구했는데 군량미가 3000∼4000섬 정도라면 현재의 단위로 약 250∼320톤이 되므로 이 배의 배수량은 400∼500톤이 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이들 배를 단 4개월에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고려의 조선 기술이 얼마나 앞선지를 알 수 있다.

고려 배의 크기는 여 몽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나가사키현 다카시다에서 발견된 700년 전의 침몰선 유물로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배는 바다 속에서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1994년에 소나무 닻이 인양되었다. 이 당시 인양된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닻에는 두 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닻돌이라고 불리는 길이 2미터 가량의 이 돌은 닻의 한 가운데 박았는데 두 개 돌의 무게는 무려 338킬로그램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적색 응회암으로 이 돌의 성분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의 돌과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배는 천관산의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다. 인양된 닻을 복원하니 그 길이가 무려 7미터에 이른다. 학자들은 두 개의 닻돌과 닻의 무게를 합하면 약 1톤 가량으로 이를 근거로 배의 길이를 추정하면 30∼40미터가 된다고 계산했다.

한편 이원식은 고려 대선의 크기를 25∼30미터로 추정했다. 이같은 규모는 고려의 군선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현재 서해와 남해의 풍파의 파장을 40∼50미터, 파고를 2미터 정도로 감안할 때 안전한 선박의 길이는 적어도 25∼30미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대선의 크기로 볼 때 전투병 60명, 선원 30∼40명을 포함하여 모두 90∼100명 정도가 승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태서 종친님 반갑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뵌지가 꽤 되지요?

김상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상석
작성일

  다행스럽게도 후세에 조선업의 부흥을 보게 된 것에 뿌리가 깊었고,과학적 접근과 함께 재능있는 선조님들의 창의성에 감탄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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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태서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