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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창건자 정정과정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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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3-31 08:58 조회1,59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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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와 관련한 합천시문사의 연재기사 내용과 창건자 정정과정입니다. 본 홈에서 가져왔습니다.

 

*함벽루 창건자에 대한 정정과정 종합 (2004. 9. 30. 항용(제) 제공)

*창건자를 김흔으로 소개하여 연재하던 <합천신문>의 관련 기사를 포함

      가)2004. 6. 24. 기사

-합천사 탐구(121회)-`함벽루는 太守『김흔』이 세웠다-

오늘날 문명의 利器라는 ‘인터넷’은 칼에 비유되고 있다. 강도가 사용하면 흉기가 되고 주부가 사용하면 식도가 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우리 합천신문사 ‘합천사 탐구대’는 인터넷과 고서적을 통해, 무려 1700여년 동안 잠자 온, 함벽루를 창건하고 함벽루란 이름을 명명한 金某 太守가 누세 공신 上洛公(김방경)의 令胤 김흔將軍임을 발굴하였다. 이에 본지는 함벽루를 둘러 싼 당대 명사들을 재조명해 본다. (본지의 허락없는 無斷轉載를 禁함) -學山 朴 煥 泰

남정강변에 날아 갈듯 반공에 걸려있는 함벽루를 연구하다보면 함벽루가 고려말에서 조선중기까지 南州의 최고 명승지임을 알 수가 있다. 이를 뒷바침하는 증거로 당대의 최고 文士들인 安震, 鄭以吾, 姜希孟, 宋時烈, 李滉, 曺植, 崔益鉉 등이 함벽루를 찾아 기문을 짓거나 漢詩로 함벽루를 노래하였던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年前에 우리신문사 합천사 탐구대는 累世 功臣 上洛公이 삼별초난을 진압한 忠烈公 김방경 장군임을 밝힌 바 있다. 그 후 바쁜 신문사일로 더이상 연구하여 밝히지 못하고 이제야 시간을 득하여 획기적인 지역사 하나를 발굴하였으니 바로 함벽루라 명명하고 함벽루를 창건한 金某태수가 “김흔” 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함벽루를 창건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최초의 함벽루 記文을 쓴 안진이라는 문사가 누구인가? 부터 알아야 한다.
안진(安震)
∼1360:공민왕 9)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順興이며 호는 常軒이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밀직부사로서 書筵官이 되고, 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李齊賢 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朝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銅을 바치게 하여 겨우 목숨만 보전했다.
안진의 기문을 보면 “지난 정사년 가을에 중국에 과거를 보러 갈 때 평양을 지나다가 永明寺 浮碧樓를 보았고 그후 5년만에 진양군수가 되어 龍頭寺 狀元樓에 올라 스스로 말하길 평생에 본 남북의 절경은 이 두누각 밖에 없다고 말하였는데 작년 나라 일로 江陽을 지날때 길 가운데서 바라보니 한채의 누각이 춤추며 날아 가는 듯 하며 단청그림이 눈부시게 빛나 흡사 봉황새가 하늘 가운데 날아 가는 듯하는지라...”로 시작 된다.
이글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고려의 천하절경 누각으로 평양 부벽루와 진양 장원루와 강양 함벽루를 꼽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기문 말미에 “누를 함벽이라 칭한 자는 태수가 스스로 이름한 것이며 태수가 누군가? 하면 누세 공신 상락공의 사랑스런 아들 金君이다”라고 끝맺고 있다. 여기 나오는 누세 공신 상락공은 삼별초난을 평정한 金方慶 대장군을 이름이며 그의 사랑스런 아들은 金炘을 말한다. 당시로 봐서는 궂이 김흔이라 하지 않고 累世 功臣 상락공의 영윤 金君이라해도 김흔을 지칭하는 말인 줄 다 알기 때문에 김군이라 표현한 것이다.
우선 김흔을 소개하기에 앞서 舊안동김씨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이 어떤 인물인가 부터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것 같다.
金方慶(1212∼1300:충렬왕 26)은 고려 명장이며 정치가이다. 자는 本然, 본관은 安東이며 신라 경순왕의 후예다. 고종 때 음서로 散員이 되어 式目錄事를 겸하였고, 감찰어사를 거쳐 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군의 침입을 葦島에서 방어하였다.
1263년(원종 4) 知御史臺事에 승진, 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上將軍으로 있다가 잠시 南京留守로 좌천, 곧 서북면병마사로 복직되었다. 형부상서·추밀원부사를 지내고 69년(원종 10) 원나라에 있을 때 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安慶公 창을 내세우자 원나라 世祖가 보낸 孟格圖의 군사 2천명과 합세해 진압하려 하였다가, 원종이 복위되었음을 알고 되돌아갔다.
이듬해 장군 裵仲孫 등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켜 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자 追討使의 명을 받고 삼별초 무리를 쳤고 71년(원종 12)에는 몽골군과 합세해서 토벌하여 승화후를 죽이고, 남은 무리들이 탐라(제주도)로 도망치자, 73년(원종 14) 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몽골의 장군 흔도·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평정하고 侍中에 올랐다. (계속)

 

   나) 2004. 7. 29. 기사

-합천사 탐구(122회)-`함벽루는 太守『김흔』이 세웠다2?-

1274년 원나라에서 合浦(지금의 馬山)에다 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고려군을 거느리고 中軍將으로 출정, 원나라 군대와 함께 對馬島를 쳤으나 풍랑으로 실패하고, 81년(충렬왕 7) 또다시 고려군 도원수로 제2차 정벌에 올랐으나 대폭풍이 일어나 큰 손해를 입고 돌아왔다.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원나라에서 推忠靖亂定遠功臣의 호를 주었고, 上洛郡 開國公에 봉하였다.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 정벌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 등으로 민심을 잃어, 죽어서 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 충선왕 때 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서되고 시호는 忠烈公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金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金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
당시 시중 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右倉을 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葦島에 入保하였다. 거기에서 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4) 知御史臺事로 당시 政柄을 잡고 있던 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班主 田분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추밀원부사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이상이 安震의 기문에 나오는 累世 功臣 上洛公으로 표현한 김방경의 이력서이다.
조선조 말 외척의 세도정치로 유명한 安東김씨들의 족보를 연구 해 보면 같은 안동 貫鄕인 安東권씨들의 족보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안동권씨는 시조가 權幸(원래 신라김씨인 金幸이였는데 古昌郡主로 있을 때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甄萱을 격파한 공으로 權氏 성을 賜姓받았다)한사람인데 안동김씨는 시조부터 두사람이다. 즉 舊안동김씨의 시조는 金叔承(경순왕 4째아들 大安君 殷說의 둘째아들로 工部侍郞을 지냈다)이고 新안동김씨의 시조는 金宣平(古昌郡主로 36세때 權幸, 張吉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헌을 대파,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올랐다)으로 新舊안동김씨로 나뉜다.
상락공 김방경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舊안동김씨의 중시조이다. 舊안동김씨는 김방경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아들, 손자가 계속 재상의 반열에 올라 고려 말 최고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김방경의 현손인 金士衡이 조선개국 1등 공신이 되고 태종조에 左政丞에 까지 오름으로서 조선조에서도 가문의 세력을 유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
舊안동김씨의 족보를 보면 김방경은 선(쾌할선, 心+宣), 흔(기쁠흔, 心+斤), 순(진실할순, 恂), 론(생각할론, 心+侖), 돈(두터울돈, 惇)등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함벽루를 창건한 둘째아들 김흔과 막내아들 金惇의 후손은 끊어 졌다.
비록 후손은 끊어졌지만 합천의 大耶山城중 가장 절경에 함벽루를 세우고 그 이름을 涵碧樓라 명명한 김흔장군의 위대한 이름을 70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 합천신문사에 의해서 밝혀지니 그 感慨無量함을 무엇이라 표현하랴. (계속)

 

   다) 2004. 8. 12. 기사.

-합천사 탐구(123회)- `함벽루는 太守『김흔』이 세웠다3?

함벽루를 세운 金흔 太守<1251(고종 38)∼1309(충선왕1)>는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아버지는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김방경(金方慶)이다. 음서(蔭敍)로 등용되어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거쳐 정4품 장군에 올랐다. 1272년(원종 13) 아버지 김방경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사경(司宰寺卿)에 올랐다.
1274년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뒤에 진주목사를 지냈다.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이듬해 김방경이 무고를 입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1279년(충렬왕 5) 대방공(帶方公) 징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衣官)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으며, 1282년(충렬왕 8)에는 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사람 庾주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1286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삼사사(三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김흔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敍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다고 한다.
함벽루를 세운 金흔 太守에 대한 유적은 우리 합천보다는 충남 연기군에 더 많이 남아 있다. 1997년 6월28일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에서 연기군청과 조치원 문화원의 후원을 얻어 충남 연기군(조치원) 서면 국촌리에 <金小斤將軍燕岐大捷事蹟碑>제막식을 가졌다. 碑文 撰者는 공주대학교 이해준 교수 이며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곳 대박산 앞 정화산은 고려 충렬왕때 연기대첩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의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賊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충렬왕一七) 5월 1일 이곳 연기 정화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화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하여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서 적의 에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화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연주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연주산 전투에서는 한희유장군이 앞장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므로써 전후 2년여에 결친 합단의 침입은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 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를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계속)

 

   라) 2004. 8. 21. 김항용(제)은 합천신문 박태환 사장과 전화 통화. 함벽루 창건자는 김영돈선조님임을 본 홈 각종 자료를 근거로 알려 줌.

 

   마) 2004. 8. 26. 기사.  

함벽루』김방경의 손자 金永暾이 세웠다

碑文발견 확실, (구)안동김씨대종회 김항용씨가 본사에 알려와
지금까지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이 상락공의 아들 김흔이 아니라 손자 김영돈(金永暾)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 졌다.
지난 21일 안동김씨 대종회 김항용(金恒鏞, 안동김씨 홈페이지 운영자)씨가 밝혀 온 바에 의하면 함벽루를 창건한 분은 ‘상락공(上洛公)의 아드님 김군(김흔)’이 아니라 다른 아들 문영공 김순(金恂)의 아들 김영돈(金永暾)임이 확실하다고 전해 왔다.
꼼작 못하는 근거로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묘지명을 살펴보니 문영공(文英公)의 장남이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이 충숙왕 8년(1321년)에 지합주사(知陜州事)였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부 간본 아정유고 제3권 기(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도 ‘함벽루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고 되어있어 <상락군=문영공 김순, 맏아들 김후=장남 김영돈>이 일치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 따라서 함벽루(涵碧樓)를 창건하신 분은 충숙왕 8년(1321년) 그해 합주지사를 지내신 상락부원군 김영돈(金永暾)이 분명하다.
김순(金恂) 묘지명? --<전략>-- 장남 영돈(永暾)은 지금(☞충숙왕 8, 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 영휘(永暉)는 지금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사헌지평(사헌지평)이 되었다.(문화부=박환태발행인)

  

  바) 2004. 9. 2.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1?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합천신문사의 역사는 내년이래야 10년이 된다. 그러나 비교적 日淺한 역사에 비해 그동안 우리 신문사가 발굴한 향토사로 地理名士 杜士忠, 가야산 만수동, 야로 쇠평의 가야시대 야철지, 李屹선생의 피난지 莫愁洞, 吾道山 智谷寺址, 쌍백 森里 고려장터 등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로 손 꼽는다면 涵碧樓를 창건하고 樓名을 지은 累世 功臣 上洛公의 令胤이 金永暾 知陜州事임을 밝힌 것이다.
햇수로 치면 2년정도 되었는가 보다. 함벽루상의 시를 연재하면서 함벽루를 세운 태수가 상락공의 영윤이라고 安震의 기문에 나와 있어 잘 하면 700년동안 찾지 못했던 창건자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연구에 착수했다. 먼저 上洛公의 上洛이란 말이 경북 尙州의 고호임을 밝혔다. 그다음 上洛公이 그 유명한 고려의 명장 김방경(舊안동김씨 중시조)上將軍임을 밝힐 수 있었다.
上洛公 김방경을 찾았으니 그 아들 찾기는 식은 죽 먹기로 알았다. 김방경의 아들은 선, 흔, 순, 론, 돈 등 5형제를 두었다. 그중 知陜州事를 지낸 아들만 찾으면 700년 동안 찾지못한 함벽루 창건자를 내가 밝힌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희열과 감격으로 몸이 다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다섯아들을 다 찾아 보아도 합천태수를 지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둘째 아들 김흔이 知晋州事를 지낸 사실을 밝혔다. 그래서 합주와 진주는 붙어 있으니 김흔외에는 지목할 사람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큰 誤謬를 범한 것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역시 대마도 정벌의 고려 名將 김방경의 문중인 舊안동김씨들이 밝혀 냈다. 인터넷에서 우리 합천신문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던 모양이다. 우리 신문 홈페이지를 검색하기 전에는, 함벽루를 자기들 선조가 세운 줄 몰랐으리라. 우연히 김방경을 검색하다 우리 신문의 『함벽루는 태수 김흔이 세웠다』는 글을 보고 연락을 해 왔다.
함벽루를 창건하고 함벽루라 명명한 김영돈은 김방경 상장군의 세째아들 金恂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元祖 상락공 김방경의 손자인 셈이다. 김방경의 세째아들 김순은 4형제를 두었다. 김순이 逝去할 당시<충숙왕 8년, 1321> 장남인 永暾은 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인 영휘(永暉)는 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인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慈恩宗의 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司憲지평이었다.
그러면 함벽루를 창건한 김영돈의 아버지 제2대 상락공 김순은 누군인가 부터 설명해야 겠다. 김순<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은?고려의 문신으로 자는 귀후(歸厚), 金方慶의 3子이다.??1279년(충렬왕5. 22세) 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重試에서 趙簡의 榜下에 2등으로 들어 郎將이 되었다. 그 후 學士로 추천되어 直講이 되었다.??충렬공이 일본 원정을 나갈때 공도 종군하고자 했으나 충렬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왔고 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여러번 밀직부사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97년 左副丞旨, 이듬해 左丞旨를 거쳐 密直副使로 있다가 사퇴했으나 같은 해 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를 거쳐, 右承旨 寶文閣學士 知民曹事에 이어 三司 左辭에 올랐다. 1312년(충선왕4) 重大匡 上洛君에 봉해졌고, 1321년(충숙왕 8) 判三司事가 되었다. 그 해 8월 24일 졸하였고 수는 64세이며 시호는 文英公이다.
??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隸書를 잘 썼다. 만년에는 소리하는 기생들을 키웠으며, 나날을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로써 낙을 삼았다. 이런 사적은 고려사 列傳과 여지승람에 보인다. 익재 이제현이 부인의 묘지를 찬하였는데 東文選에 보인다. 1942년 봄에 지석이 구묘지인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어 1943년 봄에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뒷산 艮坐에 遷奉하였다.
?문영공 金恂의 필적인 1298년(충렬왕24년 무술)에 세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비>,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원나라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에 세운 비문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와 1306년(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가 있으나? 현재까지 그 소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계속)

 

   사) 2004. 9. 9.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2?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이제 꼼작할 수 없는 증거인 김순<1258(고종 45)∼1321(충숙왕 8)>의 묘갈 명을 보자.
.....(前略) 그 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하고 剛直하고 內柔하시며 孝悌와 忠信은 천하에 出衆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 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萬民에 미치지 않았으랴,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서 그칠 뿐이랴?
.....(中略) 配는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贈諡 文敬公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永暾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 2남 永暉는 현재 興威衛 保勝別將으로 있고 3남 斯順은 삭발하고 자혜종 대덕이 되었고, 4남 永煦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
.....(中略) 장녀는 入內侍 中正大夫 親禦軍大護軍 정책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大匡 上黨君 백이정에게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左丞相 阿忽反의 아들인 舍人 別里哥不花에게로 출가하였다.
.....(中略)大元至元 元年 辛酉(1321년) 十월 十四일 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 僉議政丞 右文館 大提學 監春秋館事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가 撰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밑줄친 “장남 永暾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와 민지公이 비문을 찬한 “大元至元 元年 辛酉 十월 十四일”이란 날짜다.
前者는 2대 상락공이며 김영돈의 부친인 김순이 서거할 당시 知陜州事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後者는 辛酉年에 합천태수로 있었으니 신유년 前後에 함벽루를 창건하였음을 示唆하고 있다.
그러면 함벽루는 언제 세웠을까? 여기에는 최초의 記文을 지은 安震의 기문을 연구해야 한다. 기문의 첫머리에 “지난 丁巳年 가을에 장차 중국에 과거를 보러 갈 때 평양을 지나다가 永明寺와 浮碧樓를 보았고 그후 오년만에 진양군수가 되어 또 龍頭寺와 狀元樓에 올라 스스로 말하되 평생에 보던 바 남북에 뛰어난 경치가 이 두개의 누각을 지남이 없다고 하였더니 작년에 나라일로 강양(합천의 옛이름)을 지날때 길 가운데서 바라보니.....” 라는 말이 나온다.
안진이 진양군수가 되었을 때는 정사년에서 5년 후이니 壬戌年이 된다. 그렇다면 김영돈이 지합주사로 있었던 충숙왕8년 辛酉年(1321) 前後해가 함벽루를 창건한 해로 유추할 수 있다. 문헌으로 봐 김후가 합주태수로 오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유년이 유력한 창건해일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김영돈 지합주사가 합천을 몇년간 다스렸는 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정확하게 안 나와 있기는 기문을 지은 안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안진이 진양군수로 있을 때인 충숙왕9년(1322)에 촉석루를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함벽루보다 촉석루가 먼저 창건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기문에 나오는 龍頭寺와 壯元樓가 바로 진주의 촉석루라는 사실도 알아 내었다.
이제 함벽루를 창건한 누세공신 상락공의 영윤 김영돈 지합주사가 누군인지 알아보자.
知陜州事 金永暾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의 ?字는 휘곡(輝谷). 號는 균헌(筠軒) 또는 龜峰이다. 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3등으로 급제하여 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誠秉義翊贊) 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계속)?

 

   아)2004. 9. 16. 기사

함벽루와 金永暾과 安震을 말한다3? -합천군향토사학회 學山 朴 煥 泰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論意는 달랐다. 공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함을 청함이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나온다.
?충혜왕때 三重大匡僉議司事와 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失政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
??충목왕 때(1347년)에 左政丞, 判整治都監事(整治都監: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 奇三萬을 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홧병을 앓다가 충목왕 4년(戊子, 1348)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시호는 文肅이고 묘는 豊德 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栢田에 設壇했다.
安震이 찬한 文肅公 金永暾의 碑銘에 의하면 『-前略- 지합주사로 나갔는데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新羅王 金傅(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중략- 상락공 김방경의 막내인 순(恂)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에 이르렀는데, 바로 문숙공의 아버지가 된다.
부인 申氏는 판도사랑 汝岡,(이천君)의 딸로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 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진(縝)은 장복직강인데 우대헌 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안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장차 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김영돈 묘지석은 조선조 순조8년(1808, 술진)에 발견되었는데 탈락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현재 족보에 수록된 銘文 가운데에도 오탈자가 몇 군데 있다고 한다. 金永暾의 역사기록은 고려사의 김방경전에 부전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김영돈이 金永旽으로 표기되어 있다.
앞의 설명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로니컬 하게도 김영돈의 묘지명은 그의 조부 김방경의 행장을 찬하였던 安震이 찬하였다. 말하자면 안진은 상락공 김방경家와 3대에 걸쳐 교류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함벽루 기문을 지은 안진
∼1360(공민왕 9)>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順興, 호는 常軒이였다.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원년)밀직부사로서 書筵官이 되고, 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李齊賢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銅을 바치게 하였다.
이상이 지금까지 밝혀진 안진에 대한 행장(行狀)이다.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와 파묻힌 비석의 발견을 통해 더 상세한 기록이 밝혀 질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주인공 김영돈公이 1347년(충목왕3) 좌정승으로 있을 때 왕을 호종하고 백마산에 올라 지은 시를 소개함으로써 나의 책무를 완수코져 한다.
翠保行尋蒼海上  玉簫吹送白雲間
紅塵一片飛難到  萬点螺分雨靑山
-취보를 받들고 임금을 모시어 창해 위를 찾아오니, 흰구름 사이로 옥퉁소 불어 보내네, 한 티끌의 홍진도 날아오기 어려운데, 만점의 푸른 소라요 비 갠 뒤의 청산만 벌여 있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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