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묘소 주변의 인물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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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7 17:35 조회2,103회 댓글0건본문
익원공 묘소 주변에 묻힌 아홉명의 정승 3편을 올립니다.
이준경(李浚慶) -영의정- 忠正公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의 아들로,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1504년(연산군 10)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세좌(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그해 말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기59)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鈞: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년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희(閔熙) -좌의정- 文忠公
민희(閔熙)
1614(광해군 6)∼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호38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참판 응협(應協)의 아들이며, 암(#암30)이 형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과 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7000여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여17病)에 신음하는 3, 600여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하니 도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와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그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그의 정계에서의 활약은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차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1686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준경(李浚慶) -영의정- 忠正公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의 아들로,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1504년(연산군 10)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세좌(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그해 말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기59)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鈞: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년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희(閔熙) -좌의정- 文忠公
민희(閔熙)
1614(광해군 6)∼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호38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참판 응협(應協)의 아들이며, 암(#암30)이 형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과 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7000여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여17病)에 신음하는 3, 600여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하니 도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와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그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그의 정계에서의 활약은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차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1686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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