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http://www.kwangsankim.or.k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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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5-04-10 15:33 조회2,139회 댓글4건본문
광산김씨 예안파를 취재하기로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전에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들렀을 때 보았던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소였다.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향해 오르는 좁직한 돌계단의 입구에는 김방경 장군의 묘소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 대신에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묘소라는 표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잇대어서 바로 위 쪽에 광산 김씨 입향조의 묘소는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쉽지 않은 배치는 나의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었음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조상의 묘소를 어떤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한국적 구조 속에서는, 그리고 묘자리를 명당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국적 의식 속에서는, 남의 조상의 묘지 바로 위를 점령한다는 것은 어쩌면 피 튀기는 싸움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의문은 소산리의 안동김씨(상락김씨) 종가를 찾았을 때 풀릴 수 있었다. 실전되었던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광산김씨 측이 찾아 주었으며, 당시 안동김씨는 광산김씨와는 인척관계였고, 광산김씨 측에서는 입향조에게 제물을 바칠 때 먼저 김방경 장군에게 간단한 예를 올리는 순서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소산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간단치 않은 인연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범상치 않은 관계는 광산김씨 예안파의 현 종손인 김준식씨를 면담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광산김씨가 안동으로 들어온 것은 무(務)자를 쓰시던 밀직부사공(密直副史公; 天利)의 둘째 아드님때 부터이지요. 저의 21대조 이신데요, 고려말선초에 안동으로 내려오셨지요. 처가가 영가김씨(안동김씨)여서 안동으로 낙향하시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광산김씨가 안동에 정착함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은 김무로부터 3대 후에 김효로(金孝盧)가 안동김씨(상락김씨) 중시조인 김방경 장군과 묘지를 위 아래로 같이 씀으로써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처음 김효로의 묘지가 그 자리에 정해졌을 때, 김방경 장군의 묘지가 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광산김씨가 안동 인근에서 그 한 갈래의 흐름을 열어나감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결정적인 기능을 하였음을 알아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광산김씨를 생각할 때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반적인 연상법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법의 사례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쓰고 있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묘지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연상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 11월 경오(庚午)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의 북쪽 들에 (김해를) 장례지냈으니, 상락공 김방경의 묘와 같은 산자락이다. 대저 선생(김해)은 상락공의 외손인 까닭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현일의 의식 속에서도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묶어서 이해하는 연상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기록은 김해의 묘지를 선택한 조건이 김방경과의 관계를 중요한 인자로 삼은 것이었다는 사실까지를 확인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 점은 위의 구절을 통해서는 확정적인 답변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현일이 김해의 묘지를 바라보는 의식 속에서는 그 양자는 굳건한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현일이 김해를 김방경의 외손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앞에서 거론하였던 사실, 즉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조인 김무의 아내가 안동김씨(영가김씨)였다는 것 외의 다른 전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김무 이후 김해에 이르기까지, 안동김씨를 배위로 하는 이 계열의 광산김씨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상호 연계시켜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연상법이든 아니든,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의식의 상호관계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나의 경험을 전제로 할 때에는, 이러한 연상법이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안동김씨(상락김씨)에 대한 취재경험이 있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돌아볼 때 광산김씨 입향조의 묘소도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광산김씨의 역사 1 시조 김흥광(金興光)부터 안동 입향 이전까지
{광산김씨 예안파보}(禮安派譜; 이하 {예안파보}로 약칭함)에도 1세 김흥광에 대한 사적에서 신라왕실과의 연계를 밝혀놓고 있고, 역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한 문제점의 일단을 기록하여 놓고 있다. 이 {예안파보}로부터 김흥광에 대한 기록을 일부 여기 옮겨 보자.
"신라국 김씨의 왕자로 국말(國末)에 태어나 나라가 어지러움에 둔세(遯世)하여 무주(武州) 서일동(西一洞)에 우거(寓居)하니, 이곳이 곧 후에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이며, 광산김씨가 이에서 비롯되었고… 왕자공의 휘(諱)는 흥광(興光)이니 성덕왕(聖德王)의 휘자(諱字)와 동일하며, 충정공(忠貞公) 의원(義元)의 묘지(墓誌)에 난세를 피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쓰고 있고, 또한 길(佶)자부터 그 윗대는 구속(舊俗)에 족보가 없으니 모두 실명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으니, 왕자공도 아울러 실명하였음이 분명하고, …그러나 혹은 신무왕자(神武王子)라고도 하고 헌강왕자(憲康王子)라고도 하는데, 모두 다 증거한 바가 없고, 또한 사승년대와 지문사실 등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감히 모(某)왕의 아들이라 하지는 못하고, 황대전고(黃臺典誥) 이(珥)의 [제영시](題詠詩) 서(序)와 전보(前譜)에 기록된 바에 의거 기재하고 후일의 정확한 고증을 기다리기로 한다."
{예안파보}는 이렇게 시조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여 놓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광산김씨의 시조에 대하여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그 이름과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누구의 아들인지, 그 가계는 분명치 않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시조의 사적은 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이름조차 실전되어 알 수 없다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이 두가지 기록 중 전자는 위에 거론하였던 [제영시]에 의하여 대표되고, 후자는 충정공의 '묘지'에 의하여 대표된다. 이 두가지 기록 중 무엇이 더 정확한지는 나로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황대전고' 이(珥)가 13세 대린(大鱗)의 3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정공의 '묘지'가 더 앞서는 시기의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그렇다면 충정공의 '묘지'를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하여 볼 따름이다. 그렇지만 내가 김준식씨로부터 전해받은 자료들 속에는 아쉽게도 충정공의 '묘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충정공은 고려 문종(文宗)때의 현신인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의 둘째 아들이다. {예안파보}에 의하면 문안공 김양감은 문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우승, 어사대사, 문하시랑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이르며, 시호가 문안공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김양감 조에는 '생몰년은 미상이고, 고려의 문신이며, 본관은 광양(光陽)'이라고 하였고, 벼슬살이 이력을 상세히 소개한 말미에 "이자겸(李資謙)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하기도 한다"고 적혀있다.
여기 나오는 '광양'이라는 본관은 '광산'의 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예안파보}에 의하면 이 김양감은 시조로부터 7세이고, 2남 1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장남은 약온(若溫)으로, 구명(舊名)은 의문(義文)이며, 자(字)는 유승(柔勝)이고, 문종때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 하였고, 문하시중으로 치사하였는데, 향년은 82세, 시호는 사정공(思靖公)이라 한다. 차남은 의원(義元)인데, 1066년(문종 20년)에 출생하여 성균시(成均試)로 등과하며, 예종(睿宗) 4년에 길주 관외(關外)에서 여진족을 토벌하였고, 의종(毅宗) 2년에 83세로 타계하니,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충정공 김의원은 바로 1066년에 출생하여 1148년에 타계한 인물이다. 이 김의원의 '묘지'에 위에 인용한대로 '길'(佶) 이전의 가계는 모두 '실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안파보}는 광산김씨의 상대(上代)를 서술함에 있어서 이 김의원의 '묘지'를 크게 참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1세 흥광, 2세 식(軾), 3세 길(佶) 등으로 계대를 적어두고 있으면서도 식이 흥광의 자식이라든지, 길이 식의 자식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3세 길 이후의 계대가 분명하게 부자관계로 표현되고 있는 것과는 양상을 달리한다. 그러한 편찬태도는 {예안파보}의 3세 길 조항에 적혀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된다.
"삼가 살펴보건데 충정공 '묘지'에 길자(佶字)로부터 이상은 모두 실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왕자공(王子公) 이하 여기까지는 계서(系書)하지 못하고 후일 확증을 기다린다."(몇 글자 수정)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앞의 신라 왕자 흥광을 말하는 부분에서 인용하였던 구절들 중 '구속에 족보가 없으니 모두 실전하였다'고 하는 구절이다. 이것이 과연 충정공 묘지문의 정확한 해석인지, 충정공 묘지문이 쓰여지는 시기가 언제인지는 상고하여 보아야 할 일이지만, 충정공 김의원 당대를 묘지문의 작성 시기로 동일시하여 보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김의원의 시대에는 여기 인용구에서 이른바 '족보'로 지칭되는 어떤 기록이 만들어지고 있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족보'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 연원이 되는 보첩이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물론 그 기록은 소략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을 터이고, 계대를 빠짐없이 다 기록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광산김씨 상대의 사적은 {예안파보}에 3세로 기재되어 있는 김길(金佶) 때부터 어느정도 역사성이 분명하여 지는 모양이다. 김길은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으로, 왕건의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공신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김길의 아들은 준(峻)인데, 삼중대광좌복사(三重大匡左僕射)였다. 김준의 아들은 책(策)으로, 광종(光宗) 때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김책의 아들은 정준(廷俊)으로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김정준의 아들은 양감이다. 김양감으로부터 김의원까지의 사적은 앞에서 소략하게 언급한 대로이다.
"우리(광산김씨)는 고려 중엽 이후에 개경으로 진출하여 큰 벼슬을 하게 되었어요. 중시조는 양간공(良簡公) 연(璉)입니다."
김준식씨의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 보았듯이, 광산김씨는 고려초부터 이미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여러 현달한 인사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준식씨의 이 말은 아마도 9세 이후 13세까지, 광산김씨의 중앙관계 진출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시기를 전제하고 하는 말일 터이다. 그러나 이 시기, 즉 광산김씨의 세력이 위축되어 있던 시기는 무인정권 기간과 겹치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고려 초에 족적을 남겼던 모든 가문이 겪는 일일 것이고, 광산김씨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광산김씨 예안파를 전제로하여 말한다면, 예안파의 가계가 젖줄을 대고 있는 11세 주영(珠永)의 상계가 불투명하며, 주영 이후의 세계에서 최초로 시호를 하사받는 사람이 연(璉)인 것은 분명하므로, 김연을 광산 김씨 예안파 계열의 중시조로 보는 김준식씨의 견해도 크게 틀리다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다.
"공의 휘는 해(垓), 자는 달원(達遠), 그 선조는 광주인(光州人)인데, 고려 때에 광존(光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공으로부터 12대조이다."
{근시재문집} 속에서 김광계(金光繼)가 아버지 근시재 김해의 가장(家狀)을 쓰면서 선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광주김씨 25세인 김광계는 자신들의 가계를 김광존까지만 끌고 올라가는 것이다. 김광존은 앞에서 거론한바 있는 김주영의 아들이다. 김광계가 자신의 가계를 김광존으로부터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나, 김준식 씨가 광산김씨 예안파의 중시조로 김연을 꼽는 것은 다 똑같은 의미의 반경 위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결국 김주영의 상계가 불투명하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12세 김광존의 아들로는 대린(大鱗)이 있다. 김대린은 3남 1녀를 두었다. 첫째는 규(珪)로, 옛 이름은 찬(贊)인데,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태학사로 치사하였다. 셋째는 앞에서 거론한 바 있는 이(珥)이다. 둘째는 바로 김준식씨가 중시조로 언급하고 있는 연(璉)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가계는 이 김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김연은 옛 이름이 중룡(仲龍)이고, 자가 기지(器之)이며, 고려 고종 2년(1215년)에 출생하였으며, 벼슬은 병부시랑, 형부 상서 등을 거쳤다. 충렬왕 때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동정(東征;왜 정벌)할 때 이용할 전함 건조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허리에 찼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을 스스로 '신장(身章)이 이미 갔으니,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해석하여 퇴직을 주청해서 도첨의(都僉議)로 치사하였다. 충렬왕 신묘년(辛卯年; 1291년)에 타계하니,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김연의 큰 아들은 시호를 정경공(貞景公)이라고 하는 사원(士元)이고, 김사원의 아들은 호가 적제(迪齊), 시호가 장영공(章榮公)인 진( )이다. 김진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다섯 아들은 봉익대부 전리 판서령 3사사(奉翊大夫 典理 判書領 三司事) 광리(光利), 좌사의대부 판군기감사(左司議大夫 判軍器監事) 영리(英利),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성리(成利), 판도판서(版圖判書) 안리(安利), 그리고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천리(天利) 등이다. 광산김씨 예안파는 다섯째 천리에게로 연결된다.
"광산김씨 후손 중에는 둘째분(영리) 계열이 제일 많지요."
김준식 씨가 말하였다.
"거기가 사계집입니다."
사계집이란 아마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계열을 뜻하는 것일 터이다.
"광산김씨는 양간공(김연) 계열이 가장 많습니다. 한 7할은 되지요. 그리고 양간공 계열 중에서는 이 둘째분 계열이 또 가장 많아요. 영리공 계열 외에는 또 우리 천리공 계열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천리는 충숙왕 복위 2년(1333년)에 출생하였고, 몰년은 미상이다. 그는 조선왕조에 입사하였다고 하니, 상당한 장수를 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천리의 아들로는 희선(希善)과 무(務) 형제가 족보에 등재되어 있다. 김희선은 자식이 없었다고 하니, 이 계열은 전적으로 김무의 후손들이라고 하겠다.
서두에서도 말하였다시피, 안동으로 낙향하는 것은 바로 이 김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은 천리의 아들 무 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주석씨가 광산김씨에 대해서 적어놓고 있는 글을 보면 영리 계열도 안동에 낙향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는 파조인 영리의 증손 때에 퇴촌공파(退村公派; 파조 閱, 호는 退村, 형조좌랑 역임)로 다시 갈리어 나간다. 퇴촌의 증손 용석(用石;1453년생, 호는 潭庵)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어… 연산 무오(1498년)에 스승 점필재( 畢齋; 김종직)가 부관참시 되고 많은 사류가 화를 입는 사화가 일어나니, 진취의 뜻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안동 구담촌(九潭村)으로 이거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광산김씨는 안동 일원에 두 계열이 들어와 살게 된 셈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은 김천리 계열의 김무이다. 김무가 안동에 입향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130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고, 김영리 계열의 김용석이 안동으로 내려오는 때는 1400년대 말이라 할 수 있으니, 그 두 계열의 입향시기에는 1백여년의 시차가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김무는 안동으로 내려와서 처음에는 남선면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고려 말에 안동으로 낙향하셨어요. 남선면, 풍천면 등으로 옮겨다니며 살다가 예안 오천(烏川)에 세거지를 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김준식씨가 말하였다.
"소감(少監; 金務)의 아들 목청전 직(穆淸殿 直) 숭지(崇之), 손자 음성현감 회(淮)가 풍산 도양동(道陽洞)에 거주하다가 증손 성균생원 효로(孝盧; 1454-1534) 때에 예안 외내(烏川)에 정착하게 된다."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2.[종가]-광산김씨 예안파의 오백년 세월 광산김씨 예안파 … 외내 시대
광산김씨 예안파의 외내시대는 김효로로부터 시작된다. 이 계열은 가계로 치면 김무의 둘째아들 김숭지에게까지 이어지지만, 예안파라고 하는 이름이 예안에서의 삶을 전제로 한다면, 적어도 이 계열을 파보에서 지칭하듯이 '예안파'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에는 파조를 김효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회의) 아들 효로가 성종년간에 출사하였으나 영달을 단념하고 유벽하면서도 풍광이 아름다운 예안에 터전을 잡았다."
'오천 문화재 이건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오천 군자리}(烏川 君子里)라는 책자의 기록이다.
"오천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오백오십년 간의 세거지이다."
이 또한 {오천 군자리}의 기록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종가는 김효로 때부터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될 때까지 오천리를 터전으로 하여 끈질기게 전개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광산김씨 오천 입향조인 김효로는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상락군 김방경과 앞뒤로 자리를 잡고 벌써 오랜동안 묘지 속에서 잠들어 있다. 김효로(1454-1534)는 자가 순경(舜卿)이고, 호는 농수(聾 ) 또는 춘포(春圃)이다.
"단종 갑술생이고 경자(庚子)에 생원이요, 조행(操行)이 탁이(卓異)하여 일천(逸薦)으로 장차 현달할 전망이 있었으나, 무오사화를 당함에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으며, 후학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향사한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숙종 임오년에 사림이 현 동쪽에 사당을 세우고 이계양(李繼陽; 퇴계의 조부)과 김효로를 병향하고, 사우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오천 군자리}의 김효로 관계 기록이다.
"공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외조(外祖) 경산현령(慶山縣令) 노응(盧膺)에게서 자랐으므로 이름을 효로라 하였고, 그 후로는 종조부(從祖父) 효지(孝之)에게 양육을 받아서 이내 예안현 오천마을에 살았다."
역시 {오천 군자리}에 보이는 이황의 김효로 [묘갈명](墓碣銘)의 한 구절이다.
김효로의 부친 김회는 효원(孝源)과 효로 두 아들을 두었는데, 효원은 후사가 없었다. 효로는 양성(陽城)이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김효로의 아들 연(緣)은 자가 자유(子由)이고 호가 운암(雲巖)이다. 성종 정미년(1487년) 출생으로, 생원시, 진사시, 문과, 중과(重科)를 거치며,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갑진년(1544)에 타계하여 와룡에 묻힌다. 그의 이력 중에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다가 출척(黜斥)되어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된 일이다. {예안파보}에 의하면 김안로가 실각하자 중종이 그를 불러서 '안로의 사악함을 알지 못하고 무고한 사람을 원읍에서 고생케 하였다'고 위무하였다고 한다. {오천 군자리}에 수록된 채제공(蔡濟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이 일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사실을 알려준다.
"…갑신년(1524년)에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공이 김안로의 간사함을 항상 미워했는데, 대간에 들어와서 반달을 지내는 동안 복합항쟁하여 그를 귀양보냈다.… 정유년(1537년)에 사예(司藝)를 거쳐 군자감 정(軍資監 正)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승진했다. 앞서 안로의 무리인 채무택(蔡無擇),심언광(沈彦光)이 모의하여 안로를 다시 조정에 끌어들이려고 하자, 공이 회재(晦齋) 이선생과 함께 불가함을 고집했는데, 이로 인해 그 무리들의 원망이 컸다. 이 때에 안로가 재집권하고, 밤낮으로 공을 중산하려고 꾀했으나 단서를 얻지 못했는데, 마침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안로의 모함에 걸려 죽임을 당하자, 드디어 전한(典翰) 소봉(蘇逢)을 시켜서 공이 당성위와 매우 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간관 벼슬을 떼고 군자감 판관으로 전임시켰다가 잠시 후에 경성판관으로 보냈는데, 경성은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곳이었다. 두어달이 지나서 안로가 쫒겨나 죽자 다시 사관으로 임명되어 소환했다."
채제공은 김연으로부터 2백년 뒤의 사람이지만, 이 [묘갈명]은 김연의 아들 읍청정( 淸亭) 김부의(金富儀)가 지은 김연의 행장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하니, 그 사실성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김연은 회재 이언적과 친교가 깊었었던 것 같다.
"일찍이 회재 선생과 도의로 사귐을 맺어서 흥해 원으로 있을 때에는 옥산서재(玉山書齋)에 여러번 가서 학문을 토론했고, 경주부윤으로 와서는 학문의 강론이 더욱 긴밀하였다."
역시 채제공이 위의 글에서 적고있는 말이다.
김연의 아우 김유(金綏;1491-1555)는 자가 유지(綏之)이고,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그는 호방하고, 운치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성품이 호협하여 빈객을 좋아했는데 옛날 현감공이 우암(愚巖) 위에 정자를 세워 낙동강을 굽어보기 때문에 침류정(枕流亭)이라 이름하였다. 또 집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공이 모두 수리하여 확장하고 손님을 맞아 즐기며 혹은 밤을 새우되 피로한 빛이 없으니 선비들이 이 고을을 지나면 반드시 찾아와서 즐기었다. 비록 폐의파립한 사람이라도 친절히 대접하고 만일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준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이황이 지은 탁청정의 [묘지명]에 나오는 글이다.
김연은 창령 조씨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고, 김유는 순천 김씨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이 김연과 김유의 자식들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성가를 결정지워준다.
"오천은 원래 봉화 금(琴)씨 터전이었어요. 봉화 금씨 터전으로 우리 광산김씨가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오천은 금씨와 김씨가 어울려 사는 터전이 된 것인데, 입향조(김효로)의 손자이신 후조당(後彫堂)의 형제 종반들 사이에서 7군자가 나셨지요."
김준식씨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후조당(金富弼)촵읍청정( 淸亭;金富儀)촵산남(山南;金富仁)촵양정당(養正堂;金富信)촵설월당(雪月堂;金富倫)촵일휴당(日休堂;琴應夾)촵면진재(勉進齋;琴應壎) 등을 칭하여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고 한다."
{오천 군자리}에 나오는 말이다.
"후조당과 읍청정은 형제분이고, 산남촵양정당촵설월당은 후조당의 사촌 형제분들이고, 일휴당과 면진재는 외사촌들 이시지요."
김준식씨가 말하였다.
결국 '오천 7군자'는 한집안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이들 한집안 일곱 형제들은 어떻게 '7군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는 것일까? {오천 군자리}는 {선성지}(宣城誌)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리(君子里)는 현의 남쪽 5리 쯤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오천리가 그곳이다. 그 마을 사람 김부필, 김부인, 김부의, 김부신, 김부윤, 금응협, 금응훈 등은 모두 퇴계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도의와 덕행이 모두 출중하였으므로 정한강(鄭寒岡)이 일찍이 감탄하여 '오천 한 마을에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이어받아서 그렇게 이름하게 된 것이다."
{오천 군자리}가 {선성지}에서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이 말은 오천마을이 당대 영남유림을 주도하여 나가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유림은 출신보다는 도의와 덕행의 함양을 우선적 가치로 간주하던 사람들임을 염두에 둔다면, '오천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평가가 최상급의 형용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후조당 김부필은 광산김씨의 23세에 속하고, 22세 김연의 큰아들이다. 그의 자는 언우(彦遇)이며, 후조당은 그의 호이다. 1516년(중종 11년)에 낳아서 1577년(선조 10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출중하였고, 정유년(1537년)에는 사마시에 합격까지하여 명망이 드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사정을 {오천 군자리}에 수록되어 있는 김조순(金祖淳)의 김부필 시장(諡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알려준다.
"갑진년(1544년)에 운암공이 별세했고, 다음 해에 중종이 승하하였고, 또 그 다음 해에 복을 벗었으나, 과거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명종 말년에 조정에서 공의 착한 행의를 듣고 비로소 사관(祠官)으로 등용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렇게 김부필은 벼슬에는 별 뜻이 없었던 듯 하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무진년(1568년)에 효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퇴계가 서울에서 편지를 보내 출사를 권유하자 그가 화답하였다는 시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건너산 구름에게 한마디 묻는다.
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승천을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가?
펼치고 모음은 내게 달려있는 것이지만
또한 신룡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구름은 말한다."
이 시는 정황상 벼슬길에 나가고자 하지 않는 김부필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황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출사를 마다하는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가 선망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인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상황 속에서 벼슬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김부필의 답답한 소회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김부필은 호를 후조당이라고 한다. 이 후조당이라는 호는 앞에 인용하였던 김조순의 글에서는 자호의 느낌이 강하다. 김조순의 글을 살펴보자.
"…나가서는 퇴계선생을 사사하되 매우 삼가서 명리로써 마음에 두지 않았다. 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당의 편액을 '후조'로 써 걸었는데,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아는 이가 없었다."
{예안파보}에는 김조순의 이 글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을사사화 이후 누차 재랑(齋郞)을 제수하였으나 불취(不就)하니, 선생(이황)이 호를 후조당이라고 명하고 시를 지어주되…"
이 {예안파보}에 의하면 후조당이라는 호는 이황이 지어 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표면상 이 두 구절은 상호 배치되는 감이 없지 않은데, 어쩌면 김부필이 후조라는 편액을 내건 것은 아직 당명일 뿐 호로 사용한 것은 아닌데, 이황이 후조당을 호로 사용하라고 적어보낸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천 군자리}에 의하면 이황이 이 때 적어보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후조당 주인의 굳은 절개
벼슬을 내려줘도 즐거워 않네
매화를 마주해 앉아 빙설의 향기 풍기고
도의 실재를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도리를 읖조리네."
후조당 김부필은 배위가 진주하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아우 부의의 자식 해(垓)로 후사를 이었다.
"읍청정(김부의)은 하나뿐인 아들 근시재(김해)를 형님인 후조당에게 양자를 보내고 당신께서는 따로 양자를 들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두 분을 다 모십니다."
김준식씨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후조당집이라 일컫는데, 웃대에 운암이 계신데 후조당집이라 하는 것은 벼슬보다 도덕촵학문이 우선이기 때문에, 도덕촵학문으로 후조당을 대표시켜 말하는 것이지요. 도산 입원록에도 후조당이 제 1번으로 등재되어 있어요. 후조당에게 문도가 없는 것은 도산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학생들을 전부 도산으로 보낸 탓이지요. 문도가 없어도 후조당의 덕행과 학문은 근동의 누구나가 다 인정을 하였던 것이지요. 율곡선생이 후조당의 부음을 듣고 '정의가 인멸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글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김준식씨는 질문을 던질 사이도 없이 선대로부터 후조당까지의 사적을 길게 이어나갔고, 후조당을 뛰어넘어 근시재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도덕·학문하는 선비의 집안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집안을 후조당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은 우리 집안에서 가장 가문을 빛낸 사람은 근시재라고 말들을 합니다. 국가에 기여한 분으로는 근시재가 으뜸이지요."
근시재 김해는 김부필의 아우 김부의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김부의의 자는 신중(愼仲)이고, 호는 읍청정이다.
"일찌기 퇴계 문하에 종유하여 독지위학(篤志爲學)하니 선생(퇴계)이 '선기옥형'(璿璣玉衡;혼천의)을 만들도록 명하고, 또 호를 지어 주었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처음 역동서원을 다 지은 후 고을에 어진 장자가 적지 않았으나 선생이 특히 공을 산장(山長;원장)으로 추천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허락치 않으니, 선생에게 중하게 보인 바가 이와 같았다."
김부의는 1525년에 태어나, 1582년에 향년 58세로 타계한다. 근시재 김해가 태어나는 것은 1555년의 일이다.
김해의 자는 달원(達遠)이고 호는 근시재이다. {근시재문집}에 의하면 그는 정해년(1587년)에 행의(行義)로 추천되어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에 다시 참봉이 제수되었을 때에는 서울에 있었던 관계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마시를 치르고는 얼마 후에 사직서를 내고 돌아와 유성룡촵김성일 등과 더불어 병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을 수정하는데 참여한다. 그러다가 기축년(1589년)에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 보임되고, 예문관 검열(檢閱)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이 해에 동료들이 사초를 태운 일에 관련되어 파직된다. 김해는 원래 이 일에 관계가 없었으나 변명하지 않고 전리로 돌아온다.
김해의 사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임진난에 창의해서… 좌도의진(左道義陣)을 편성하여 대장으로 추대됨에 적을 추격하여 남하하다가 계사년(1593년) 6월 19일 경주 진중에서 졸(卒)하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안동의병장 이공 정백(庭栢), 배공 용길(龍吉)을 좌우 부장으로 삼았다."
{근시재 문집}에 보이는 '좌도의진'의 모습이다. 의진의 모습은 꽤 규모있게 갖추었으나 세력이야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대부분의 의병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김해를 수장으로 하는 '좌도의진'도 의기만이 드높은 집단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일찌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사령의 명을 받았고 병사들의 세력은 외롭고 약할 뿐이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세력이 궁진하면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근시재 문집}에 보이는 김해의 이러한 말은 당시의 사정을 말하여준다.
김해는 계사년 5월에 밀양에서 부인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집으로 달려와서 하루를 부인의 시신 옆에서 머물고는 다시 의병진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병을 얻는다. 그리하여 경주 진중에서 타게하니, 향년 39세, 아까운 나이였다.
"백년 사직을 안존시킬 계책으로
6월에 전복을 입고 나섰네.
나라를 위하여 몸이 먼저 죽으니
모친 생각에 혼이 홀로 돌아가누나."
{근시재 문집}에 실려있는 김해의 <절명시>이다.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전에, 홀로 있는 모친보다도 앞서서 죽어가는 쓸쓸함이 배어있는 시라고 하겠다.
분명히 광산김씨 예안파의 외내시대의 정점은 바로 '7군자'와 근시재 김해가 활동하던 때라고 하겠다. 김해의 의병활동은 물론 그 혼자의 의로운 행위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후손들은 진중에서 장려하게 죽어간 김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선생(김해)의 뒤를 이어 장남 김광계(金光繼;梅園公)도 병자호란 시에 예안의병장으로 창의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역시 의병장으로 죽령까지 출진…"
3.[종가]-광산김씨 예안파의 오백년 세월 오천 '군자리'
고향을 갖는다는 것은 꿈을 갖는 것을 의미하고,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백년 계속 살아온 한 가문의 세거지를 갖는다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광산김씨는 김효로가 예안 오천에 입향한 이후 안동댐의 건설로 삶터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된 때까지, 5백년 가까운 기간을 세거하여 살아왔다. 안동댐의 건설은 그들의 6백여년 세거지를 물 속에 묻어버리게 한 것이다. 고향을 물 속에 묻어두고 집과 삶터를 옮겨야 하였던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그러한 마음의 일단을 {오천 군자리}의 간행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감상적인 글귀로 표현하여 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고향은 더욱 정겨운 환상으로 나타난다. 왜 그런지 고향은 항상 우리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 조상의 그늘에서 자랄 때부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모두 뼈에 사무쳐 있고, (우리가) 머리 속에(그런 것들을) 깊이 새기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래 몸에 익은 것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것은 비단, 그것이 가치를 지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옳지 않은 것일런지도 모른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저 혼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서가 만들어내는 추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래 우리 몸에 익고, 우리가 그것과 정서적으로 연계되어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 가치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5백여년 동안 대를 이어서 살아오던 고향은 물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건물들이나마 어딘가로 옮겨서라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오천 군자리, 오천 문화재 단지의 모습으로 귀결되었다고 하겠다.
"이 단지 내에 있는 옛 건축물들은 문중에서 대대로 유지 보존하여 온 종택, 묘우(廟宇), 정사(亭 ), 강당 등으로, 지난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될 때에 원 지점으로부터 약 2키로미터 떨어진 이 곳으로 집단 이건되어 아쉽기는 하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행정 구역은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이었으나, 현재는 와룡면 오천동으로 편입되었다."
안동에서 예안으로 나가는 굽은 길의 한쪽으로 산 중턱을 문지르고 들어앉아 있는 오천 문화재 단지. 그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군자리'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 마을 이름이 '군자리'인가요?"
나는 김준식씨를 만났을 때 물어 보았다.
"아닙니다. 원래는 그냥 오천, 외내지요. 옛날 정구 선생의 말을 근거로 해서 세거지를 옮기면서 적어 놓았는데 이제 20년이 지나니 통칭되기에 이르렀지요."
김준식씨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건물들을 한데 모아서 옮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어른이 주로 중심이 되어서 일을 하시고, 나는 보조를 하였지만, 잡음도 있었고, 부자가 욕도 많이 얻어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요즘 와서는 잘 했다고들 하지요. 재현시켜 놓은 것은 우리 부자 덕분이라는 말들을 해요."
사실 한 가문의 힘으로 오천 문화재 단지 같은 것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조차 힘든 일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물론 광산김씨 일문의 힘 만으로 건물들을 옮기고, 관리하고 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정부가 보조를 하였고, 또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의 보조보다는 광산김씨 일문의 투자가 더 큰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복영씨와 내가 방문하였을 때, '군자리' 문화재 단지는 텅 비어 있었다. 산자락을 깎아 2층의 넓은 터를 만들고, 아래쪽에는 주차장을, 위쪽에는 앞으로 터진 부분을 마당으로 비워두고 산기슭의 밋밋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10여채의 고옥들이 반월형의 호를 그리며 배치되어 있었다. 위쪽의 마당 끝에서 앞을 향하면 산자락 사이의 좁직한 분지가 횡으로 열리고, 그 정면으로 뚫고 들어온 앞산이 호박덩이 같은 형상으로 자리잡고 앉아 분지에 만곡의 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둘러싼 산들은 다 나지막하였으며, 어느 한군데 터진 부분이 없이 잘도 좁은 분지를 감싸 안아 주고 있었는데, 사방 빈틈없이 둘러쌓여 있으면서도 사선으로 열리는 하늘이 시원한 안계를 마련하여 주고 있었다. 아마도 분지의 바닥에 '문화재 단지'가 지어져 있지 않고, 산기슭의 중간 선 이상을 차고 들어앉은 탓일 것이었다.
우리는 마당에서 건물 쪽을 향하며 좌측 끝으로부터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좌측 끝집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있는 살림집이라고 하였는데, 한겨울이기도 하였고 또 점심무렵이라서인지,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이 오천 군자리 '문화재 단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후조당 고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죄측 끝으로 마련되어 있는 24개의 돌계단을 밟고 별당 쪽으로 들어갔다. 중요민속자료 227호인 후조당 고택의 별당은 기름칠하여 잘 관리된 오래된 송판의 미끈한 색감으로 우리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무의 색깔을 보아요."
김복영씨가 감탄하였다. 미상불 그러한 감탄은 나의 것이기도 하였다.
된장도 오래 묵은 것은 감칠맛이 나게 마련이다. 오래 사귄 친구들이 만나는 것을 보면 공연히 보는 사람의 마음부터 흐뭇하여지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세월의 덮개가 입혀질 때에 아름다운 느낌이 배가되는 것들이 있다.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철이나 플라스틱 같은 것들은 이러한 점에서 예외라고 하겠지만, 나무는 세월과 잘 사귈 수 있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나무만큼 세월이 더하여질수록 미감과 품격이 한결 뛰어나게 갖추어지는 것이 또 있을 것인가?
후조당 고택의 별당채의 건물 외면을 둘러싸고 있는 목재들로부터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탁한 검은 빛과 밝은 갈색이 흑과 백으로 분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송판들, 단순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갖추고 있는 문짝들의 가라앉은 색깔, 석까래와 기둥들의 색감… 밝은 미색의 매끈한 모습을 하고 한쪽 처마 밑에 붙어 있는 '분정판'(分定板)과, 그 판 위에 먹물로 분명하게 쓰여진 한자글씨를 제외하고는, 별당의 처마 밑으로 휘도는 바람이나 별당이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하늘까지, 모든 것이 다 수백년 풍상에 수더분하게 조탁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세월의 풍상에 의하여 가라앉은 색깔의 찬란한 광휘, 오천 문화재 단지는 한마디로 그런 느낌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는 곳이었다. 세월이 미더운 색깔로 변해 흘러 넘치는 곳! 바로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러한 느낌은 새로 지은 두어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에서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별당의 좌측 끝에는 참으로 날렵하게 생긴 작은 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통상적인 건물의 비례에 비해서는 가로의 길이가 세로(높이)보다 짧게 지어져 있다고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실제로 가로보다 세로가 짧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 익은 건물들 보다 깔고앉은 터의 가로면 길이가 짧고, 높이가 더 길어보이는 건물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우리 눈이 익숙한 비례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으므로, 이 건물은 실제보다는 날렵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사당 건물의 문 앞쪽으로는 가로 5미터 세로 1.5미터 정도의 뜨락이 시멘트로 지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비닐로 짠 자리가 사방 모서리가 돌로 눌려진 채 깔려 있었다. 사당의 문은 창호지가 여러군데 찢겨져 나갔고, 그곳을 통해서는 그 안쪽이 들여다 보였다. 이 사당은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 김효로와 임난 의병장 김해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라 하였다.
오천 문화재 단지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유물각이라고 한다. 여기 옮겨진 건물들도 다섯이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유물각 안에 수장되어 있는 것들은 그보다 몇갑절 가치있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물전시관인 숭원각(崇遠閣)에 보존되어 있는 역사자료이다."
{오천 군자리} 속의 한 구절이다. 유물각 안에는 휘귀 고서, 문집류 등이 2천5백여 점,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고문서들 2천여 점이 있으며, 이 중 고문서 7종 4백29점과 전적 13종 61점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천 문화재단지는 광산김씨의 소중한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겨레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천 문화재 단지의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자랑과 애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광산김씨 예안파에서 엄청난 노력과 수다한 자산을 투입하여 굳이 이 문화재단지를 만들고자 한 것은 그것이 과거의 자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자산이 되기를 바랬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천 군자리}의 간행사에서 "이제 우리가 새 고향 새 터전을 한마음 한뜻으로 이룩하였으니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빛나는 조상들을 배우고 익히는 교육의 도장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나는 이러한 광산김문의 소망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를 끌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산으로 삼아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지혜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갖추어내야 할 삶의 바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비단 광산김문만의 숙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풀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오늘의 숙제인 까닭이다.
김준식씨의 작은 혁명
'오천 군자리'를 탐방하고 나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내 대림혼다 안동 특약점 안쪽의 좁은 방에서 광산김씨 예안파 종손인 김준식씨를 만났다. 사업을 하면서 안동문화원 부원장 직함을 가지고 있기도 한 김준식씨는 당당한 체구를 갖추고 있는 초로의 신사였다. 선이 굵은 성격에 완력도 있어 보이는 그는, 현대의 세례를 받아 하얀 와이셔츠를 잘 차려입고 반백의 머리칼도 기름을 발라 반듯하게 빗어넘긴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발인 채로 미리 예약이 되어 있는 손을 맞는 것으로 보아, 소탈하고 우직하기가 마치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노란색과 탁한 남색이 적당히 어울려 있는 넥타이를 매었고, 손과 발, 얼굴이 다 퉁퉁하고 큼직하였다.
"자는 응순(應順)이요, 무인년(1938년) 5월 6일 생이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김준식씨는 광산김씨 39세이고, 광산김씨 예안 오천 입향조인 김효로의 19대 손이다. 그는 광산김씨 38세인 창한(昌漢)의 아들인데, 창한은 그의 양부이다.
김창한은 자가 문견(文見)인데, 배위는 영천이씨이다.
김준식씨의 생부는 창한(昌漢)의 아우 택진(澤鎭)이다. 김택진은 자가 여옥(汝玉)이고, 아호는 죽초(竹肖)이며, 전국유도회 부회장을 지냈는데, 배위는 무안박씨이다. 그는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를 형에게 양자 보낸 것이다.
"우리는 나까지 포함해서 세 번을 양자를 했어요. 양자도 조카들로만 했으니, 뭐 양자라고 할 수도 없지요."
김준식씨가 말하였다.
"나는 18대 봉사를 하고 있어요. 영남 유문들이 대개 18대나 19대 봉사를 하고 있지요."
김준식씨는 그만큼 유서깊은 가문을 지키고 있는 종손인 것이다. 그의 강건해 보이는 두 어깨 위에 5백년 세월이 올라앉아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나는 조상 이야기 자꾸 하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말로 우리를 맞았던 김준식씨였다.
"다 알려진 일들인데, 새로 할 이야기도 없고…"
그러면서도 김준식씨는 광산김씨의 원조인 신라왕자 이야기로부터 '오천 군자리'의 문화재 단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의 세월을 오고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힘없이 들려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듣고 싶은 것을 질문하세요."
아예 질문조차 막아버리고 시작한 김준식씨의 장광설은 조상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첫마디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도도한 이야기를 타고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그 오랜 이야기의 마디마디에는 김준식씨의 조상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짖누르고 있는 18대 종손으로서의 책임감이 어찌 그 자랑감을 그의 마음 속에서 밀어낼 수 있으랴! 그의 그러한 자랑감은 그의 자식들에게도 이어져 갈 것이다. 그는 2남 2녀를 두고 있는데, 그의 책임감과 자랑감은 송두리채 장남인 석중(碩中)씨에게로 전해질 것이었다. 물론 61세인 김준식씨의 마음 속에서 평생을 힘겨루기를 하였을 자랑감과 책임감 사이의 역학관계는 아들 석중씨의 마음 속에서는 다른 값을 가질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와 사람은 달라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38살에 서울서 직장 다니다가 내려왔어요. 수몰 되면서…"
고향의 수몰은 종가를 지키고 있던 어른들을 긴장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문의 위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젊고 힘있는 종손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리라!
"죽이 끓든 뭐가 끓든 내 몰라라 했으면 그만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엄청나게 변화하던 때라서… 지금 와서는 후회가 되기도 해요."
그는 30대의 후반에 그 혼자만으로는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의 기로를 맞았던 것이었다. 5백년 세월을 지고 다가오는 가문의 전통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싸움의 승자는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종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그가 5백년 세월을 버리고 혼자만의 신세계를 꿈 꿀 수는 없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호흡하는 그의 예리한 눈과, 가슴 속에 묻어둔 젊은 날의 꿈은, 그의 마음 속에서 은밀하게 변화를 갈망하는 사상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불조위 제사는 3월 중정인데, 사람들도 많이 모이지 않고… 사람 안 모이는 조상제사는 형식이 아니냐 해서… 음력 3월 둘째 일요일 낮에 지내지요. 낮에 지내니까 참 좋아요. 놀러가는 셈 치고 모여서 지내지요. 사람들도 많이 오고, 아이들도 오고… 한 십여년 그렇게 지냅니다. 복주는 전통적인 법식대로 하지만, 복반은 도시락으로 해요. 죽 둘러 앉아가지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도시락을 먹어요. 간편하고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김준식 씨는 자신이 중심인 가문의 전통 속에서 작은 혁명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를 따라잡으며 종가의 전통을 여전히 후손들의 삶의 중심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여러가지를 현대적으로 간단하게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을 떨쳐버리고, 그 시대가 요청하는 예법을 찾아내야만 해요. '가가예문'이라고 했듯이, 예문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옛 법을 지키고 있는 곳, 여기 안동에서 시대에 맞게 예법을 고치는 향도적인 역할을 해야 해요. 어느 시점에 가서는 향중이 모여서 바꾸고… 안동에서 우리 스스로 고쳐 나간다면 전부 바뀌어질 수 있을 것이예요."
그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곳에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의 말은 맞는 것이었다. 바꾼다는 것에는 두가지 양상이 있는 법이다. 그 의미와 가치가 완전히 힘을 잃은 곳에서 바꾸어버리는 것과 그 의미와 가치가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곳에서 바꾸어 나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체가 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과거와 현재의 진실한 대화가 있게 마련이다. 바꾼다는 것만을 취한다면 전자의 경우가 훨씬 쉽고 간편하다. 그러나 역사의 유산을 현재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게 하면서 바꾸어 나가고자 한다면, 후자 쪽이 나은 것일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준식씨는 많은 것을 이미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10월 한달은 제사만 지내야 하지요."
김준식(金俊植)씨가 말하였다.
시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혁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날 갑자기 낯선 시대에 떠밀려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 김준식씨의 작은 혁명이 현대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종가의 삶이 단단하게 터전을 잡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원하여 본다.<자료:안동인터넷(사랑방 안동문화 [54호], 글:윤천근(안동대 국학부·동양철학))>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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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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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일요일인데 출근하셨군요
합천 답사팀 일행들은 지금쯤은 귀경중 이겠지요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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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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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반갑습니다!
김우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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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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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렇게는 어떻게 올리는것인지...수고와 잘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300년간은 안동 하회(풍산 류씨)가 우리와 외손 하면서 긴인연이었듯이
그전에는 광산 김씨와 300여년간 그러했다고 하지를 아니한가 지금은 많이 익혀져 가지만 광산김과 풍산 류씨는 이러한 우리와 타문중과 달리 남다른 인연이 있음이 아니런가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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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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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광산김씨 예안파, 잘 공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