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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재 (9) 삼탄 이승소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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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4-11 12:18 조회1,3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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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純誠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

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摠莩摠管,弘文館提學,

陽城君贈諡文簡公墓誌


公諱承召。字胤保。姓李氏。陽城人。有諱沃。官至資憲留後司留後。諡靖節公。靖節生諱思謹。通政海州牧使。生諱蒕。是爲公考。肥遯不仕。以公勳。贈補祚功臣崇祿議政府右贊成。妣泰安李氏。通政,司諫院左司諫薈之女也。嘗夢龍異有娠。於永樂壬寅十二月戊子。生公。髫齔異凡兒。稍長。自知讀書。力學爲文辭。年十七。中進士試。歲丁卯春。及第。連魁三闈。世宗奇之。特授集賢殿修撰。秋。又擢重試。陞校理。遂拜應敎。轉司憲掌令,直集賢殿,世子弼善。轉成均大司成 進階通政。歷吏,戶,禮,刑四曹參議。己卯。如京師。庚辰。加嘉善,藝文提學兼成均司成,世子賓客。乙酉。觀察忠淸道。有惠政。丙戌冬。丁內外艱。服闋。拜禮曹參判,同知春秋館事,藝文提學。己丑冬。今上卽位。策勳賜純誠佐理功臣之號。封陽城君。辛卯。特階資憲。陞判書兼經筵。餘如故。自此常帶館閣。丁酉。入議政府。爲右參贊。明年。復長春官,弘文館提學。庚子。轉吏曹判書。國家將奏請中宮誥命。弓角新路。選重臣充使副使。拜辭日。副使以事被劾。上特命公代之。重其事也。復爲右參贊。及還。加正憲。辛丑。復長銓曹。壬寅夏。移刑曹。冬。特加崇政。拜左參贊。癸卯。遘疾。今成化甲辰正月戊戌。卒于家。享年六十三。訃聞。上悼甚輟朝。官庀喪事。遣使致祭。越三月廿七日甲寅。葬于果川縣治之北果谷洞坎坐離向之原。公狀貌端正。美鬚髥。莊重寡言。望之儼然。人一見。知其爲守道君子。而性溫仁淸簡。居官遇事。一循義理。不爲崖異。至於燕居。親朋至則必置酒酬酢。渾是一段和氣。人未嘗見其有喜慍之色。公少長於海州之三灘。釣魚養親。欲以終身。又念人子之道。莫急於顯揚。則乃出遊場屋。擢壯元。移孝於國。揚歷淸要。致位峻秩。雙親尙亡恙。紆金拖紫。萊舞於庭。親逝之後。臧獲財產。多分與諸弟。自取甚薄。宗族稱焉。博通經史。爲詩文。精深平淡。森嚴有法度。膾炙人口。累典貢擧。所得多聞人達官。再秉銓衡。門無雜賓。嘗以知禮。久在南宮。雖島夷野人。亦莫不起敬焉。公名高望重。爲世大相。而嗣子只以例補西班。旣歿。家無餘資。初公之病也。上遣中使問侯。御醫賜藥。交道不絶。公平生大節與夫哀榮終始。蓋如此。夫人鄭氏。嘉善同知中樞忠碩之女。生三男一女。長曰煕。司果。次煦。次晟。皆未娶。女適成均學正李孟思。司果娶郡守朴櫎之女。生三男一女。皆幼。學正生二男三女。皆幼。皇明成化二十年甲辰三月二十七日。嘉善大夫前吏曹參判金紐子固。略誌。

 

 

이승소(李承召)
1422(세종 4)∼1484(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고려조 시중 춘부(春富)의

현손이며, 병조판서에 증직된 온(?)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을 배수받았다. 이어 부교리·응교에

승진하고, 1454년(단종 2) 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예문관응교를 지내고, 1458년(세조 4)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 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다. 이어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1459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462년 예문관제학으로서 사성을 겸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 兵將說》을 찬수하였다.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사무를 잘 처리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활동을 크게 일으켰다.
1472년 민간에 산재한 조종의 법전을 거두어 춘추관에 보관하게 하였고, 제사(諸史)의 간행·보급을 주청하였으며, 1475년에는

교육의 강화와 해불론(害佛論)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를 주관, 인재등용에 힘썼으며, 왜인·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다. 이어 우참찬이 되고, 1480년

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노비 6구, 전지 40결을 받았다.
그러나 정사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사헌궁각사건(私獻弓角事件)에 연루되어 간관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뒤 이조판서·형조판서·우참찬·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드날렸으나, 1483년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상소하자, 한직인 중추원의

지중추부사가 되어 녹봉을 특별히 급여받았다.
성품은 우연히 사물을 접하더라도 힘써 대체(大體)를 알고자 하였고, 널리 독서하여 예·악·병(兵)·형(刑)·음양(陰陽)·율(律)·

역(曆)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청렴하여 집안을 장식함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志,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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