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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심장~ 의성 금성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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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5-04-19 14:11 조회2,08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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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명산(名山 ) 금성산, 옥녀산발형(玉女散髮型 ) 비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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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가음면 이리

 높      이 : 금성산 530.1m, 비봉산 671.8m

 등산지도

 특징 및 볼거리

 금성산과 비봉산을 동시 촬영한 모습

 

 

 

 

  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은 태백산맥(太白山脈) 지맥(支脈)의 하나인 보현산(普賢山) 부근에서 서쪽으로 가지 쳐 나와 서로 마주보며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의성군 남쪽 금성면, 사곡면, 춘산면, 가음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초입에서 바라보았을 때 북서쪽으로 장엄한 암석으로 둘러싸인 산이 금성산이고, 북동쪽으로 연접하여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마주 바라보고 있는 산이 비봉산이다.

금성산만을 촬영하였을 경우 (여름철)산 (火山) 또는 영남 땅에서 가장 많은 풍수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의성의 명산 금성산은 학록정사, 점우당, 운곡당, 소우당등  전통 고가옥이 즐비한  산운마을을 감싸고, 신라석탑 양식이  정립되기 이전의 것으로 신라지역에서 가장 고식(古式)의 작품이자   초층 탑신의  우주(隅柱)가 배흘림 기둥이면서  주두 받침이 있는 목탑요소와 옥개석의 낙수면이 층급을 이루고 처마선이 수평으로 되어있는 전탑요소를 지녀서 목탑, 전탑, 석탑의 세가지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특이한 양식의 높이 9.6m의 웅장한 국보 제77호 의성탑리오층석탑이 소재한 탑리를 끼고  우뚝히 솟아나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가마(轎) 형상을 하고 있어 일명 가마산이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서 대동여지산운마을내의 운곡당 내부모습도(1861년)까지 영니산(盈尼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후 금학산(金鶴山), 금산(金山)등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하는데 현재는 경주의 시도(始都) 금성(경주의 동쪽)의 이름을 따서 금성산이라 부른다고 하나 그 유래가 확실치는 않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상의 비봉산주 바라보고 있는 비봉산은 고려조 초기 병풍처럼 우뚝하니 솟아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봉황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하여 비봉산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하며, 산 남쪽 2㎞지점에 있는 구릉에 봉황이 날아와서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소리가 세번이나 들렸다하여 인접한 면의 이름이 가음(佳音)이라 하였다 하니  봉황과 관련이 많은 듯한데  산의 모양만을 볼 때에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型)모습을 하고 있는데 맞은 편에 있는   금성산에 올라  살펴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뒤로 풀어 헤친 채 누워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겨울철 의성산악회 자연보호행사겸 시산제하는 장면개의 산을 남쪽에서 바라보면 한 마리의 학이 봉황과 함께 나란히 날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요, 서쪽편 탑리에서 금성산을 보면 露積峯의 형상이요, 서북쪽 초천리에서는 가마의 생김새와 흡사해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자연사박물관처럼 금성산의 주변에는 자연자원이 많은데 문익점목면유전비 주변에 약 1억1,500만년 이전 중생대 전기 백악기 쥐라기시대 이곳은 공룡들의 낙원으로 세계최대의 공룡으로 알려진 탑리한외룡(限外龍- Ultrasarus tabriensis)을 비롯한 공룡들이 뛰어놀던 족적을 관찰할 수 있는 천연기념물 제373호 의성제오리의공룡안개에 덮힌 금성산발자국 화석지 방향에서 높은 산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둥글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타원형의 모습이 금성산과 비봉산을 중심으로 한 가운데가 움푹하게 내려앉아 말발굽 모양처럼 되어있는 모습이 7,100여년이전 백악기 칼데라에 의한 화산지형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산중턱 용암과 화산재의 흔적으로 화산암의 일종인 유문암질 용암과 응회암으로 구성된 띠 모양의 암석층이 산을 둘러싸면서 연속적으로 둥근 고리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화산이 분출한 분화구에서 용암이 빠져나간 공간으로 지각이 가라앉아 칼데라를 형성하고 오랫동안 비와 바람에 깎여 주변이 침식된 후에 침식에 강한 함몰부위가 주변보다 오히려 높아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경우 생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칼데라의 경우 깎아지른 절벽처럼 둘러서 있는 주변부 때문에 쉽게 구별이 가능하나 금성산의 경우에는 오랜 시간 풍화와 침식을 받았으나 칼데라의 밑둥치 부분이 미쳐 다 깎여 나가지 않고 남아 둥근 고리모양 단층의 바깥쪽보다 안쪽경사가 더 급한 것은 단층 안쪽이 꺼져 내려앉았다는 것과 더불어 석기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요 연장재료인 흑요석이 출토되는 것은 이곳이 화산지대임을 증빙해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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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칼데라 형성과정 : ① 용암이 빠져나간 빈 공간으로 지각이 가라앉아 칼데라를 형성한다. ② 오랫동안 비와 바람에 깎여 주변이 침식된다. ③ 침식에 강한 함몰 부위가 주변보다 오히려 높아진다

<참고문헌 : 유정아, 한반도 30억년의 비밀, 1998, 푸른 숲>

한, 화산과 관련된 지역에 온천이 많이 있는데 군내에도 의성탑산약수온천(게르마늄72.4㎍ 함유)과 옥색 빛깔의 신비한 온천수를 자랑하는 빙계온천이 있어 산행 후의 피로를 풀기에 좋다. 특히, 의성에는 마늘이 유명한데  이는 한지형이라는 점과 더불어 화산땅에서 생산된 산물이기에 더욱 유명해 진 것이다.

   

장제지에서 바라본 비봉산앙선이나 의성과 영천간 국도28호선 길따라 지나다니면서 차창 밖으로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이곳 산에 이르기 위해서 금성면에 접어들게 되는데 군위·영천 방향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소재지를 지나서 좌회전 즉시 기차가 지나다니기 위해 설치된 굴다리 쪽으로 바로 우회전을 하게 되며, 군위와 영천 방향에서 진입하던 분들은 시내방향으로 접어들기 전에 마트 앞쪽에서 오른쪽 굴다리 쪽으로 향하게 되며 이 경우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고, 여름에 얼음이 어는 빙혈과 시원한 바람이 부는 풍혈 등 빙계 8경으로 유명한 군립공원 빙계계곡 안내간판을 따라 접어들게 되며 굴다리를 지나 2㎞정도 진입하다 왼편으로 수정사 안내간판을 만나게 되고 첫 번째 간판을 따르면 거대한 회나무 옆에 있는 수정사 주차장 가는 들머리고인돌과 종택 수락당(壽樂堂)을 지나 산운공원(구 산운초등학교)에서 왼편으로, 두 번째 간판을 따르면 산운공원(구 산운초등학교)에서 왼편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과수원 길로 난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2㎞ 정도를 오르면 들머리가 나타나는데 산 주변에 주차할 공간이 특히, 대형버스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 가능하면 산운공원 앞으로 진입하여 공원 앞에 주차를 해 두거나 등산객을 산행기점에 내려주고 양 산으로 구분되는 지점의 바로 아래 위치한 수정사 주차장에다 세워둘 필요가 있다.

 

유초각성산과 더불어 산맥이 이어지고 있는 비봉산을 종주하여 주파할 경우 등산로가 원점회귀 방식으로 되어있기에 자가 승용차를 이용하여 완주하고자 하는 이에게 더없이 좋을 등산코스이다. 영천이씨 가족납골묘원 주변에 마을주민들이 드나들기 불편함이 없도록 차를 주차하여 두고 100여개나 되는 소류지와 더불어 일대의 경치를 전망하면서 한바퀴 도는데 총9.8㎞ 거리로 4시간30분 정도 소요되며, 금성산을 기점으로 비봉산 갈림길에서 수정사로 내려오는 금성산 코스만 일주할 때에는 산을 내려와 수정사에서 출발지까지 걷는 2㎞거리를 포함하여 7.9㎞거리로 수정사총3시간30분이 걸리는데 완주할 경우에 1,300여년전 신라 신문왕때 의상조사가 수행도중 탑리를 지나가다 숲 속에서 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는 것을 보고 성지라고 하며 지은 절로 현 위치보다 아래쪽에 있던 것을 화재로 불타버리자 구담선사가 중건한 사찰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6동의 건물이 유존되고 있는 수정사를 둘러보지 못한데 따른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금성산으로 오르는 길은 옛날부터 여러 갈래로 발달되어 왔기에 산행기점으로 이곳 이외에 1. 학미2리 기도원, 2. 용문지 오른편 비봉산 등산로, 3. 수정사 오른편 등산로, 4. 수정사 윗편으로 안부에 올라 금성산과 비봉산 쪽으로 갈라지는 방법 5. 용문정(정자골) 윗편으로  산행하는 방법이 있어 등산하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선택할 수가 있는데 봄철 철쭉꽃이 피는 시기에 이곳에는 참꽃과 연달래 등 아름다운 각종 꽃들이 만발하여 초록의 빛과 어울려 즐기며 다니기에 좋고, 여름이면 이곳으로 오르는 길이 금성산 정상을 지나는 길로 산은 화성암이나 길은 황토길이다정상에 닿을 때까지 가파르기에 제법 많은 땀을 흘리게 되지만 멀리서 특히, 가을철에 와보면 외관은 돌산으로 보이나 풍화작용에 변질되어서 인가 군데군데 암반이 있으나 사실상은 육산으로 정상부터는 평평하여 오를 때에 힘들었던 기억을 지워주듯 갈참나무와 신갈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밟고 가는 길의 쿠션이 좋고, 구봉산이 오르락내리락하니 근육에 무리주지 않게 형성된 크로스컨츄리 코스로 전국의 프로 농구와 씨름선수들 전지훈련장으로 인기를 얻듯 의성에는 둔덕산과 이곳 금성산 그리고 비봉산의 산 형태도 좀 더 길지만 오르락내리락하고 크게 높지 않은 봉우리로 이어져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니게 되어있어 힘든 줄을 느끼지 못하는데 탁 트인 시야에 더하여 늘 시원하게 양옆에서 바람이 불어주고, 유난스레 이끼가 많은 노적봉 북사면 이끼군락의 부드러움을 만날 수 있는데 독립코스로 나설 경우에는 이러한 각 봉우리가 주는 매력을 한꺼번에 누려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봉산의 암벽발 671m 높이의 비봉산은 이름만큼이나 날렵한 9개의 올망졸망하게 연 이어진 봉우리를 따라 춤추듯 오르내리는 암릉미가 압권으로 날등으로 깎아 세운 듯 천길 낭떠러지 단애가 아찔하고 한점 막힘없는 사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여 “유쾌, 상쾌, 통쾌”한 조망감을 느낄 수 있는데 금성산에서 본 산발한 여인의 모습을 닮아 있는 산의 형상을 생각하면 성숙한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숲을 헤치고 이마에서 콧등, 턱으로 다가서는 것으로 생각되어 여인을 짓밟으면서 산행하는 기분이 든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아열대성 기후로 변화하는 추세 속에서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이 적어지니 땔감으로 씌어지던 낙엽송에 자리를 뺏겨 소나무는 밀려나게 되는데 해마다 개체수가 차츰 줄어 현재 우리나라 산림에 있는 수목의 25%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으나 이곳 두 산의 잘자란 소나무에서 쏟아지는 빛우점수목은 아직 소나무여서 솔향기와 더불어 등산하면서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여름철 그리고  봄철 산행을 권하며, 가을에는 송이버섯 채취관계로 그리고 겨울에는 산불예방으로 인한 입산통제로 입산에 어려움이 예상되므로 단체등반시 사전에 면사무소에 산행가능 여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초각 입구 

곡(雲谷) 이희발(李羲發:1768~1850) 등 정조때 우수한 초상이 봉안된 유초각(遺肖閣)과 제명에 용이 솟구쳐 오를 만한 용소(龍沼)가 저수지로 변한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는 용문정(龍門亭), 산지기로 조상들의 유적을 지키며 살고 있는 산운마을 입향조 학동 이광준의 14대 종손이 기거하고 있는 건물 등이 있는 정자골 가는 길은   우측의 철조망 쳐져있는 길이고, 금성산 안내판이 있는 왼편에 있는 소로를 따라 오르는 것을   기준하여 안내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용차를 타고 온 가족단위 등산객으로 금성산을 오르고자 할 경우   용문정이 있는 납골묘원 근처와 조금더 지나치면 승용차 정도는 도로변에 주차할 수 있으며, 비봉산으로 오르고자 할 경우에는 용문지 근처에 그리고 수정사 윗편이나 오른쪽으로 금성산 또는 비봉산으로 산행하고자 할 경우에는 계속 직진하면 차로 약 2km거리에 있는 절집에 까지 차량을 갖고 진입할 수 있으므로  그곳 주차장에 세워두고 산행을 하면 된다. 산행시에 잘 정비되어 있는 등산로표지판을 따르면 샛길이 별로 없으므로 능선길에 별다로 주의할 사항이 없을 정도이다. 종주할 경우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계속하다보면 출발지로 다시금 되돌아오게끔 되어있다.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성산성상까지 1.15㎞를 오르는 데에 산을 잘 타는 사람은 16분 이면 오른다.  또는 20분이상 걸리지 않고는 도저히 오를 수 없다는 등 나름 대로 실력을 뽐내 나 일반인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는 시간대로 적어도 30분은 걸려야 오를 수 있는데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안으로 좀 더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철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이 용문정이 있는  곳이고 왼편의 또다른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등산을 시작하면 되는데 숲속 길로 접어들어 서서히 경사도를 높여가면 5분 만에  무덤터가 나오는데 초반부터 제법 숨이 가쁠 만큼 거치다. 몇 기의 묘지를 지나쳐 오르면  금성산 고성을 만나게 되는데 또다른 이름이 있으니 금산석성 또는 조문성, 금학산고성이라고도 한다.

금성산을 처음 오를 때는 바위를 잡고 딛는 것과 흙길이 동시에 나타남 산성은 山頂에 위치하여 있고 산자체가 중봉(시루봉)이라 하여 마치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모습이기에 석축주위가 9,100자(尺)의 높고 가파른 험산이어서 의성현지 성곽 조에 대궐유지에 4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폐하였다는 기록 등을 미루어 볼때에 당시 산상에 우물이 있어 장기전이 가능한데다 정상에 병마를 훈련조문국에서 출토된 금제 왕관시킬 수가 있는 500여 평의 넓은 공간이 있어 지형자체가 천연의 요새로 형성되어 있는 이 산성은 조문국시대 축조되어 신라 제9대왕(184~196) 벌휴왕(發暉尼師今) 2년(185년)에 군주 구도(仇道)와 구수혜(仇湏兮)를 앞세운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에는 조문국의 성으로 이곳이 조문국 최후의 패전장(敗戰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문국 시대 무덤들이 있는 의성금성산고분군은 지방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문국 경덕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은 국립경주박물관 황금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하였음)

축은 산정식(山頂式)과 포곡식(包谷式)을 갖춘 복합식으로 성벽이 동쪽 건너의 산 능선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급경사지대는 자연지형을 이용해 흙과 돌로 쌓았고, 경사가 완만한 능선에는 자연돌로 쌓는 협축법으로 경사가 거의 없는 기슭에는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는데 산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는 성의 둘레가 2,730여m,  과거 높이가 4.3m이었다 하니 꽤 웅장한 성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7 문무왕 하편에 신라 30대의 문무왕 13년 계유년 구월(서기 673년)에 시중 천광에 명하여 조문성을  쌓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듯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또는 산성과 군비가 허술한 틈을 탄   왜인들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시대를 달리하면서  여러 차례 수축(修築)한   흔적이 보이는데 유규한 세월 속에서도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부 남아있는 석축일부로 옛 사람들의 수성을 위한 의지를 더듬어 추상해 보며   산성터를 따라 등산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산성은  비와 더불어  성이 무너져 있으나 무너진 돌이 인근에 있어 과거의 형태나 규모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KBS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려의 태자 무와 백제의 태자들이 겨루는 1차전 격전지 조물성을 현재의 경북 북부지방이라고 한계를 정하지 않고 폭넓게 정하여 선산 금오산성과 금릉군 조마면 등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이도학저『궁예, 견훤, 왕건과 그 열정의 시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 역주 『삼국사기』등과 옛 이름과 현 이름에 담긴 사연에서 조물이 조문, 조물성이 조문군으로 불리는 등 조문과 조물이 동일한 별호임을 추단하고 있는데, 김하락의 『진중일기』, 김회종의 『병신창의실록』등에 의하면 의성연합의진이 일제에 항거를 하던 곳 또한 이곳이기에 의성의 대표적 산성이라 할 것이다.

 

곳에서 지그재그로 오르거나 산성을 따라 20여분 걸려 600m 정도 전진하면 로프를 잡고 석축을 올라서게 되는데 450고지 관망대로 옛날에  군 지휘부가 망루를 설치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을 공간이 있는 전망대로 이곳 관측대에서 비봉산 일대와 골짜기 안쪽으로 양 산의 가운데 위편에 자리한 수정사와 더불어 확 트인 남쪽 편을 조망할 수 있는데 성벽의 높이 또한 4m 정도나 되어서 옛 산성모습이 그대로 유존되고 있는 듯 하다.

 

병마수련장 오르는 장면금 더 올라 바위를 잡거나 디디면서 10여분이면 조문국시대 산정과 더불어 병마수련지로 활용되었다 하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주변에 약500여 평의 평지가 있었다하여 둘러보니 이곳 주변의 땅들은 대체 평평하다.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어 한번쯤 쉬어 갈 곳이다. 밧줄이 설치된 곳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인데 이처럼 바위와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재미로 느껴져 다시금 이곳을 찾아보고 싶은 흥미로 다가서기도 한다.

금성산 정상에서 탐사작업에 참여한 회원들성산 정상(530.1m)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움푹하니 파진 웅덩이를 볼 수가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으로 알려져, 여기에 묘를 쓰면 묘를 쓴 사람은 운수 대통하여 거부가 된다는 풍설 때문에 암장하는 일이 왕왕 있었으며, 정상에 묘를 쓴 이후에는 이 산을 둘러싼 30리 또는 50리 지역 안에는 석달 이상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한발이 계속되면서 맑은 물이 많이 있다는 수정사의 물도 마르게 되니 광복이후 까지도 산 주위 동민들이 수색작업에 나서 암장한 묘를 발견하면 파헤쳐내기를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정상주변으로 오토산, 칠곡 유학산, 선암산 등이 자리를 잡고 있고 올망졸망 아름다운 마을,  골골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100여개나 되는 소류지가 보이고, 북으로 눈을 돌리면 가물가물   의성읍 시가지가 보이는 등 동서남북 그 어디를 둘러봐도 자연의 미학을 느끼게 하는데 정상부위의 토질은 마사토이다.

조문전망암에서 애견과 함께하는 김종일씨상 서남쪽으로 20보 아래로 걸으면 옛날 부족국가였던 조문국의 수도였던 금성면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솟을바위 전망대가 있는데 조문국이 터 잡았던 탑리일대가 훤히 다 보여 조문 전망암이라 할 만한데, 금성산 정상에서 시신을 파헤쳐낸 다음 전시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산아래 10m되는 곳 소돌방구에서 아래로 던지고 또 밑에서 연고자들이 받고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하는 곳이 이곳이 아닌가 한다.

정상에서 이번 답사를 위해 산행에 나서주신 분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왼쪽에서 첫 번째가 김경경 전 의성산악회 회장님, 두 번째는 금성산을 500여회정도 방문하신 김종일 의성산악회 4조 조장님, 세 번째는 본 글을 쓰는 사람, 네 번째는 기록을 위해 참여하신 권진형 회원님입니다.

 

 흔들바위를 바라 본 모습상을 뒤로하고 부드러운 솔가지가 쌓인 오솔길을 따라 솔향기에 취해서 걷다보면 큰 바위들이 능선에 입석처럼 무리지어 있는 옆을 지나 200여m를 지나가다 주등산로를 벗어나 왼편의 북서쪽 사면아래로 내려서 급비탈을 90m정도 걸으면 3단식으로 분리된 채 벼랑에 절묘하게 엇박자로 얹혀 사면에 우뚝 솟아있는 흔들바위 (높이 15m정도)를 만나는데 사람이 건들이면 흔들흔들 전체가 흔들리거나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하면서도 실제 입석같은 바위는 요지부동으로 오랜 풍상을 견뎌오고 있는 3층석탑처럼 구분되어진 건들바위라 하기도 하는 이 바위너머로 산 아래 솔숲계곡과 아래 마을들을 바라보여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며 배나무골로 내려가는 내림 길과 금성면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데 산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되 올라와야만 한다.

 

곳을 지나면서 솔숲사이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지와 의성일대를 내려다 보며 바위모둠터가 있는 산봉에 올라서면 건너로 550봉이 지척이고 산봉을 지나치자 완만하던 능선길이 슬쩍 내려서는가 싶더니 용문정갈림길이 첫번째 잘록이로 다가선다. 550봉 오르는 길목 말잔등 같이 생긴 갈림길 4거리 안부의 안내표를 따라 비봉산 쪽으로 산행을 계속하려면 앞쪽 소나무 숲길을 따르면 되고, 왼편은 학미리의 기도원으로 향하는 용가뫼골 위 동굴로 보여지나 실상은 절리현상에 의한 것으로 암장이다길로 S자 코스가 이어지면서 스프링처럼 구불구불하게 내려가는 가파른 길로 서편에 위치하여 오전에는 거의 햇빛을 볼 수 없는 그늘진 곳으로 겨울철에는 잔설이 늦게까지 남아있어 등산에 어려움이 많은 코스로 100여 미터를 내려가다 왼편으로 20여m쯤 들어가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전설 속에 조문국의 병사들이 이용했다는 샘터(용소)가 있다. 오른 편으로 난 길은 운곡 이희발 선생이 전원생활을 즐기며 학문을 닦던 용문정과 공의 下賜 圖像을 모신 影閣 유초각으로 향하는 가파른 용문정 가는 길로 험하여 안내간판을 설치해 두지 아니한 것으로 보이는데 용문정에 조금 못 미쳐 금성산성터(석성)가 나오는데 석성에서 위쪽 우측으로 100m를 더 들어가면 금성산에서 가장 절경이라 하는 “용가매골(용문)”이 나오며 용문아래에는 조문국 시절 동굴처럼 보이는 바위 아래로 옛 궁궐터가 있을 터왕이 전쟁 때나 한여름 피서하는데 사용하였을 궁궐터로 이후에 절로 사용되었다 하는데 요즘도 기왓장 등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이곳에는 사시사철로 맑은 물이 용출하는 샘터와 용이 승천했다는 용가마가 있고, 사과상자를 옆으로 세워놓은 듯 폭 20m, 높이 30m 이상의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졌고 천장부분에는 큰 구멍이 나있어 하늘이 보이는 등 절경지역으로 금성지역 사람들은 국민학교 때 한번씩 소풍나들이로 찾아보기도 하였다는데 내려오면서 냇가의 석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수풀이 워낙 우거져 확인하기 어렵다. 이곳에서 용문정에 이르기는 데에는 10여분이 걸린다. 이 곳 윗부분을 비봉산에서 살펴보면 꼭 동굴처럼 생겼으나 실제 이 곳에 둘러보면 동굴이 아닌 바위암반으로 암벽타기 동호인들의 암장이다.

 

영니산봉수대 유지문정갈림길에서 아름다리 소나무는 보이지 않으나 계속되는 소나무 숲속 길에 마음들이 편안해 지자 금성산의 실질적인 최공봉이라 할 550봉에 오르게되는데 걸터앉기 좋을 돌바위 하나가 볼록 솟아있고 주변으로는 솔가지만 수북하다.

갈림길에서 800여m를 나아가면 해발 445m 높이 산중턱 삿갓봉에 위치하는 영니산봉수대 유지를 접하게 되는데 돌로 북면에는 동서15m 길이의 축대를 그리고 남면에는 둑을 쌓았는데 높이 1m정도가 남아 있는 이 봉수대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미상이나 전국의 봉수대가 처음으로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현재의 군위군 의흥면과 우보면 경계에 있는 번개산이라 불리는 의흥현 승목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단촌면 관덕리 봉화산의 마산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1460년경에는 의성읍 팔성리의 구봉산의 고성산봉수대로 전달하게 되었으며 여지도서(1760)에 노선의 봉수가 전면 개폐되면서 영니산봉수대가 빠진 것으로 보아 1605년 봉수제도 개편 때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유지로 남아있어 복원을 하고자 하는 일부의 의지도 있을 것이나 이곳 봉수대가 충주의 주정산 봉수대와 비슷하지 아니하였겠나 하고 추정을 하나 제주도 성산읍 신양리봉수대처럼 더욱 웅장하고 거대하였을 것으로 또는 다양한 형태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므로 외려 유지로 남겨진 상태로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 봉수대를 생각해보는 즐거움이 외려 클 것만 같다. 이 곳에는 골기와를 포함한 기와조각이 많이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봉후를 하던 봉졸들의 기거 또는 후망을 위한 봉루의 잔해가 아닌가 싶다.

 

노적봉 모습, 벼 낫가리를 쌓아둔 모습이다수대 유지를 지나 우측으로 희미하게 못동골 갈림길이 나오며 왼편은 제오2리 가는 길이다. 이 곳을 지나쳐 이끼 숲을 지나치면 4거리 안부에 또하나 갈림길이 나오는데  안부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가 다시금 산길로 오르는 곳이 운곡리 또는 노적봉으로 향하는 갈림길로 길이 험하여 노적봉으로 향할 경우에는 이곳에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면 조금지난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을 따라 접어들면 된다.

오른 편의 위쪽이 의성읍 사진이나 여러사진을 합성하니 멀어 안 보이게 됨

여름철 비봉산 갈림길에서 수정사로 내려오는 계곡에 초록빛이 감도는 모습른편은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 말발굽 형태의 산에 발가락같이 끼어있는 지능 노적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용문지(40분)까지는 2.4㎞거리인데 우측으로 흰 흙으로 쌓여있는 작은 봉우리는 노적봉인데 계곡 안쪽으로 궁궐터가 있다. 조문국 초기에 외침이 있어 전세가 어렵게 되자 조문 사람들이 이곳 계곡 안쪽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적이 아무리 공격하여도 승산이 없자 장기전을 하면 식량이 떨어져 항복할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항복의 기미는 없고 조문국 사람들이 노적봉을 이엉으로 둘러싸 위장하고, 물에 다량의 백토를 풀어 흘려서 보내니 적들이 이를 보고 쌀뜨물이 저렇게 흐르니 기다려도 허사라고 여겨 물러갔다 한다. 그 이후 조문국 왕이 산정에다 돌로 성을 쌓고, 병영을 새롭게 짓고 양곡을 비치하는 등 유사시에 대비하여 난공불락의 요새지로 가다듬었다 한다. 

 

기도하던 곳인듯 촛농 등 흔적이 남아있는 곳성산을 일컬어 영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  아름다운 노적봉 아래 계곡에는 항시 기도객들이 찾는 곳으로 화산에 의해 형성된 바위산으로 기가 세고 충만한 금성산의 영향으로 도를 닦는 초야의 갑사들이나 종교분야 기도인 들이 많이 찾는데, 기가 약해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또한 기 수련을 하고자 하는 분들은 멀리 외국에 있는 “세도나”를 찿을 필요 없이 이곳을 찿으면 어떨까 싶다. 이곳 노적봉 아래의 계곡은 옛날에 수정사가 위치해 있었기에 절골이라 한다.

 

 댕기풀을 가지고 댕기모습을 하게 땋은 모습 곳에서 2분정도 걷다보면 북쪽으로는 읍 전경이 멀리 보이고 댕기풀에 깔비가 곱게 내려앉아 있어 부드러운 느낌이자 겨울철에도 푸른 빛을 볼 수가 있어 김지하 선생의 "서울 길"이란 민요가 생각나  댕기풀이한 풀을 사진으로 올려본다.

안부를 지나 전망이 트이는 전망바위가 있고 바위봉에 자리잡은 소나무 한그루가 이채롭다. 여기서 길이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들며 내리막으로 급하게 치 닫는데, 금성산과 비봉산 길에 다리역할을 하는 능선으로 접어드는 셈인데 노적봉으로 향하는 지능선을 흘러보내고  노적봉갈림길에서 5분여를 더 흘려보내면 앞의 산봉하나를 왼편으로 트래버스하게 되는데 북사면이 온통 이끼군락지로 부드러운 비단같은데 이끼 아래로 군데군데 작은 동물들이 드나들었을 구멍이 보인다.

 

수대 유지에서 1시간 10여분 금성이끼가 부드러운 융단처럼 깔려있는 모습, 비온 뒤 푸르름이 매우 좋다산과 비봉산으로 갈라지는 능선안부 삼거리가 나오는데 아래로 바삭이는 낙엽을 밟으며 또는 계곡 좌우의 활엽수가 주는 시원한 그늘과 물소리 들으며 1㎞ 거리 25분 정도를 걸으면 천년고찰이 나오는데 계곡사이 물이 수정과 같이 맑다고하여 수정사라 불럿다고 한다.

수정사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물에 갈증을 해소하고 물소리 들으며, 내려서는 길에 용문지 조아들바위 딸바위의 아들바위금 못 미쳐 왼편 흰흙으로 쌓여있는 작은 봉우리(속칭 흰 버리덤)의 기슭에 큰 바위 두 개가 20m간격으로 자리하는데 높이 6m정도쯤 되는 큰 바위 2.5m정도 높이에 20㎝정도 움푹한 구덩이 4개가 있고 여러 가지 모양의 자갈이 많음을 볼 수아들바위와 딸바위의 딸바위 있는데 이 두개의 바위를 “아들바위 딸 바위”라 하는데 옛날 수정사 나들이를 나섰던 부녀자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 아래쪽 우락부락한 아들바위에 왼손으로 돌을 던져 윗부분에 얹히면 아들을 낳고, 위쪽 갈라진 딸바위 바위틈새에 오른손춘산에 있던 남근석, 비봉산에 있는 남근석과 닮은 듯하다으로 돌을던져 넣으면 딸을 낳는다는 설로 인하여 바위 앞을 지나면서 기원하는 뜻에서 돌을 넣었다 하는데 민속신앙이 주민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때에는 3대독자 점지해 주기를 기원하는 행렬이 이어졌을 법한데, 일반적인 새끼는 오른 쪽으로 꼰 오른새끼인데 반하여 아이를 낳았을 때에 대문앞에 내다걸던 금줄이나 동제를 지내기 위해 당산나무에 걸던 금줄은 모두 왼쪽으로 꼰 새끼를 이용하던 것 등으로 보아 오른손이 사람이 관장하는 일상의 세계라면, 왼쪽은 신이 관장하던 신성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돌 하나 던지는 데에도 왼손과 오른손 구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 춘산가는 길옆에 서 있던 남근석이 생각나 올려본다. 여기서 출발지까지는 2㎞거리로 도보 30분이 걸린다.

수정사의 여름철 모습 

행들머리에서 올려보면 독립된 산처럼 보이지만 용연지를 중심으로 서로 쌍립하여 대칭한 모습인데 유연한 금성산의 산세는 무엇이든 품에 안을 것 같은 넉넉함이 좋고 그에 걸맞게 날카로운 산세를 가진 비봉산과 짝을 이뤄 후덕함과 강인함을 두루 갖춘 등산로인데 금성산의 등산로는 부드러운 능선과 호젓한 송림숲을 걷는 산책로 정도이고, 비봉산 쪽은 단애를 이룬 암릉길로 이어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인의 턱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암벽을 줄타고 내려오는 모습봉산의 들머리는 부드러운 땅과 떨어진 소나무 잎으로 쌓여있다.  소나무 원시림을 따라 비봉산갈림길에서 900여m정도 20여분 발품을 팔면 여인의 이마에 해당하는 헬기장에 당턱부위 위편 이마에 해당하는 곳이 여인의 턱이다. 배부분이 외려 더 높은 경우다도하게 되는데 이곳이 해발 671m 높이의 비봉산 정상이다. 비봉산은 금성산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수백 길의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과 현기증, 산행의 충만감이 전율로 다가 온다. 정상에서 일대가 특히 군내 최고봉인 선암산이 훤히 조망된다.

 

소나무아래가 남근석으로 현장에서 자세히 보면 완전 천상이다상에서 100여m 20분 올망졸망 묏부리를 차지한 바윗길을 지나 큼직한 바윗돌이 있는 3봉이나오데되며 고만고만한 길을 지나다 갑자기 뚝 떨어지는 아래 15m정도의 수직절벽을 만나게되는데 이곳이 여인의 턱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격훈련 삼아 절벽에 설치된 로프를 타고 암벽 타기를 시도하게 되는데 아찔하고 떨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여성등산객과 안전을 우려  우회 등산로가 별도로 확보되어 있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근곡으로 괄호안은 접근하여 촬영한 사진 

직절벽 3봉 아래로 내려서 왼쪽의 바위전망대에서 봉우리 아래의 단애의 절벽 가를 쳐다보면 날등으로 깎아 세운 천길 낭떠러지 단애가 아찔하며 벼랑에 뿌리박힌 수백년 인고가 더욱 푸르고 또한 부산일보 취재팀이 발견하였다는 자연석의 남근석을 볼 수가 있는데 의성군청 환경산림과 장효식님께서 곤지산에 둘렀다가 촬영하였다는 여근곡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연에는 음양이 완벽히 합일을 이루는 것 같다.

 

암릉이 주는 묘미가 좋다.망대를 지나 이어지는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기를 한참 600여m  10여분이면 공터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 나오는데 가음면 이리(梨里)와 안부우측으로 수정사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오며 정면의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 가풀막진 암릉날등 위로하여 앞으로 계속 산행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 암릉날등 위에서 지나쳐온 금성산을 건너다 보기도하고 왼편의 가음 일대를 번갈아 보면서 걷게된다. 안부 오른쪽 수정사로 향하면 원시림 중턱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용출한다는 감미로운 천연약수를 맛볼 수가 있다. 수정사까지 거리는 800m이다. 수정사로 향하는 별도의 이정표는 없다.

  

풀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수정사갈림길에서 15분이면 비봉산전망대가 나온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잘 보았습니다. 

김행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행순
작성일

  금성산과 비봉산을 한 걸음도 안 떼고 산행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