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학공파 묘비 제막식 행사 보고 1 (비안공 문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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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김항용 작성일05-04-26 20:28 조회1,618회 댓글6건본문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영상공(휘 錫) 이하 3위 선조님들의 묘비건립 및 제막식 행사가 문중인 전체가 하나 되어 성황리에 마치게 되었기에 삼가 다음과 같이 그 전말을 간략하게 남기며 아울러 본 행사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해 올립니다.
1. 일시 : 2005. 4. 23(묘비 및 각종 석물 건립), 4. 24(제막식 거행)
2. 장소 : 충북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
3. 내용 : 4위 묘소의 묘비 및 석물 건립, 제막식
가. 4위 묘소의 선조님 : 1)領相公(휘 錫) -- 2)五子 比安公(휘 仁甲) -- 3)二子 陽德公(휘 時說:충익공 휘 時讓의 兄) -- 4)二子 安州公(휘 繁:감사공 휘 素의 아우)
나. 석물 내용
1)영상공 : 묘비 보수(거북좌대와 용머리 추가 건립), 3년 전 부러진 망주석 보수
2)비안공 : 신묘비 건립, 양마석과 장명등 설치
3)양덕공 : 묘비 건립, 문관석 설치
4)안주공 : 묘비 건립, 사초
4. 주관처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5. 후원 : 안동김씨 제학공파 영상공 이하 후손 일동, 제학공파 괴산종중
6. 참가자
가. 4. 23. 건립시(13명) : 태섭, 두응, 상환(내외), 상천, 상석, 상운, 구응, 태복(내외), 상석, 복응, 성수
나. 4. 24. 제막식시 (약 70여 명) : (명단 추후 기록)
7. 후기 작성자 : 글-김상석, 김항용, 사진-김발용, 김항용
2005년 4월 22일(금) 行槐山 날씨 맑음--괴산 도착과 행사 준비
2005년 4월 22일(금) 오후 5시, 四位의 묘비를 보수 및 건립(안주공 묘역은 사초 포함)하기 위해 이날 양덕공(휘 時說)의 직손이신 항용(恒鏞:안동김씨 홈페이지 관리자) 비안공문중회 총무님과 함께 주과포를 포함한 각종 제수물과 행사장 안내판, 행사 현수막, 忠翼公(하담공 諱 시양:양덕공의 아우님)의 신도비 해설판, 고유제문 및 분방기, 의식절차를 적은 행사 간략 홀기, 제막식 행사에 필요한 각종의 행사 도구들을 점검하고 한 대의 차에 짐을 가득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습니다.
빠른길을 잡아 괴산으로 향하면서 신중을 기하며 귀하게 택일(擇日)한 내일(토요일-丁丑日:벼슬하신 조상님이 많기에 이를 잘 섬겨야 하는데, 그에 합당한 吉日이라 하며 스승님이 잡아줌)의 일기를 점치며 동석한 둘은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사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이루지 못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불효로부터 묘비와 여러 석물등을 건립함으로써 비로소 격식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감격의 숨소리는 말없는 가운데 서로의 가슴으로 오고 갑니다. 특히 이 시대에 태어나 만나게 된 찬자(撰者-항용:양덕공 14代孫), 서자(書者- 태국:정의공파, 傍孫), 양덕공 묘비 건립자(태섭:양덕공 13代 종손), 안주공 묘비 건립자(상석:양덕공 11代孫)가 어우러져 이루게 되는 이번 사업은 영상공 후손은 물론 여러 문중의 성원이 복합된 보람과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밤이 이슥해서야 종가(여기서는 世德祠가 있는 양덕공 종가를 말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십여 년을 넘게 다니며 느끼는 고요하고 청량한 종가의 밤풍경 속의 그 아늑함 속으로 빠져 듭니다. 언제나 정성과 부지런함이 습관 되신 양덕공의 종부(항용총무의 母親)님이 손수 차려 주신 저녁상을 대하니 갑자기 옛날의 내 어머니(1985년 52세의 일기로 작고)가 오버랩(overlap) 되며 뜨거운 눈물이 잠시 고입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종손(泰燮), 한용(항용총무의 형님), 항용총무와 행사 전체에 대한 점검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면서 내일 있을 능촌리 개향산의 산신제와 3위 고유제, 양덕공 묘소가 있는 수진리의 산신제와 고유제 제물들을 각각 따로이 담아서 준비합니다. 진설, 철상의 담당자까지 정하여 이틀간에 걸친 행사의 혼잡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모든 행사가 질서정연하게 치뤄질 수 있도록 정리, 분담한 뒤 들뜬 마음으로 잠을 청합니다.
2005년 4월 23일(토) 날씨 맑음--산신제와 묘비 건립 전 고유제, 4개소 묘비 건립과 각종 석물 설치, 안주공 묘역 사초(莎草)
여명에, 세덕사 처마 끝의 풍경(風磬)이 바람을 타고 울리며 잠을 깨웁니다. 마침 보름(음력15일로 길일)이라 종손께서는 일찍이 사당에서 보름차례(망다례望茶禮)를 올리십니다. 또한 종가에서 안주공 묘역의 사초 후에 식수할 주목 두 그루도 캐어 주십니다. 후손이 직접 기른 나무이니 무어라 형언 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리고 분주하게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준비합니다.
07:00시, 시공 석물사에 도착하여 각종 장비를 양 편으로 나누어, 하나는 영상공 묘역으로, 또 하나는 안주공묘역으로 보냅니다. 포크레인이 석물을 실은 짐차를 뒤에 세우고 능촌 개향산의 영상공 묘역으로 길을 내며 올라옵니다. 그 사이 종손이신 태섭님과 항용, 상석은 영상공의 어머니이신 의성김씨할머니(소래산 소재의 참판공 諱 彦默의 배위) 묘소 위 언덕으로 올라가 산신제를 지내고, 이어 영상공(휘 錫:충,효,우,제,인갑, 세칭 五甲의 父로 괴산의 제학공파 입향조) 묘소에서 고유제를 지낸 다음, 그 아래 선영 하에 있는 비안공(휘 仁甲 : 좌랑공 諱 時訓, 양덕공 諱 時說, 충익공 諱 時讓의 父) 묘소로 내려 와 고유제를 지냅니다. 그러는 동안 비안공문중회장님이신 두응(斗應, 충익공 孫), 상천(相天, 충익공 孫) 형님이 도착하시고, 어느새 포크레인은 나무숲을 뚫고 올라와 묘비 세울 준비를 합니다.
<산신제 제수 진설>
<산신제 국문 축문>(좌측의 별지는 본문 3행 안동김공 다음에 삽입할 내용)
<영상공 고유제 진설>
<영상공 고유축문>
<영상공 고유제 초헌관(태섭) 헌작, 독축 장면>
<영상공 고유제 아헌관(상석) 헌작, 재배 장면>
<영상공 고유제 종헌관(항용) 헌작, 재배 장면>
<비안공 고유제 초헌관(태섭) 헌작, 독축 장면>
<비안공 고유제 축문>
<숲을 뚫고 올라온 포크레인>
<고유제 간략 홀기> (11, 12번은 순서를 바꿈>
이어서 산줄기 조금 아래 쪽에 떨어져 있는 안주공(휘 繁 : 방어사공 諱 義萬의 父, 相錫의 10代祖)의 묘소로 내려가 고유제를 지냅니다.
<안주공 고유제 초헌관(상석) 헌작, 재배 장면>
<안주공 고유축문>
相錫(筆者)만 남고 일행은 묘비건립을 지켜 보기 위해 다시 영상공 묘소로 이동하는 사이 안주공께서 안주판관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자 귀양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세거(世居)하게 된 충북 제천의 상환(相煥, 안주공 孫)형님과 형수님, 상운(相云, 상환의 아우),구응(九應,안주공 종손), 태복(相行, 在항, 이천거주)형님과 형수님이 도착합니다. 새벽부터 사초를 하고 있던 포크레인도 시동을 잠시 끄고 이 분들은 재배를 합니다.
다행히 포크레인 기사님은 필자와 코드가 같아(수염이 한 자--지관), 100여 평의 묘역을 사초하는 동안 이런저런 잔소리(잘 모시기 위해 요구사항이 많았음)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석한 안주공 孫들이 사초를 하루종일 함께 해 주어 작업이 마무리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소 가장자리에 석축들이 설치되어 있어 설립 당시의 묘역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었고 때마침 묘역 주위는 벌목 공사를 하여 사초하기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원래의 묘소 크기대로 복원하다보니 얼마나 묘역이 커졌던지 지관(포크레인기사)께은 12평의 떼를 더 요구합니다. 당시의 문관석, 상석, 촛대석등의 석물들은 다른 선조님들보다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고, 다만 주위의우거진 숲과 마사 흙의유실 원인으로 일부 봉분만이 흘러 내린 상태였기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녁 일곱시가 되어야 사초 공사의 끝이 보일 것 같습니다.
<사초 장면>
그러는 사이 영상공, 비안공, 양덕공의 묘비건립을 지켜 보며 3개 지역 묘역을 분주히 오갑니다. 영상공 묘비는 1967년, 5자(5尺-흔히 대자비라함)비로 갓머리만 씌워져 세워져 있던 것을 이번에 품계에 맞춰 이수(흔히 용머리라 함)와 구대(龜臺, 흔히 거북좌대라 함)를 갖추어 세우고, 바로 아래의 비안공 묘비는 1627년, 충익공 諱 시양의 撰으로 세워져 있던 것인데, 그 후 충익공의 청백리 녹선으로 비안공께서 좌찬성으로 재추증된 것에 맞추어 이 또한 이수와 구대를 갖추고 양마석과 장명등을 비안공문중회의 기금으로 세웠습니다. 삼백 삼십여 년 만의 대사업이 진행 되는 과정에서 83세의 양덕공 종손께서 흐뭇해 하시는 표정을 봅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최초 건립 당시에 좌랑공, 양덕공, 충익공께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시고 새로 묘비를 세우시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우리 후손들에게 숙제로 남겨 주신게 아닌가 하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영상공 묘비 보수 장면>(구대와 이수 추가 설치)
<완성된 모습과 제막천으로 가린 모습>
<3년 전에 낙뢰로 부러진 묘역 좌측 망주석 보수 공사 장면>
<완성된 모습>
<비안공 묘비 건립 작업 장면>
<건립 완료된 비안공 묘비>
<묘비 전, 후면>
<제막천으로 가린 모습>
<비안공 묘소 상석 교정 작업>
<영상공, 비안공 묘역 작업 종료 상태의 모습>
점심 식사를 읍내에서 일가분들과 함께 들고 양덕공 묘소로 이동하여 고유제를 지냅니다. 그 사이 포크레인이 험한 길을 내며 묘소로 올라 옵니다. 양덕공 묘소 바로 위에는 능촌으로 천장을 하기 전 의성김씨 할머니가 모셔져 있던 곳입니다. 그 자리에서 성심으로 먼저 산신제를 올립니다.
<양덕공 고유제 봉행 전, 수진산의 산신제 축문>
<양덕공 고유제 진설 장면>
<양덕공 고유 축문>
<묘비 건립 장면>
<묘비 건립 완성 모습>
<양덕공 묘비를 제막천으로 가린 모습>
<양덕공 묘비 전 후면>
<양덕공 묘소 문관석 설치 장면>
<능촌리 마을에서 바라본 웅장한 안주공 묘역>
<능촌리 마을회관 옆에 게시한 행사 현수막>
<괴산읍 주차장 부근에서 부터 능촌리 행사장까지 12지역에 붙여진 행사장 방향 안내표>
<능촌리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마을 유래비>
양덕공의 묘비는 이번에 종손이신 태섭님께서 단독성금으로 건립하셨는데 양덕공께서 몰하신 지 삼백 육십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문관석과 망주석을 더하여 의물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같은 후손으로서 죄스런 맘 지울 수 없습니다. 애쓰신 종손께 감사의 말씀 송구스럽게 글로써나마 다시 한번 전합니다.
양덕공의 묘비에 제막을 치고 안주공 묘역의 사초 현장으로 모두가 달려 갑니다. 궁벽한 괴산의 개향산 언덕에 사양빛이 감돌 무렵, 안주공묘비가 세워지고 제막 천을 설치할 무렵에서야 사초도 병행하여 끝이나자 일행 모두는 내일 제막식을 기약하며 헤어집니다. 마치 조상님들의 슬하에서 잠시 빠져 나와 내일 또 찾아 뵈러 올 영리한 아이들처럼------------
*제막식 행사의 後記는 내일 전하려합니다. 불초한 상석(相錫) .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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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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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비안공문중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석 아저씨와 항용 선생님의 큰 무게에
저도 마음 든든해지는 자랑스러운 오늘 밤입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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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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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한분의 의물을 갖추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상석씨의 상석앞에 있는 모습 그려보며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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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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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묘비 및 각종 석물 건립 행사가 있었던 4월23일 하루 동안의 과정을 완벽하게 재현해주신 후기를 읽으며 그날 모여서 역사를 이룬
여러분의 숭조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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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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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시제 참석과 겹쳐 뜻 깊은 제막식에 참석하질 못했습니다.
두 분 수고 많으셨고 그 뜻은 영원히 전해 지리라 믿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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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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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후기 그날에 모습 그려봅니다.
역사를 이룬 여러분의 노고에 감탄했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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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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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대부님~! 쨩~
모든 궂은 일 마다 않으시고
묵묵히 해 내심에 이러한 문중 역사가 이루어 지는가 봐요.
희생 봉사 ~!!
능말 일가분들의 수십대 내려온 숭조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