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길(金泰吉) 선생을 뵙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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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 작성일05-04-27 13:25 조회1,495회 댓글8건본문
지난 24일(日)의 (선)안동김씨 제학공파 묘비 건립 행사에 참석차 괴산에 다녀 왔습니다.
저의 고향이며, 부모님께서 현재 생활하고 계시는 곳인지라,
새벽 일찍 서울 목동에서 출발하여 묘비 제막식 행사 전에 부모님께 인사 올리고서 우리집안의 대경사인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처음엔 항용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내려갔기에 행사 진행에 대해서는 구경만을 할 뿐이었으나,
'우집사'를 해보라 하시어 조상님들께 잔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가슴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행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행사가 모두 마무리되고, 항용 선생님 일행과 함께 서울로 향하면서 , 참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와 가장 가까운 근친으로 매우 훌륭하신 분이 계신다는 말씀...!
조상님들과 종친모임에 관심이 없다며, 거리를 두신다는 말씀....!
항용 선생님께 연락처를 묻고는 가장 가까운 근친으로써 저가 먼저 찾아 뵙겠다고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용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철학계를 대표하며,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셨으니, 사전에 공부를 하여 김태길 박사님과 대화가
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조언을 주셨지만, 저는 그러한 준비 없이도 뵙고 말씀을 나눔에는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을
표 했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드디어, 어제 26일(火) 오후에 서울 방배동에 있는 김태길 선생님의 사무실에 찾아가 뵙고는 1시간 반에 걸친 좌담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선안동김 제학공파 참봉공(友甲)할아버지의 14대손 泰首입니다.
참고로 김태길 박사님께서도 선안동김 제학공파 참봉공(友甲)할아버지의 14대손이십니다.
미리 항용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연락처로 '철학문화연구소'에 김태길 선생님의 사무실에 계시는 시간을 알아보고는
방배동에 위치한 김태길 선생님의 철학문화연구소에 찾아가 약 1시간 가량을 기다리니 선생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학술원에 회장직을 맏고 있는데, 방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데, 늦어졌다고 하시더군요..
(편의상 대화형식으로 기술해 보겠습니다)
"누구시길래 나를 찾아왔는고?"
"저는 선안동김 제학공파 참봉공(友甲)할아버지의 14대손 泰首입니다. 올해 나이는 서른넷입니다.
사전에 시간예약 없이 찾아 뵙는 결례를 범한 것을 용서하십시요"
"돌림이 '태'자라면 무슨 '수'자를 쓰는가?"
"머리'수'자를 씁니다."
"좋은 이름이네!" 집안사람이 찾아왔네. 차(茶)라도 내놓아야 겠는데.... (직원에게 지시하시더군요.)
"무슨일로 나를 찾아 왔는가?"
" 저는 지난 일요일 24일에 충북 괴산의 조상님 묘비 건립 제막식에 다녀왔습니다.
제학공파의 영상공,비안공,양덕공,안주공 할아버님의 묘비 건립 제막식입니다.
참석하고 보니, 모두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었고, 30대의 젊은 자손들은 저와 형(泰淨) 뿐이었습니다.
많은 어르신들께서는 젊은 자손들이 참석 해주니 참 고마운 일이라며 칭찬을 하셨고, 아는 친지어른도 계셨습니다.
한편, 조상님들을 모시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현존하시는 훌륭하신 어른들이 참석해주셨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도 표 하셨습니다. 묘비들의 글씨는 우리나라 서예계의 최고에 자리하고 계신다는 '태국'선생님께서 직접
써 주셨다고 하니, 그도 참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중국의 행사 때문에 참석은 못하셨다지만, 선배님들의 훌륭한
행적에 종친회에서는 감사패도 준비 했었구요....
저와 가장 가까운 집안 어르신으로 우리나라의 정신서계의 큰 기둥이 되고 계시는 김태길 박사님이 계신다고 하여
철학이나, 문학에는 조회가 전혀 없으면서도 용기 내어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도 참 훌륭한 어르신이지만, 지금은 뵐 수 없고, 효창동 백범 기념관에서만 행적과 정신을 볼 수
있을 뿐이쟎습니까?"
"김구 선생이야말로 제일 훌륭한 분이시지. 난 가까이서 봤어.
서울운동장 특설링을 만들어 한미 권투대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관중석에 가까이 계시더라구.
개회식을 하며, 진행자가 김구 선생님께서 오셨으니 인사말씀 부탁한다고 했어. 그러자 백색도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나서는
"권투는 싸움입니다. 싸움은 이겨야 합니다" 라는 아주 짦은 말씀만 하셨지.......
모든 경기는 한국선수들의 전원 KO승 이었지... 사실, 한국선수들은 프로복싱선수였고, 미국선수들은 한국주둔미군 내에서 권투를 잘하는
선수들이었다고 하더라구, 어찌됐든 통쾌했지, 미국통치하에 있었으니 더욱 그랬던거 같애."
"김태길 선생님을 뵙기 전에 인터넷에서 자료검색을 해보았더니 충북 청주에서 1920년에 태어나신 걸로
되어 있던데, 괴산이 고향이 아니십니까?"
"내 부모님께서는 숯골(지금의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사시다가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셔서 일본군에 잡혀가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이사를 하게 되었지. 외조부께서 충북 중원군의 대지주셨기에 당신의 딸(김태길 교수님의 어머님)이 살기가 망막해지자 땅을 조금 주셔서
그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나는 중원군에서 태어나게 되었지. 출생지를 잘 못 알고들 있나보군...
아버님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재판에서 6년형이 판결되어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야말로 중형이라고 해야지..
옥고가 끝나던 해가 바로 3.1운동이 있던 기미년이었어. 그런데, 그 옥살이를 하면서도 죄수들을 선동해서 감옥 안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형이 늘어나서 결국은 7년을 감옥살이를 하셨어.
우리집안 살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지. 가장이 감옥에 가고, 독립운동만 하니까.
우리 할아버님은 고향에서 잘 사는 지주였었다고 해. 그런데, 독립운동하면서 아버님이 재산을 탕진했다고 봐야지.
자네 부모님은 건강하신가?"
"예. 고향인 괴산읍내에 사십니다. 건강하지는 못하십니다.
형님은 청주에 거주하며 괴산군청에 공무원으로 근무중이구요, 저는 홀로 서울에서 건축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맏이도 아니고, 장손도 아닙니다만, 조상님들에 대한 관심이 성장하며 생기다보니, 수년 전에는 친척 8촌까지
연락처를 조사해서 책으로 엮어서 나눠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이젠 어떤 집안 행사가 있으면 친척연락처 책 한권이면 바로 소식이 전달 됩니다."
"맏이라고 별다른 건 아니지, 다만 가족내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게 아닌가 해.
우리집안에는 많은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
그러나, 관직을 많이 하고, 이름을 날렸다고 해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집안은 진정한 양반이고, 개화기에도 관직에 관심들이 없었어..관직하면 나쁘게 말하면 친일파들이쟎아.
전혀 없었던건 아니지만, 泰東 동녘동자를 쓰시는 분이 계셨는데, 장관까지 하셨었지, 참 깨끗하신 분이었어.
종친 어르신들은 손가락질들을 하셨었지.....장관을 하면 뭘해, 집안 종친들 취직을 시켜줬나, 기업의 이사라로 시켜줬나, 한게 뭐 있어?
그런 말들을 들으셨지, 나도 딱 한번 찾아 뵌 적이 있었지, 참 어려웠어. 안만날려고 하더라구, 뭐 하나 부탁이라도 할까봐 그랬는지...
난 전혀 그럴 마음도 없었고, 훌륭하신 분이시라 뵙고만 싶었었거든.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은 참 잘못이 많아.
우리 김구 선생만 해도 정권에 대한 욕심이나, 별다른 야욕이 없었고, 참으로 깨끗한 분이셨다고..."
"청백리라고 해야합니까?"
"이승만같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서 많은 욕심을 부렸지..
남자는 큰일을 해야해.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만이라도 최고의 위치에 서야해.
그래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지. 돈이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되어선 않돼."
"한미 권투대회에서 김구 선생님께서 인사말씀을 하심으로 대회가 더욱 빛을 발하고, 선수들의 사기를 높이 것처럼,
종중의 큰 행사에 선생님처럼 훌륭한 자손께서 참석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자리를 빛내주는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종중의 일에 소홀한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많은 분들이 일들을 보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
나는 내가 하는 일들이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을 비롯하여 4가지 일을 보고 있어.
나이가 많이 먹다보니, 힘에 부치고 모든 일들을 다 처리하지 못해서 가장 큰일부터 처리하고 있어.
지금도 내일 행사에 축하연설문의 원고를 써야 하네. 저녁시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일로 자리가 예정되어 있고,,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니, 요즘은 일을 줄여서 하고 있어.
나도 젊은이들이 종중일에 열심히 하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네.
그러나, 젊은이들은 우선 자기일에 최고가 되어야 할 것이야. 그 다음에 시간을 쓰고...,
종중의 어르신들도 계시니,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으신 분들께서 일들을 하심이 좋겠지..."
그냥 편하게 "형"아라고 부지지그려.
동항렬인데."
"저의 아버님께서도 아직 육십대 중반이십니다. 선생님께 어찌 '형'이라 호칭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편하게 선생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아우가 이렇게 찾아주니 참 고맙네."
"제가 바쁘시고, 큰일을 하시는 선생님께 사전 시간예약도 없이 불청객으로 찾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무엇보다도 하실 일을 저 때문에 못하신듯하여 죄송합니다."
"아닐세. 한동안 생각치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함께 회상하며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네.
지금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도록 열심히 하게. 시간을 가장 큰일에 쓰도록 하면 훗날에는 잘 될거야. 잘 가게..."
녹음이나, 메모를 하며 말씀을 나누지 못하였고, 밖에 나와서 메모를 해보았고, 그를 토대로하여 인터뷰형식처럼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가능한 오해가 없도록 조심해서 썼습니다. 가능한 첨삭이 없이 썼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형님이었고, 찾아 뵙길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미력하나마 종중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종중 어르신들이 함께 하신 자리에서 김태길 형님을 함께 뵐 수 있길 기원합니다. ^^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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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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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지금하는일에 최고가 되라]는 말씀 가슴에 와 닿습니다
훌륭한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글올려주신 태수씨께도 감사드립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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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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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지난 일요일, 괴산에서의 묘바 건립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무심코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신 님의 정성에 크게 감복했습니다.
그리고 만남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해주어 감사합니다. 또 김태길 선생님의 귀함 몇가지 말씀은 잊지않겠습니다. 자기 일에 최고의 자가 되라고--.
감사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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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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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바쁘신 가운데 초면의 젊은 일가의 방문에 기꺼이 시간을 내주신 김태길 종친님과 마음먹은 결심을 즉각 실천해보인 태수씨의 28촌 형제간의 대담 내용을 보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을 되새깁니다 "지금하는일에 최고가 되라"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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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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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반갑습니다.훌륭한 말씀 잊지않겠습니다.
김태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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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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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글을 올리기에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기에...
저의 기억력과 표현력이 부족함을 탓하며 겨우 맺음말을 지었습니다.
좋게 읽어 주시니 무척이나 고맙게 느끼고,
격려하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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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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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국보급 어르신과의 만남을 이루셨고 알찬 내용 전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
세덕사 잔디밭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 오랫동안 저의 기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泰首 아저씨 ! 이 홈이 용광로와 같이 펄펄 끓을 것 같은 느낌 입니다!
김재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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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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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훌륭한 생각과 대단한용기 정말 본받고 싶군요 정말 잊지않겠습니다
김 우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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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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찿아 뵈옵는 그용기에 칭찬을 주고 싶네요. 어렵고 바쁘드래도 족친은 만남이
참 중요하리라 봅니다. 항용선생의 그업적에도 더 감사를 드림니다.
이제는 가끔 신문에서나 뵈옵니다만 태길교수님의 내내 건강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