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말 충의열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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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3-05 01:09 조회1,878회 댓글0건본문
고려말 충의열전 표절(表節)편 안렴사공
김 사렴(士廉) 호는 오은(梧隱)이니 안동인(安東人)으로 부밀직사사(副密直司事)
천 의 아들이요. 좌정승 복창부원군 영후(永煦)의 손자요, 이조개국 1등공신 사형(士衡)
의 형(兄)이며 평장사 방경(平章事 方慶)의 후손이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여 공민왕 초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正二품)을
역임하고 벼슬이 안렴사(安廉使)에 이르렀다.
선생은 문학과 기절(氣節)로 세상에서 추중(推重)하였으며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과 친교를 맺고 함께 직언(直言)으로 간(諫)함으로써 저명하였다.
공민왕 14년 (1365) 왕이 신 돈(辛旽)을 총애하여 직급을 올리고 공신호를 내리자 선생이
충분의격(忠奮義激)하여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르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社稷)*은 장차 혈식(血食)*
을 얻지 못하리이다." 고하였다. 드디어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함에
청주 오근촌(梧根村)으로 은거하여 일찍이 한양을 향하여 않지도 아니하였으며 매향
"열녀는 불경이부이거늘 충신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길것이냐"(烈女不更二夫 忠臣豈事二君)
하였다.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운곡(耘谷)의 집으로 모여 단사(壇祀)에 종참(從參)하였다.
이 단사는 운곡 원천석 (耘谷 原天錫)선생이 고려의 종사(宗社)를 잇고자 원주 치악산 정상
에다 단(壇)을 만들어 단군.기자 .고려태조등 열성(列聖)과 공민왕.여흥왕.윤왕.간성왕등
변혁(變革)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고려조에 충성하다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충신들을
매년 춘추로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태조(李成桂)가 선생을 좌사간(左司諫)을 삼아 여러차례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고 드디
어 도산(陶山)으로 옮겨가 더욱 문을 굳게닫고 손님도 거절하였다.
임종이 다가옴에 여러 아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
을 도와 국가를 존속시키지 못하고 나라가 망함에 또한 몸을 순국치못한 천하의 죄인이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선왕을 뵈옵고 선조를 함께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깊은 산중에 장사
하여 봉분도 짖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이미 전조에서 벼슬한 자는 다시 벼슬하지 말라"
고 유계(遺戒)하였으므로 그 유명을 쫓아 평장하였다.
숙종 34년(1708) 송천사(松泉祀)를 세워 향사하고 뒤에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경현사
(景賢祀)에 배향하였다. 뒤에 숙종(肅宗)은 선생을 가상하여 " 일편도산 만고수양"
(一片陶山 萬古首陽) 이라는 과제로서 응과생(應科生)에게 과거를 보였고,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은 "충병일월(忠昞日月) 절고산악(節高山岳) 일편도산 만고수양"이라 하였다.
▣ 김은회 -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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