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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공파 자료(1) 선계(先系)-충렬공(방경)-판서공(선)-양간공(승택)-상락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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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5-03 16:44 조회1,75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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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공파 자료가 홈에 올라오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정리 해 보았습니다.

 

안정공후손께서 다시 정리하여 본 홈이 장식되기를 기대합니다.

 

혹 잘 못 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1세 忠烈公 (金方慶)

 

안동김씨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휘 방경(方慶) 소개

  김방경(金方慶). 충렬공(忠烈公). 1212년(강종1)---1300년(충렬왕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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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효인(孝印)의 아들.  고종때 음보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때 몽고병이 침입하여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년(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하였고, 뒤에 상장군으로서 남경 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猖)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어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만 5천명의 여원 연합군 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에는 앞의 일본 정벌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흘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흔도,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 일본 이끼조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그 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상락군 개국공이 되었다.(上洛郡開國公-'郡'은 고려 五等爵의 하나. 종2품으로 국공(國公)의 아래.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는데, 公은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음).

 충선왕때 공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正一品)으로 추증됐으며, 89세에 歿하고 安東에 墓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公을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한다.

 

자세한 사항은 본홈 <안동김씨소개-시조소개>란을 참조하세요

 

 

 

2세 판서공  김선(金선)

 

 

 

<판서공>(휘 愃) 단묘    

   --전법판서김공제단비 군부인순창설씨합향(典法判書金公祭壇碑 郡夫人淳昌薛氏合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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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서공 휘 선 단묘 및 단묘비>

 

 <판서공휘선단비명(判書公諱愃壇碑銘)> - - (譯文)   (2002. 9. 7. 발용(군) 제공)

공(公)의 휘(諱)는 선(愃)이니 신라경순왕(新羅敬順王)의 후예(後裔)로서 태수공(太守公) 휘 이청(諱利請)이 관적(貫籍)을 안동(安東)으로 받았으니 즉(卽) 공의 오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의화(義和)이니 예부시랑(禮部恃郞)이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민성(敏成)이니 한림(翰林) 직사관(直史館)이며 조부(祖父)의 휘(諱) 효인(孝印)은 한림학사(翰林 學士) 병부상서(兵部尙書)이며 황고(皇考)의 휘(諱)는 방경(方慶)으로 고려(高麗) 충열왕시(忠烈王時)에 재차(再次)나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封)하였고 충열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으셨으며 비(妣) 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 죽주박씨(竹州朴氏)는 문화성기거랑(門下省起居郞) 지제고(知制誥)) 휘익정(諱益旌)의 따님이라 성질이 조용하고 곧으시며 덕(德)이 있어 효행(孝行)으로 구고(舅姑)를 섬기고 예의(禮義)로서 친척(親戚)을 대접하였다.
공께서 충선왕(忠宣王)때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전법판서(典法判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셨으니 그 영화(榮華)로 어버이를 섬기고 도의(道義)로 임금을 섬기어서 풍성(豐盛)한 공적(功績)과 위대(偉大)한 충성(忠誠)은 국사(國史)에 실려있다. 장남(長男) 자(資)는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후사(後嗣)가 없고 이남(二男) 승용(承用)은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이며 시(諡)가 충숙(忠肅)이요 삼남(三男) 승택(承澤)은 정승(政丞)으로서 영창군(永昌君)에 봉(封)하고 시(諡)가 양간(良簡)이며 사남(四男) 승우(承祐)는 상서(尙書)이고 따님은 나주(羅州) 라윤(羅允)에게 출가(出嫁) 하였는데 관(官)이 동경유수(東京留守)였다. 충숙공(忠肅公)이 이남(二男)이 있었으니 장남 후(厚)는 상락군(上洛君)이요 다음에 구(玖)는감찰사(監察司) 장령(掌令)이며 양간공(良簡公)에 이남이 있었으니 장남의 묘(昴)는 평장사 (平章事) 상락군(上洛君)이며 다음에 사고(師古)는 안렴사(按廉使)이며 상서공(尙書公)의 일남(一男) 지연(之衍)은 좌윤(佐尹)이며 그 밑으로 유복지친(有服之親)이 차례로 벼슬에 올랐으나 가히 모두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아! 냉평국 대부인 박씨(冷平國大夫人 朴氏)와 공(公)의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된지 오래되여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함이 몇백년(百年)인지 알 수가 없어 자손의 슬픈 한(恨)이 과연 어떠하였으리요 오직 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은 곧 五十年 전에 안동회곡동(安東檜谷洞)에 설단(設壇)을 하여 이를 행사(行祀)하고 비(碑)를 세웠는데 슬프게도 공은 아직 설단(設壇)을 마련하지 못하여 매년(每年) 서리가 내릴때면 슬프고 황공한마음 뿐이더니 부안(扶安)에 살고있는 후손(後孫) 봉묵(鳳黙)이 선조(先祖)를 추모(追募)하는 마음이 독실(篤實)하여 각파종중(各派宗中)에 통고(通告)를 하고 정성을 다한 자금(資金)을 모아서 지난해 봄 청명때 강진(康津) 충숙공묘(忠肅公墓) 상위(上位)에 설단(設壇)을 하고 금년 가을에 마침 비(碑)를 세워 행사(行祀) 조상(祖上)을 숭존(崇尊)하는 지극한 정성과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는 예도(禮道)가 지극하여 천리길을 멀다하고 와서 불초(不肖) 중회(重會)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니 불초 선조(先祖)의 사업이라 감격(感激)을 이기지 못하여 외람함도 잊고 감히 이와같이 기록하노라.
孔子誕降後 四十二週(西紀 一九六七年) 丁未 八月 下旬에
                                                            二十四世孫 重會 謹撰
                                                                      裔孫 正會 謹書
                                                                             總務 敬黙

   군사공파 자료에서 인용

 

 

3세  양간공 (김승택)

 

良簡公(휘 승택)) 壇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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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소>

18,良簡公 諱 承澤 設壇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고조는 상서상 우복야공 휘 敏成이요 증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공 한림학사 휘 孝印이며, 조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중찬 諡 忠烈公 諱 方慶이고,祖는 냉평국부인 竹州朴씨이니라.

  서기 1580년 宣祖朝에 충렬공을 吾門 안동김씨의 世祖로 創譜하였으니,考2세는 전법판서 상장군 휘 이요, 는 순창군부인 순창설씨이다.  三世 長은 대호군 도첨의사사 제조공 휘 資인바 공의 증손인 밀직부사 휘 精에이르러 내서사인 재당숙 휘 齊顔과 더불어 申頓謀朱死에 괴로역살되니 오안동김씨종가종손은 탈보되어 수안김씨로 이적하고 휘제안공의 후손계는 사천김씨로 각각 분관하니라.  三世 仲은 보문관대제학 시충숙공 휘 승용인바 기후손은 판밀직사사공 휘칠우,개성윤공 휘칠림,군사공 휘칠양, 공조전서공 휘성목,밀직부사공 휘천순으로 각각 분파하고 次가 오파계조 양간공 휘승택이며, 季가 상서공 휘승우계인바 장손 현감 휘 윤계는 청주 김씨로 분적하고 차손이 대호군공 휘 유계로 분파하니라. 오조 양간공의 배위는 시 충선공 휘 흔 지녀이니 낭랑국부인 경주 김씨요, 그 조는 추밀원 부사공 휘 경손이요, 증조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시 문장공 휘 태서이니라.

 양간공께서는 충렬왕 대에서부터 충정왕까지 고려 6대왕 100년간의 원몽지속하의 조정이 남으로는왜구의 침입을 방어해야하고, 북으로는 배원정책과 舊疆회복에 진력하여야 하는 국가 수난기 중의 재상이시었다. 고려 전통 유가에 태어나신 유신으로써 서리 1342년 6월에는 종형제인 상락부원군 시문숙공 휘 영돈과 복창부원군 시 정간공 휘 영순 그리고 계림부원군 이제현 제공등과 더불어 적신 조적의 구난을 평정하여 이등공신에 훈봉되고, 서기 1352년 충혜왕 8월에는 이재현, 한희유, 안진, 백문보, 정간공 영순 등 제공과 함께 서연을 열어 경일시덕함에 원로대신들과 논차로 입시하야 경사법원을 증강하시었다. 부군께서는 천품이 엄의관후하시고, 자혜애인 하시었으며 박학호문 경청경지하고 법도계리 강유상제 하시었는지라 백성이 권세가의 수탈당한 전답 노비와 적년의 송사와 면체한 옥사등은 공평히 양찰하여 국정을 치적하신 명정승이라 쓴 고려사 세가재38을 써 옮겨준다. 10월에 첨의찬성사의 승서되시고, 공민왕 7년 서기 1358년 7월 태백성이 3개월이나 나타났을 때 서거하시니, 양간공의 후손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과 52인 무과 4인이 배출되어 혁혁명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부군의 장자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상낙군 휘 昴요, 차자는 안렴사공 휘 冕이니, 차계는 도평의사사 소경공 휘 九鼎계로 분파하였다. 오호라! 양간공 승하가 630여년이라.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이에 늦게나마 촌마두인의 정성으로 이 곳 취백림 금수단에 설단하고 궐향 점황의 옷깃을 여미며, 국궁 혜배 하오리니 이 어찌 오문의 일대 경행이 아니리요. 언간에 본역 삼위지설단 추진사업에 포천의별제공 후손 종중의 협찬이 지대하였음을 치사하면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졸문이나마 불사음기로서찬하노라.

                                                    서기 1990년 3월

                                                    양간공 22세손 재승 근찬

                                                    양간공 22세손 재홍 근서

                                                                                                                        문온공파 자료에서 인용

 

4세  상락군 (김묘)

 

上洛君 諱 昴(휘 묘) 壇所   

                keum29.jpg         

                            

20.上洛君(휘 ) 設壇 墓碑文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 휘는 昴이니 관은 고려국 숭정대부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의정부 찬성사요, 상락군의 치사하였다. 고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仁이요, 증조는 선충현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 상낙군 개국공 첨위령 시충렬 휘 方慶이며, 조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휘 小宣 이요, 考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이정정승 영창군 치사 휘 承澤이시다. 부군께서는 서기 1315년 1월 신유에 대과 방안랑에 등제하시니 천품이 박학호문 자혜애민 하고 견방공덕 법도계리 하며 이정지화 유덕안중하고 경신고명 온양호학 하시었으니 공사가 천덕하시고 제자 예우는 공손히 외경존중하여 환대교우하시니 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으시었다. 배는 삼한국부인 여흥 민씨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연관 대제학 시 문온공 호 及菴 휘 思平之女요, 祖는 판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대사헌 여흥군 시 문순공 휘 적이며, 증조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복창군 시 충순공 휘 종유요, 외조는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언양김공 윤이다.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명가의 출생하시어 부도를 익히시었으니 그 자녀서들은 자당의 법도를 본받아 환중일지라도 조석문안을 궐하지 않고 부모의 효를 다 하였었다. 급암 선생은 무남 절손 하시었으나 출가지녀 여흥 민씨께서는 생 男三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영가화문의 품성이 유유초연하고, 기백이 호호강의함은 낙강 상낙대에 비롯하니 망망차해를 건너 사사독강의 순국하신 조상의 얼이 스며서인가 경향의 종인들이 힘을 모아 늦게나마 삼위지단을 설하여 세 일제를 봉사하니 개경의 충혼은 이제 영원히 이 곳에 안면하리다.

                                    서기 1990년 3월

                                    상락군 21세손 在承 謹撰

                                    상락군 21세손 在洪 謹書

                                                                                                                    문온공파 자료에서 인용

 

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 (여흥군부인 민씨 묘지명)

   원문 생략(볼 수 있는 곳:문온공파 파보 122page.목은집,동문선)

   번역문

  나의 벗 김구용씨가 금년 윤 5월 갑진 이래 그의 어머니 여흥군 부인 (추봉 삼한국부인)민씨를 조모 김씨(영창군 시 양간공 휘 승택 지배위 추봉 낭랑국부인 경주김씨)의 묘소에서 바로 그 서쪽 십수보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미 그의 장자인 참군사 명선을 그 곳에 보내고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여 왔다. 나는 김구용씨와 지내는 도의상 사양하지 않고 그 집안의 가계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온공 급암선생이신 휘 사평은 부인의 아버지요, 광정대부 부 밀직사사 시 문순공 휘 적은 조부이시며, 도첨의찬성사 시 충순공 휘 종윤은 그의 증조부가 되시며,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호 죽헌 언양김공 윤은 외조부가 되시니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바이다. 부인께서 그러한 명문가에 태어나시어 견문을 익혀 배우시고 모든 일을 한결같이 하시니 이 모두가 그의 어머님의 법도를 본받았음인지라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를 다하였고, 조석문안은 병환 중일지라도 그치는 일이 없어 종족이 모두 칭송하였었다. 서기 1361년 겨울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개성에서 남쪽 여흥 땅에 내려갈 때 부인이 그의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가셨는데 그의 어머님의 평안함이 평소 급암댁에 계시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부인께서는 여흥의 고향에서 10여년을 살으셨는데 더욱 부지런히 섬기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부인의 아들과 사위들이 서울(개경)로 돌아오시도록 간청하였으나 부인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친정 어머님을 이 곳 여흥 땅에 묻어두고 내가 가버린다면 묘소의 첨소를 궐하게 되니 내 어찌 견디리랴. 내 어찌 견디리랴." 하시었다. 그 후 5월 계사일에 부인이 병환으로 개성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이었다. 구용씨가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님은 청덕하시어 지식이 높은 분을 두렵게 존경하시고 부모에겐 오래도록 봉양하시기를 즐기셨는데 이제 어머님 마저 돌아가셨으니 어찌 하리오." 하였다. 이에 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착하신 어머님이시었도다." 문온공 급암 선생께서는 비록 아들이 없었으나 이러한 따님을 낳으심으로써 구용씨 댁과 서로 역사의 전승을 이루었으니 가히 어지시다고 말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아들 삼형제를 두셨는데 장자 구용은 전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 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이요 차남은 제안인바 중의대부 병부랑중 겸 첨서하남강북등처행 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사천김씨 시조 김부의 아버지)이며, 다음 삼남은 구덕(안정공)은 전 좌우위보승산원이다. 딸이 아홉이니 전 밀직사부사 김사안, 전 개성윤 이장로, 전 종부령 최유경, 전 낭장 허호, 전 부령 허선, 박사 이존사, 문하주서 김섬에게 각각 출가하고, 다음은 미혼이다.(8녀 4윤 김천수 9녀 부정 최자하) 명(묘지의 끝에 쓰는 그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에 이르되

  만물은 필연히 그 근본으로 돌아가라니

  죽음이란 끝이 아니도다

  여흥 민씨는 이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돌아가셨으니

  저 강이 구비쳐 흐르는 것처럼 어찌 끝이 있단 말이요

  좋은 것 모두 갖추었으니

  이는 영가(안동의 옛 이름)김씨의 가풍이 되리라

문충보절찬화공신 숭록대부 정당문학 집현전 태학사 지 춘추관사 겸 성균관 대사성 한산 목은 이색 씀.

 

                                          문온공파 자료에서 인용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숙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재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재이
작성일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