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祖 筆蹟을 찾아서-조선02 (金紐01)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3-12 01:19 조회1,792회 댓글0건본문
先祖 筆蹟을 찾아서-조선02 (金紐01)
안정공파이신 김뉴(金紐) 선조는 1420(세종 2)∼?
부(父) 김중엄(金仲淹),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는 안정공 김구덕(金九德)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입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등 여러개나 되며.
남들은 1번도 하기 어려운 문과에 3번이나 급제하신 분입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고 합니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 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팔경시 또는 8장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인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김뉴 선조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그가 그린 雪憔圖(설초도) =雪中採樵圖(설중채초도) 그림은 [서울 600년]이라는 책자에 실려 있는데, 그림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 김유(金紐)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본관은 안동. 상락공 방경의 7대손. 세종2년 경자 (1420) 생, 세조9년 갑신 (1463) 에 문과하고 벼슬은 참판
초서행(草書行)을 지어서 김자고(金子固)에게 주기를
二張己浙右軍非 이장(二張: 張芝,張旭)도 이미 갔고 우군(右軍: 王羲之)도 갔으니
章草稱聖天下稀 장초(章草)에서 성인이라 일컬을 이가 별로 없다.
中間作者多似雨 그 사이에 명필이란 자가 빗발같이 많으나
家鷄野?不須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같은 것은 쳐줄 필요조차 없다
君從何處得草訣 그대는 어디에서 초결(草訣)을 얻어 왔는고
筆劃超諸 ?奇絶 당신의 글씨는 모두 기이하고 뛰어나게 되었다
如今爲我書數張 지금 나를 위하여 두어 장을 썼으니
風雨 ? ?生中堂 마루 가운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다
鸞翊鳳 ? 龍躍난(鸞) 새가 춤추는 듯, 봉황이 나는 듯, 용이 뛰는 듯
玉樹交柯?鐵索 옥수(玉樹)가지에 쇠사슬이 얽히고 설켰구나
一肥一 ?骨肉均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고루 배치되었으니
飛動變化驚鬼神 날고 뛰고 변화하여 귀신을 놀래키는구나
---(하략)--- <사가집>
자고는 평양부원군 조준(趙俊)의 외손이니 부귀가에 나서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단속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데에 능했으며 또 행서와 초서를 잘 썼고 거문고까지도 뛰어났다.
여러번 대과(大科)에 당선되어서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대신들이었다. 잔치 베풀기를 좋아했으니 술잔 같은 모든 도구들이 지극히 호화롭고 사치했으며, 문아(文雅)가 한 시대를 휩쓸었다.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년에 두 발이 마비되어서 일어나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하고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용재총화>
이李자는 金자의 잘못이다 유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세조때 사람. 문과하여 벼슬은 판서. 그림을 잘 그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필적모간 <해동명적> <초로관주>
*章草(장초) : 초서의 일종으로 필획에 隸書(예서)의 파임이 있고 매 글자를 독립해 쓴다. <書斷 上> 또는 초서를 章奏文(장주문)에 통용해 쓰므로 이렇게 부른다 <日知錄, 草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 晉(진) 庾翼(유익)의 고사. 유익이 글씨를 잘 썼는데 아들들이 자신의 글씨를 배우지 않고 王羲之(왕희지)의 글씨만 배우므로 "우리 아이들은 집안의 닭은 싫어하고 들판에 있는 따오기만 좋아한다" 고 했다. <晉中興書>
*草訣(초결) : 草書를 쓰는 비결
*泮宮(반궁) : 반궁은 周代 諸侯(제후)의 學宮(학궁). 여기에서는 成均館의 별칭
*子固 : 원문에는 子缺로 되어 있으나 출전인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地理典故, 山川形勝)에 子固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 잡는다.
▣ 신고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 金紐의 書畵詩琴 (김뉴의 서화시금)
김뉴(1420- ? )는 본관이 안동, 김방경의 후손, 자가 子固(자고)요, 호가 琴軒(금헌), 翠軒(취헌), 雙溪齋(쌍계재), 觀後庵(관후암), 上洛居士(상락거사) 등으로 많았다.
그는 세조10년(146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호조좌랑이 되어서 [경국대전] 중의 [吏典]을 校(수교)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급제, 동년의 등준시에도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書畵詩琴(서화시금)으로 이름이 높았다.
[四佳集(사가집)]에 의하면 ---(중략)--- 이라 하였다.
그가 초서와 행서를 잘 썼다는 사실은 [ 齋叢話(용재총화)]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즉 ---(중략)--- 이하 하였다.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
홍응이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발문에 쓰기를,
"우리집 외조모는 바로 익재의 손녀이시니, 그 분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에 가득했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그다지 아낄 줄을 몰라서 쉽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못했다. 아 슬프다. 자손으로서 경솔하여 제구실하지 못함이 이러했구나.
그런데 지금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을 보니 시체(詩體)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으니 해서법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자고의 독실하게 좋아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어떻게 다시 그 진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익성(益城)의 야로(野老)는 쓰노라 <해동명적>
*金紐 (세종2, 1420- ?) :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三絶.
*野老 : 노인의 별칭
▣ 서울600년 4권 (1996, 김영상)
⊙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맹(1424-1483)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어서 죽은 뒤에 성종 임금께서 친히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서울을 명소를 소개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이화동 근방에 있던 쌍계동과 이곳의 쌍계재를 혼동하는 예가 자주 눈에 띄나, 성균관 반수 위에 있던 쌍계재와 낙산기슭의 상계동은 전혀 별개의 명소였다.
(그림) 금헌 김유의 雪憔圖(설초도)
▣ 화인열전1 (2000, 유홍준) p360
4) 畵史補錄 下
琴軒 이뉴 (李紐 : 金紐[1420-?]의 오기) 는 세조때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올랐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용12齋叢話,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朴定子〉
⊙ 문과방목
김뉴(金紐) 세조10년 춘당대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김뉴(金紐) 세조12년 중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2년(1466년), 중시(重試) 2(2)
김뉴(金紐) 세조12년 등준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2년(1466년), 등준시(登俊試) 3(3)
김뉴(金紐)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20년, 경자
자(字) 자고(子固)
호(號) 쌍계(雙溪)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엄(金仲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 김구덕(金九德)
외조부(外祖父) 조대림(趙大臨)
처부(妻父) 이항,전양겸(李恒,全梁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丙戌1466)
전력(前歷) 녹사(錄事)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 김항용 - 사진자료를 이메일로 주시면 위 설명란 속에 삽입해 드리겠습니다.
안정공파이신 김뉴(金紐) 선조는 1420(세종 2)∼?
부(父) 김중엄(金仲淹),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는 안정공 김구덕(金九德)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입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등 여러개나 되며.
남들은 1번도 하기 어려운 문과에 3번이나 급제하신 분입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고 합니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 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팔경시 또는 8장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인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김뉴 선조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그가 그린 雪憔圖(설초도) =雪中採樵圖(설중채초도) 그림은 [서울 600년]이라는 책자에 실려 있는데, 그림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 김유(金紐)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본관은 안동. 상락공 방경의 7대손. 세종2년 경자 (1420) 생, 세조9년 갑신 (1463) 에 문과하고 벼슬은 참판
초서행(草書行)을 지어서 김자고(金子固)에게 주기를
二張己浙右軍非 이장(二張: 張芝,張旭)도 이미 갔고 우군(右軍: 王羲之)도 갔으니
章草稱聖天下稀 장초(章草)에서 성인이라 일컬을 이가 별로 없다.
中間作者多似雨 그 사이에 명필이란 자가 빗발같이 많으나
家鷄野?不須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같은 것은 쳐줄 필요조차 없다
君從何處得草訣 그대는 어디에서 초결(草訣)을 얻어 왔는고
筆劃超諸 ?奇絶 당신의 글씨는 모두 기이하고 뛰어나게 되었다
如今爲我書數張 지금 나를 위하여 두어 장을 썼으니
風雨 ? ?生中堂 마루 가운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다
鸞翊鳳 ? 龍躍난(鸞) 새가 춤추는 듯, 봉황이 나는 듯, 용이 뛰는 듯
玉樹交柯?鐵索 옥수(玉樹)가지에 쇠사슬이 얽히고 설켰구나
一肥一 ?骨肉均 여윈 뼈와 통통한 살이 고루 배치되었으니
飛動變化驚鬼神 날고 뛰고 변화하여 귀신을 놀래키는구나
---(하략)--- <사가집>
자고는 평양부원군 조준(趙俊)의 외손이니 부귀가에 나서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단속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 짓는 데에 능했으며 또 행서와 초서를 잘 썼고 거문고까지도 뛰어났다.
여러번 대과(大科)에 당선되어서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대신들이었다. 잔치 베풀기를 좋아했으니 술잔 같은 모든 도구들이 지극히 호화롭고 사치했으며, 문아(文雅)가 한 시대를 휩쓸었다.
서재를 남강(南江)에 짓고 또 반궁(泮宮) 북쪽 골짜기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서 매양 봄이면 친구들을 불러 시를 짓고 실컷 마시며 멋지게 놀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지목했으니, 시와 글씨와 거문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년에 두 발이 마비되어서 일어나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얘기하고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용재총화>
이李자는 金자의 잘못이다 유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세조때 사람. 문과하여 벼슬은 판서. 그림을 잘 그렸다. <연려실기술 별집>
필적모간 <해동명적> <초로관주>
*章草(장초) : 초서의 일종으로 필획에 隸書(예서)의 파임이 있고 매 글자를 독립해 쓴다. <書斷 上> 또는 초서를 章奏文(장주문)에 통용해 쓰므로 이렇게 부른다 <日知錄, 草書>
*집의 닭과 들판의 따오기 : 晉(진) 庾翼(유익)의 고사. 유익이 글씨를 잘 썼는데 아들들이 자신의 글씨를 배우지 않고 王羲之(왕희지)의 글씨만 배우므로 "우리 아이들은 집안의 닭은 싫어하고 들판에 있는 따오기만 좋아한다" 고 했다. <晉中興書>
*草訣(초결) : 草書를 쓰는 비결
*泮宮(반궁) : 반궁은 周代 諸侯(제후)의 學宮(학궁). 여기에서는 成均館의 별칭
*子固 : 원문에는 子缺로 되어 있으나 출전인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地理典故, 山川形勝)에 子固로 되어 있으므로 바로 잡는다.
▣ 신고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 金紐의 書畵詩琴 (김뉴의 서화시금)
김뉴(1420- ? )는 본관이 안동, 김방경의 후손, 자가 子固(자고)요, 호가 琴軒(금헌), 翠軒(취헌), 雙溪齋(쌍계재), 觀後庵(관후암), 上洛居士(상락거사) 등으로 많았다.
그는 세조10년(146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호조좌랑이 되어서 [경국대전] 중의 [吏典]을 校(수교)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급제, 동년의 등준시에도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書畵詩琴(서화시금)으로 이름이 높았다.
[四佳集(사가집)]에 의하면 ---(중략)--- 이라 하였다.
그가 초서와 행서를 잘 썼다는 사실은 [ 齋叢話(용재총화)]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즉 ---(중략)--- 이하 하였다.
▣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
홍응이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발문에 쓰기를,
"우리집 외조모는 바로 익재의 손녀이시니, 그 분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에 가득했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그다지 아낄 줄을 몰라서 쉽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못했다. 아 슬프다. 자손으로서 경솔하여 제구실하지 못함이 이러했구나.
그런데 지금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을 보니 시체(詩體)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으니 해서법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자고의 독실하게 좋아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어떻게 다시 그 진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익성(益城)의 야로(野老)는 쓰노라 <해동명적>
*金紐 (세종2, 1420- ?) :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三絶.
*野老 : 노인의 별칭
▣ 서울600년 4권 (1996, 김영상)
⊙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맹(1424-1483)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어서 죽은 뒤에 성종 임금께서 친히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서울을 명소를 소개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이화동 근방에 있던 쌍계동과 이곳의 쌍계재를 혼동하는 예가 자주 눈에 띄나, 성균관 반수 위에 있던 쌍계재와 낙산기슭의 상계동은 전혀 별개의 명소였다.
(그림) 금헌 김유의 雪憔圖(설초도)
▣ 화인열전1 (2000, 유홍준) p360
4) 畵史補錄 下
琴軒 이뉴 (李紐 : 金紐[1420-?]의 오기) 는 세조때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올랐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용12齋叢話,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朴定子〉
⊙ 문과방목
김뉴(金紐) 세조10년 춘당대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김뉴(金紐) 세조12년 중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2년(1466년), 중시(重試) 2(2)
김뉴(金紐) 세조12년 등준시에 입격한 김뉴(金紐)의 성명(姓名)
세조(世祖)12년(1466년), 등준시(登俊試) 3(3)
김뉴(金紐)
세조(世祖)10년(146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20년, 경자
자(字) 자고(子固)
호(號) 쌍계(雙溪)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중엄(金仲淹)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오문(金五文)
증조부(曾祖父) 김구덕(金九德)
외조부(外祖父) 조대림(趙大臨)
처부(妻父) 이항,전양겸(李恒,全梁謙)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丙戌1466)
전력(前歷) 녹사(錄事)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 김항용 - 사진자료를 이메일로 주시면 위 설명란 속에 삽입해 드리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