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蹟을 찾아서 -조선03 (金紐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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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3 02:34 조회2,031회 댓글0건본문
筆蹟을 찾아서 -조선03 (金紐02)
金紐(김뉴) 선조의 書畵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서거정 [徐居正 : 1420(세종 2)∼1488(성종 19)]의 시문집인 [사가집 四佳集]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성현 [成俔 :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의 수필집인 [용재총화 黛齋叢話]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 [1469(예종 1)∼1536(중종 31)]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歷代) 명가(名家)의 글씨를 모아서 석각(石刻)한 것을 탁본(拓本)하여 상하(上下) 2책(二冊)으로 엮은 [해동명적 海東名蹟] (보물 제526호) 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사가집 四佳集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의 시문집.
구분 : 목판본
저자 : 서거정
시대 : 1488년 간행
목판본. 63권 26책. 원래 성종 때(1488) 왕명으로 인간(印刊)되었으나, 유실되어 족손(族孫)인 서문유(徐文裕) 등이 산일(散佚)된 원간본을 바탕으로 보유(補遺)하여 1705년(숙종 31)에 개간(改刊)하였다. 책머리에 임원준(任元濬)이 쓴 서문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용재총화 黛齋叢話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구분 : 활자본
저자 : 성현
시대 : 조선 전기(1525)
활자본. 3권 3책.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 그 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책록되어 널리 알려졌다.
내용은 문담(文談) ·시화(詩話) ·서화(書畵)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人物評) ·사화(史話) ·실력담(實歷談)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문장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이다.
전편이 《대동야승》에 실려 있고, 시화(詩話) 부분은 《시화총림(詩話叢林)》에도 들어 있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에서 간행한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한글로 토를 달아 실었다.
1964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국역하여 《파한집(破閑集)》과 합본(合本)으로 간행한 바 있다.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 ·역사 ·종교 ·예술 등 문화발전을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해동명적 海東名蹟
종 목 보물 526호
명 칭 해동명적<상권20매 하권23매> (海東名蹟<上卷二十枚 下卷二十三枚>)
분 류 서예
수 량 2책 (冊)
지정일 1970.12.30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00-1 독락당
시 대 조선 중종
소유자 이해철
관리자 이해철
이 책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탁본이라 하더라도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비문에 나타나지 않은 필적을 많이 수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화재명 해동명적<상권20매 하권23매>(海東名蹟<上卷二十枚 下卷二十三枚>)
이 해동명적은 조선 중종(中宗) 때의 서예가(書藝家)이며 문신(文臣)인 신공제(申公濟)(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歷代) 명가(名家)의 글씨를 모아서 석각(石刻)한 것을 탁본(拓本)하여 상하(上下) 2책(二冊)으로 엮은 것이다.
상책(上冊)에 수록된 명적으로서는 조선시대의 문종(文宗)과 성종(成宗)의 어필(御筆)을 앞에 따로 놓은 다음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김생(金生), 영업(靈業) 3인과 고려(高麗)의 탄연(坦然), 이암(李암), 신덕린(申德隣)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가 선록(選錄)되었다.
하책(下冊)에는 이강(李岡), 승(僧), 혜근(慧勤), 성석린(成石隣), 박초(朴礎), 권근(權近), 이첨(李詹),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민자복(閔子復), 신색(申穡) 등 12인의 글씨가 정선(精選)되어 실렸다.
이 명적은 탁본이라 하더라도 고대(古代)의 서법(書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신라·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명가들의 필적(筆蹟)은 현재 금석(金石)을 통하지 않고서는 거의 얻어보기 어려운데, 이 책에는 비갈(碑碣)에 나타나지 않는 필적을 많이 수집하여 모각(模刻)하였으므로 여기서 새로운 자료를 얻을 수 있다.
⊙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1. 가계와 관직
호조전서(戶曹典書) 의(義)의 증손으로, 목사(牧使)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는데,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 생 략 >
2. 관찬 및 저술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 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 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으며, 이해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 筆苑雜記》를 저술하여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를 강하였으며, 다음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 四佳集》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 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 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 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하였으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성현(成俔)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용12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다.
< 생 략 >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 雙花店〉·〈이상곡 履霜曲〉·〈북전 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또,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용재총화 #용12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 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신공제(申公濟){1}
1469(예종 1)∼1536(중종 3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희인(希仁), 호는 이계(伊溪). 여절교위(勵節校尉) 홍(洪)의 아들이다.
< 생 략 >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고 촉체(蜀體)를 잘 썼다.
또한, 《해동명적 海東名蹟》이라는 동국명인의 필적을 간행하였다. 글씨는 광주안참판침묘비(廣州安參判琛墓碑)와 남원윤판서효손묘비(南原尹判書孝孫墓碑)가 남아 있다.
청백리에 피선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 김재원 -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끝없이 많은 자료를 찾아내시는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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