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선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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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3-13 23:47 조회1,858회 댓글0건본문
정사를 돌보던 편전, 선정전과 회정당
공식적인 국가행사카 치뤄지던 곳을 정전(正殿)이라 하고 보통 때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 던 곳을 편전(便殿)이라 한다.
경복궁의 편전이 사정전이었다면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 (宣政殿 ) 과 희정당(熙政堂) 이다.
희정당 선정전은 1405년 태종 5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재건하였으펴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으며 1467년 인조 25년에 중건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와 아담한 건물로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이은 것이 특징이다.
내부구조는 건물의 중앙 뒤쪽으로 어좌가 배치되고 그뒤 로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펼쳐져 있다.
신하들은 위계에 따라 동서로 줄지어 앉아서 국사를 논했는데 문반은 동쪽 무반은 서쪽이었다.
그 한켠에서는 사관이 앉아서 문답하는 모든내용을 속기하였으니 이를 사초로 삼아 왕조실록을 만들었다.
어좌 위에는 보개를 장치하여 권위와 위엄을 한껏 갖추었으며 보개 천장에는 금빛 여의주를 문 황룡과 봉황, 꽃구름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희정당은 선정전 동쪽에 위치한 침전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정사를 보는 편전으로 활용되었다.
1496년 연산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인조반정, 순조 때 등 여러 차례의 화재로 중건을 거듭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지은 것이다.
겉모습은 옛법에 따르고 있지만 내부왔조는 다른 전각에 비해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던 개화기의 세태를 보여준다.
방을 개조하여 응접실로 꾸미고 서양식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으며 그 옆에는 현대적인 회의실도 꾸며져 있다.
응접실 동쪽벽면에 거대한 그림이 장식되어 있는데 구한말의 대가였던 해강 김규진 선생이 그린(금강산만물도)와 (총석정해금강도) 벽화이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순종은 여기에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비운의 역사를 맞기도 했었다.
용마루가 없는 집 , 대조전
희정당 북쪽에 자리잡은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 내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왕비의 침전이다.
대조전
궁궐도의 대조전 국가의 기틀을 이어가는 왕세자를 생산하고 나라 의 동량으로 키우는 일이야 말로 위대한 창조에 다름아니므로 대조전이라 명칭하였다.
태종 때 창건하였으펴 임진왜란을 비롯한 계속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네번째로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와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앞마당에는 왕비의 처소답게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대기하던 곳이자 하례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설치된 것.
월대의 모퉁이에 화마를 쫓은 드무를 설치한 것도 이 건물의 위상을 말해 준다.
대조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용마루에 해당하는 부분을 곡와(曲瓦) 라 하여 특별히 제작한 기와로 처리했다.
동양철학 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음양샤샹에 의해 대조전은 땅을 상징하는 곤전(坤殿)인 까닭이다.
선인들은 왕자를 생산하는 일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대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왕비의 침전의 용마루는 땅과 하늘의 기운이 소통되는 것을 차단하는 장애물로 보였으며 음양간의 조화에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왕비의 침전에는 왕이 언제라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성은을 내릴 수 있도록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왕의 존재가 곧 건축에서 용마루와 같은 지엄한 존재였으며 두 마리의 용이 필요치 않았던 셈이다.
용마루 뿐만 아니라 대조전의 기둥을 바깥에는 사각기둥을 내부에는 등근기둥을 사용한 것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모난 것은 땅, 둥근 것은 하늘을 뜻하는 것이니 이 속에 사람이 들면 천지인(天地人)인 하나가 되어 이상적인 세계가 구현된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대조전에서 또 하나 빼어놓을 수 없는 곳이 후원 의 아름다움이다.
완만한 산자락을그윽한담장으로 두르고 언덕받이의 경사는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4 단의 화계를 만들었다.
소나무, 진달래, 산죽들이 우거진 사이사이 괴석을 배치했으펴 학과 용무의가 새겨진 전돌로 쌓아올린 굴뚝도 마치 탑을 쌓듯이 정성과 맵시를 다했다.
그윽하면서도 단아한 정취가 감도는 조선왕조 특유의 조경미학이다.
담장가운데 계단을 밟고오르면 축성문이 있고 그 너머에는 왕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후원의 정자 가정당(嘉靖堂)이 한껏 운치를 뽐내고 있다.
[
▣ 김영환 - 접하기 어려운 자료를 발굴 게재하여 주신데 감사합니다.
▣ 김정중감사 -
▣ 김재원 - 설명 또한 감사합니다.
공식적인 국가행사카 치뤄지던 곳을 정전(正殿)이라 하고 보통 때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 던 곳을 편전(便殿)이라 한다.
경복궁의 편전이 사정전이었다면 창덕궁의 편전은 선정전 (宣政殿 ) 과 희정당(熙政堂) 이다.
희정당 선정전은 1405년 태종 5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재건하였으펴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으며 1467년 인조 25년에 중건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와 아담한 건물로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이은 것이 특징이다.
내부구조는 건물의 중앙 뒤쪽으로 어좌가 배치되고 그뒤 로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펼쳐져 있다.
신하들은 위계에 따라 동서로 줄지어 앉아서 국사를 논했는데 문반은 동쪽 무반은 서쪽이었다.
그 한켠에서는 사관이 앉아서 문답하는 모든내용을 속기하였으니 이를 사초로 삼아 왕조실록을 만들었다.
어좌 위에는 보개를 장치하여 권위와 위엄을 한껏 갖추었으며 보개 천장에는 금빛 여의주를 문 황룡과 봉황, 꽃구름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희정당은 선정전 동쪽에 위치한 침전의 하나로 내전에 속하는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정사를 보는 편전으로 활용되었다.
1496년 연산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인조반정, 순조 때 등 여러 차례의 화재로 중건을 거듭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지은 것이다.
겉모습은 옛법에 따르고 있지만 내부왔조는 다른 전각에 비해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던 개화기의 세태를 보여준다.
방을 개조하여 응접실로 꾸미고 서양식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으며 그 옆에는 현대적인 회의실도 꾸며져 있다.
응접실 동쪽벽면에 거대한 그림이 장식되어 있는데 구한말의 대가였던 해강 김규진 선생이 그린(금강산만물도)와 (총석정해금강도) 벽화이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순종은 여기에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비운의 역사를 맞기도 했었다.
용마루가 없는 집 , 대조전
희정당 북쪽에 자리잡은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 내전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왕비의 침전이다.
대조전
궁궐도의 대조전 국가의 기틀을 이어가는 왕세자를 생산하고 나라 의 동량으로 키우는 일이야 말로 위대한 창조에 다름아니므로 대조전이라 명칭하였다.
태종 때 창건하였으펴 임진왜란을 비롯한 계속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네번째로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와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앞마당에는 왕비의 처소답게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대기하던 곳이자 하례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설치된 것.
월대의 모퉁이에 화마를 쫓은 드무를 설치한 것도 이 건물의 위상을 말해 준다.
대조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용마루에 해당하는 부분을 곡와(曲瓦) 라 하여 특별히 제작한 기와로 처리했다.
동양철학 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음양샤샹에 의해 대조전은 땅을 상징하는 곤전(坤殿)인 까닭이다.
선인들은 왕자를 생산하는 일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대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왕비의 침전의 용마루는 땅과 하늘의 기운이 소통되는 것을 차단하는 장애물로 보였으며 음양간의 조화에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왕비의 침전에는 왕이 언제라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성은을 내릴 수 있도록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왕의 존재가 곧 건축에서 용마루와 같은 지엄한 존재였으며 두 마리의 용이 필요치 않았던 셈이다.
용마루 뿐만 아니라 대조전의 기둥을 바깥에는 사각기둥을 내부에는 등근기둥을 사용한 것도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모난 것은 땅, 둥근 것은 하늘을 뜻하는 것이니 이 속에 사람이 들면 천지인(天地人)인 하나가 되어 이상적인 세계가 구현된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대조전에서 또 하나 빼어놓을 수 없는 곳이 후원 의 아름다움이다.
완만한 산자락을그윽한담장으로 두르고 언덕받이의 경사는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4 단의 화계를 만들었다.
소나무, 진달래, 산죽들이 우거진 사이사이 괴석을 배치했으펴 학과 용무의가 새겨진 전돌로 쌓아올린 굴뚝도 마치 탑을 쌓듯이 정성과 맵시를 다했다.
그윽하면서도 단아한 정취가 감도는 조선왕조 특유의 조경미학이다.
담장가운데 계단을 밟고오르면 축성문이 있고 그 너머에는 왕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후원의 정자 가정당(嘉靖堂)이 한껏 운치를 뽐내고 있다.
[
▣ 김영환 - 접하기 어려운 자료를 발굴 게재하여 주신데 감사합니다.
▣ 김정중감사 -
▣ 김재원 - 설명 또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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