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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忠武公) 김응하(金應河)장군 영정(影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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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5-21 14:34 조회1,47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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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하        金應河 선조 13년(1580)~광해군 11년(1619)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희(景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시대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키가 8척이고 힘이 세어 일찍이 장사로 알려졌다. 선조 37년(1640)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오랫동안 말직에 머물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이듬해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선조 41년(1608)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자 그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으며, 관해군 2년(1610)에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재상 이항복의 추천으로 경원판관, 도총부경력, 삼수군수등을 지냈다. 광해군 10년(1618)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여진족)를 치기 위해 지원 병력을 요청하자 선천군수로 조방장(助防狀)이 되어 원정을 나갔으며, 이듬해 1만3천의 후원군을 거느린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좌영장(左營狀)이 되어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명나라 도독 유정이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거령(副車領)에서 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자 조선군은 6만의 적군과 대전하게 된 데다가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도원수 강홍립의 소극적인 태도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군사들이 전의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를 요동백(遼東佰)으로 봉했다. 


초상화의 복식은 사모와 흉배를 달지 않은 무늬 없는 담홍색 단령을 착용한 시복時服 차림이다. 시복 은 사모紗帽, 단령團領 , 대 , 화 로 구성된다, 『광해군인기』 2년(1610) 9월조,3년(1611) 10월조에 의하면 흑단령은 시복, 홍단령은 상복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흑단령을 시복으로 인식했을지라도『지봉유설』에 기록되어 있듯이, 김응하는 당시의 풍속을 따라 홍단령을 입은 듯하다. 단령은 고대가 넓은 데 비해 깃이 많이 패이지 않고 깃 너비는 비교적 넓은 조선 중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모는 1600년을 전후하여 모정이 점차 낮아지는데, 초상화의 사모도 모정이 낮고 위가 평평하며, 양각은 같은 시대에 비해 약간 길고 좁은 편이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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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韓宗裕(한종유) : 본관은 신평. 교수 한후량의 증손. 화원으로 벼슬은 감목관. 충무공 김응하의 초상화가 너무 오래되어 닳아 없어져서 신묘년(영조41,1771) 봄에 화사 한종유로 하여금 모사하게 하여 중간했다 <중간충렬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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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본 홈 충무공의 사진을 이것으로 바꾸면서 동시에 영정 해설문을 이것으로 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