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11 (金瞻김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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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6 23:15 조회2,105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11 (金瞻김첨)
서운관정공파 유연재 김희수 - 동고 김로 - 남봉 김홍도 - 1김첨 (2김수) - 김성립 - 김진 으로 이어지는 家系는 6대 연속 문과급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6대 모두 시서화를 일가를 이루었고,
또한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어 신사임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하당공 김첨(金瞻) 선조는 1542(중종 3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이며, 아버지는 전한 홍도(弘度)이며, 허난설헌의 시아버지가 됩니다.
작년에 KBS에서 방영된 [천둥소리]에 보면 며느리인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 이산해, 유성룡 등과 함께 남인세력을 형성하여 이율곡과 대립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국역 석릉세적에
그리고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槿域書彙]에 휘瞻과 휘 의 필적이 전하고 있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하당공 김첨의 필적 1점이 전해 옴을 알 수 있습니다.
▣ 국역 석릉세적 (1996)
하당공 휘첨 유묵 : 근역서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 )의 기록과 필적
[癸甲日錄]에 의하면
선조16년 (1583) 교리 휘瞻이 庶 ?의 허통문제에 있어 이율곡을 탄핵하려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지례현감으로 특지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유학 신 ?(신립의 형)이 김응남, 우성전, 홍흔, 김첨, 김수 등이 조정에서 너무 권세를 부린다고 상소한 기록도 전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槿域書彙]에
휘瞻과 휘 의 필적이 전하고 있으며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첨(金瞻){2}
1542(중종 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 아버지는 전한 홍도(弘度)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9년 사가독서하였다.
그해에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이이(李珥)가 올린 상소에 대해 옳지 않다고 탄핵하였으며, 1581년 이조좌랑으로서 박근원을 이조참판에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1582년 교리를 거쳐 고경명(高敬命)대신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재08傷敬差官)으로 나아갔다.
이듬해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뒤 이이를 탄핵하다가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되고, 1584년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與地圖書. 〈朴翼煥〉
⊙ 문과방목
김첨(金瞻) 선조9년 별시에 입격한 김첨(金瞻)의 성명(姓名)
김첨(金瞻) 선조22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성립(金誠立)의 부(父)
김첨(金瞻) 선조23년 증광시에 입격한 이경전(李慶全)의 처부(妻父) ★이산해의 아들
김첨(金瞻) 선조36년 정시에 입격한 이후(李厚)의 외조부(外祖父) ★이산해의 손자, 이경전의 자
김첨(金瞻) 선조38년 증광시에 입격한 이구(李久)의 외조부(外祖父) ★이산해의 손자, 이경전의 자
김첨(金瞻) 인조7년 별시에 입격한 이무(李<무0x60FC>)의 외조부(外祖父) ★이산해의 손자, 이경전의 자
김첨(金瞻) 인조13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진(金振)의 조부(祖父)
김첨(金瞻) More Info.
선조(宣祖)9년(1576년), 별시(別試) 병과9(丙科9)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42년, 임인
자(字) 자첨(子瞻)
호(號) 남강(南崗)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홍도(金弘度)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노(金魯)
증조부(曾祖父) 김희수(金希壽)
외조부(外祖父) 이희철(李希哲)
처부(妻父) 송기수(宋麒壽)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선교랑(宣敎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이조/좌랑&(吏曹/佐郞&)
1987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당시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경리 안동김씨 묘역에서 (서운관정공파 김첨과 그의 가족묘역) 출토된 의복은 충청북도 중요민속자료 제217호로 지정되어 현재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보았습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종 목 중요민속자료 217호
명 칭 안동김씨묘출토의복 (安東金氏墓出土衣服)
분 류 복식
수 량 일괄
지정일 1987.11.23
소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소유자 충북대학교
관리자 충북대학교박물관
부속문화재 명주겹누비직령포 (중요민속자료 217-1)
명주겹솜누비직령포 (중요민속자료 217-2)
명주솜이불 (중요민속자료 217-3)
명주겹삼수저고리 (중요민속자료 217-4)
명주겹삼수회장저고리 (중요민속자료 217-5)
소색명주명정 (중요민속자료 217-6)
무명유삼수삼회장저고리 (중요민속자료 217-7)
소색명주겹치마 (중요민속자료 217-8)
소색무명겹치마 (중요민속자료 217-9)
소색명주솜치마 (중요민속자료 217-10)
무명단속곳 (중요민속자료 217-11)
소색명주목도리 (중요민속자료 217-12)
명주홑보자기 (중요민속자료 217-13)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안동 김씨 묘역을 옮길 때 출토된 의복들이다.
조선의 여류작가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과 15∼16세로 보이는 그의 딸, 김대경의 처인 원주 원씨(元氏)의 유품으로 16세기말에서 17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깃이 사각형모양으로 각이져 있어 직령포라고 부르는 옷을 비롯하여 저고리, 치마, 속옷, 목도리, 보자기, 솜이불 등으로 관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흰색 명주에 솜을 넣어 4㎝ 간격으로 누벼 만든 솜바지와 전형적인 직령포 모습을 하고 있는 명주 겹누비와 명주 솜누비의 직령포 2점은 김첨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로 보이는 15∼16세 정도의 여자 미이라와 함께 ‘안동김씨지구 ’라고 쓰여진 명정이 나왔는데 몸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동정은 흰색인 명주저고리와 앞판에 연두색 비단을 조각조각 이어 붙힌 저고리 2점이 그녀의 것으로 보인다.
원주 원씨(元氏)의 것으로는 앞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소매 끝은 진한 갈색인 안고름과 겉고름이 달려 있는 무명저고리와 안에 솜을 넣고 15㎝ 간격으로 누빈 솜저고리 2점과 치마 3점이 있다.
그 밖에 삼베와 무명으로 만든 속옷, 흰색의 명주 목도리, 갈색의 꽃무늬 보자기가 있고 옷의 형태로 보아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명주 솜저고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시대에 따라 양식이 달라지는 복식사에서 주인과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명 안동김씨묘출토의복(安東金氏墓出土衣服)
이 유물은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부락에 있는 안동김씨묘역을 이장하던중 3개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이다. 안동김씨 족보에 이 묘가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金瞻), 김첨의 딸, 김대경(金大敬)의 처 원주 원씨(元氏)라고 되어있어 이 유물들이 임진왜란전에서 병자호란 직후의 의복임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명주겹누비 직령포, 명주겹솜누비 직령포 등 모두 15점의 의복이 있다.
▣ 충청북도지 下권 (1992)
p2355
마. 安東金氏墓 出土遺衣 11)
*11) 김동욱 "임란,병란 전후 안동김씨 일괄 유의" [출토유의 및 근대복식논고] (충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보고 제20책, 1987, p9-39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217호
- 지정일자 : 1987. 11. 23
- 출토지 :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경리
- 소유자 : 충북대학교 박물관
- 수량 : 일괄 (15점)
(1) 由 來
경기도 광주 경안천이 흘러 들어가는 광주군 초월면 지경리 경수부락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김씨 묘역이 중부고속도로가 통과하게 되자 이 묘역을 옮기던 중 3개 묘에서 의복이 출토되었다.
당시 미이라화된 屍身과 함께 나온 의복들은 묘 이장후 주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일부 수습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도로공사로 밀어 제친 흙더미 속에 묻혀있던 것을 다시 찾아낸 것이어서 의복 가운데 일부 원형이 손상된 것도 있다.
이 안동김씨 묘역의 묘주가 되는 荷堂公 金瞻(하당공 김첨, 1541-1584년)은 문과 출신으로 현감을 지낸 인물이고, 그의 曾祖가 되는 希壽, 祖 魯와 부친인 弘度도 모두 문과 출신으로 명문집안이다.
그리고 김첨의 아들이 허난설헌의 남편인 金誠立(1562-1592년)이며, 김성립의 아들이 아우 正立의 아들로 出系한 振, 손자가 金大敬(1632-1695년)이다.
출토된 의복들은 金瞻 묘에서 3점, 김첨의 딸이며 誠立,正立의 누이동생인 묘에서 3점, 金大敬의 배위인 원주원씨 묘에서 9점 등 모두 15점이다.
그런데 이들의 졸년이 1584-1695년 사이에 이르고 있어서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하여 병자호란(1636년) 후의 시기까지, 즉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의 의복들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미이라화된 屍身과 함께 나온 의복은 그 시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의복사 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나마 인식한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총회장 金學永씨가 木棺과 함께 衣服 일괄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2) 內 容
안동김씨 묘역의 3개 묘에서 출토된 의복들의 내용은 <표7>과 같다.
<표7> 안동김씨묘 출토유물 12)
*12) 문화재관리국, [지정문화재목록] (1991) p271-272
0 김첨 의복 3점
- 명주 겹누비 직령포 1
- 명주 겹솜누비 직령포 1
- 명주 솜이불 1
0 김첨의 딸 의복 3점
- 명주 겹삼수 저고리 1
- 명주 겹삼수 회장 저고리 1
- 소색 명주 명정 1
0 원주원씨 의복 9점
- 무명 유삼수 삼회장 저고리 1
- 소색 명주 겹치마 1
- 소색 무명 겹치마 1
- 소색 명주 솜치마 1
- 무명 단속곳 2
- 소색 명주 목도리 2
- 명주 홑 보자기 1
이들 의복들은 평상시에 입었던 평상복, 즉 便服을 그대로 壽衣로 쓴 것들이며, 각각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金瞻의 의복
김첨은 임란 8년전인 1584년에 졸하였으므로, 그의 의복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요민속자료 제117호 (전박 장군묘 출토의복), 제118호 (김위묘 출토의복) 들과 거의 같은 시기의 의복으로 비교된다.
이 당시에는 천릭, 도포, 직령포, 창의가 같이 존재하는 시기로서 그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명주 겹 솜누비 직령포는 깃과 삼각부에 花紋緞을 사용하고, 소색 명주에 갈색 끝동을 달고 삼수를 배합하여 1.2cm의 잔누비로 처리한 누비 창의로서, 깃은 목판 깃이고 동정은 소색을 달았다. 삼수에 끝동과 안동이 있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나) 金瞻의 딸 의복
당초에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출토되었다. 나이는 15-16세 정도로 추정되는데, 머리를 땋고 있었고 명정에 安東金氏之柩로 쓰여 있었으며, 또 옷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묘년의 여인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 묘에서 나온 의복 가운데 명주겹 삼수저고리는 소매에 넓은 삼수를 달고, 깃도 갈색으로 비슷한 깃을 하였으며, 동정이 있고 옆에 단 무와 앞자락에 갈색의 무가 달려 있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더욱이 이 저고리는 순천김씨의 저고리에서 김덕원 家의 저고리를 이어주는 교량으로서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아울러 소매끝의 삼수가 8.0cm, 12.5cm의 색동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당시의 유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金大敬 처 원주원씨 의복
이 의복들은 병자호란 뒤의 것으로 추정된다.
저고리의 삼수와 끝동은 진한 갈색 무명이고 소매와 길은 연두 무명이며, 깃은 갈색 무명의 당코깃으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치마는 布幅이 39cm의 명주로 9폭으로 되어 있는데, 잔주름이 2cm 간격으로 잡혀있는 것이 2점, 8폭치마가 1점 있다.
대체적으로 안동김씨의 저고리나 원주원씨의 저고리의 아래 단에 회장이 달려 있다는 것은 저고리의 변화를 주기 위한 한복 고유의 미적 슬기의 표현이며, 이와 같은 액센트를 넣음으로써 평판적인 저고리가 돋보인다는 역사적 원류를 알 수 있겠다.
아울러 의복 가운데 오늘날과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은 치마의 제도이며, 단속곳 등 기타의 제도에 있어서도 오늘날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 대종회보 제73호 (2001년 7월)
선세유적 탐방
지난 4월 29일 서운관정공파에서는 종친의 화목을 다지기 위하여 충청남도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선세유적 탐방을 떠났다.
서울에서 8시에 출발하여 첫 번 도착지가 중부고속도로 중부휴게소에 머물렀다. 이곳 휴게소에는 충북지역 문화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여기에 서운관정공 휘綏(수)의 6대손 휘弘度의 장남 瞻(첨) 호荷堂(하당)의 묘에서 출토된 壽衣(유의)가 전시된 것인데
1985년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묘를 이전케 되어 이장할 때 발굴된 것으로 출토된 유물은 직령포 저고리, 치마, 속옷, 명주 목도리 銘旌(명정) 이불 보자기 등 총 15점이라 한다. 이 유물들은 김첨의 유의와 김첨의 딸 것으로 추정되는 유의 또 金大敬의 처 원주원씨의 유의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 유물의 원형은 중요민속자료 제217호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원형을 복원하여 명주 겸누비 직령포(納衣直領袍)가 전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들려 정간공 휘永煦(영후)의 영단을 참배하고
다음으로 청주목사겸 청주축성차사원을 지낸 휘淑演(숙연)공의 묘소가 있는 충남 청양군 목면 대평리 철산 부락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시간관계로 수덕사에 점심을 준비하였기로 바로 수덕사 입구 주차과장 식당에서 늦은 시간 점심을 들고 귀경길에 올라 삽교호에 들려 회 안주로 술 한잔씩 나누고 여흥을 즐기며 화기애애한 선세유적 순례행사를 마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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