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루 창건자명 정정 요청 자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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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09 17:13 조회1,849회 댓글0건본문
3. 창건자가 김영돈(金永暾)임을 밝히는 자료
충숙왕 8년 지합주사로 재직했던 자가 함벽루를 창건했음은 상기의 자료들과 안진의 <함벽루기>등에서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창건자명을 밝히는 다음 작업은 바로 당시(1321년. 충숙왕 8)에 지합주사로 재직했던 자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 이름이 바로 김영돈(金永暾)이다. 이에 대한 기록 자료는 다음과 같다.
가. <문영공 김순(文英公 金恂) 묘지명>에서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안동인. 충렬공 김방경의 3子) 묘지명에 문영공(文英公)의 장남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이 충숙왕 8년(1321년)에 지합주사(知陜州事)였음이 확인되었다.
1)김순 묘지명(金恂墓誌銘)에 대하여
출전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기록내용
1)시대 : 고려. 2)연대 : 1321년(충숙왕8년). 3)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4)문화재지정 : 미지정 5)크기 : 미상 6)출토지 :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6)소재지 :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7)서체 : 해서(楷書) 8)찬자/서자/각자 :민지(閔漬) / 미상 / 미상
이 묘지명은 1942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계면(臨溪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지명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서울, 1979)와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간. 김용선. pp725~731)에 수록되어 있다. 묘지명은 1321년(충숙왕 8) 민지(閔漬)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김순(金恂 : 1258~1321)의 자는 귀후(歸厚)이며,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증조는 민성(敏成), 조부는 효인(孝印), 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어머니 박씨는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김순은 1279년(충렬왕 5)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한 1295년(충렬왕 21)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는 등 충렬왕 때 관인으로서 활약하였다.
김순은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영돈(永暾), 차남은 영휘(永暉), 3남은 사순(思順), 4남은 영후(永煦)이다. 장녀는 정지(鄭漬)에게, 2녀는 백이정(白?正)에게, 3녀는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인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각각 시집갔다.
2) 묘지명 원문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간. 김용선. pp725~731)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 墓誌銘 (幷序)
古所謂君子者德行云乎哉功業云乎哉予曰惟德行耳非功業也何也德行在心功業 在時在心者人所修也
<중략>
退翌年八月先公棄世依遣囑葬于桑梓庚戌冬行祭于先公墓壬子起爲重大匡上洛君承襲先公之茅土己未又拜先公墓上命季子永煦奉使以陪行所以重其行也至治元年辛酉命相以賢擢公爲判三司事八月加寶文閣大提學上護軍至是月二十一日寢疾卒于第享年六十四公性敦厚直柔內實剛毅孝悌忠信出於天眞惜乎以公之才德若延數載則利澤豈不及於蒼生名位豈止如是而已哉娶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謚文敬公諱許珙之女生四男三女曰永暾今爲都官直郞知陜州事曰永暉今爲興威衛保勝別將曰思順剃度爲慈恩宗大德曰永煦爲司憲持平女一嫡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鄭?二嫡大匡上黨君白?正三嫡舍人別里哥不花大元左承相阿忽反之子也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銘曰
<중략>
大元至治元年辛酉十月十四日
宣授朝列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大提學
監春秋?事 驪興君 閔漬 撰
3) 묘지명 역문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전게서. pp725~731)
중대광 판삼사 보문대제학 상호군 김순 묘지
옛적에 이르기를 君子라고 하는 것은 德行을 두고 말한 것이냐? 功業을 두고 말한 것이냐? 하면 오직 덕행이요 공업은 아니다.
왜냐하면 덕행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공업은 때(時機)에 있는 것이니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이요
<중략>
그 이듬해 8월에 선친(=휘방경)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遺願(유원)에 의하여 고향 선영에 장례를 모셨다.
庚戌(경술)년 겨울에 선친(=휘방경) 산소에 제사를 지내고 壬子(임자)년에 다시 중대광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휘방경)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 받았다.
己未(기미)년에 또 선친(=휘방경) 산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季子(계자 =막내아들) 永煦를 시켜 모시고 배행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다.
至治원년 (1321) 辛酉에 어진 정승을 기용하기 위하여 공을 발탁하여 판삼사사를 삼고 8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 상호軍을 명하였다. 그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敦厚(돈후)하고 剛直(강직)하고 內柔(내유)하시며 孝悌와 忠信은 천하에 출중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才德으로 만일 몇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만민에 미치지 않았으며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서 그칠뿐이랴?
配는 광정대부 첨의충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 휘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永暾(영돈)은 현재(*1321) 도관직랑 지합주사로 있고 2남 永暉(영휘)는 현재 흥위위 보승별장으로 있고 3남 斯順(사순)은 삭발하고 중이 되어 慈惠宗 大德이 되었고 4남 永煦(영후)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 鄭(마음심+)責(정책)에게로 출가하고 2녀는 대광 상당군 白 正(백이정)에게로 출가하고 3녀는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에게로 출가하였다.
영돈의 문중에서 이미 장지를 德水縣 馬山 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민지閔漬)는 그(=휘영돈)의 선친(=휘순)의 친구인지라 공의 行狀을 가지고 와서 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을 쓰노라.
<중략>
대원 至元 원년 辛酉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 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 閔漬 지음(撰)
나. <문숙공 김영돈(文肅公 金永暾) 묘지명(墓誌銘)>에서
<문숙공 김영돈(文肅公 金永暾) 묘지명(墓誌銘)>에 1321년 합주지사로 재직했던 자는 김영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김영돈 묘지명 대하여
출전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묘지명 찬자는 안진(安震)이며, 1348년(충목왕 4)에 작성되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영돈(金永暾 : 1285~1348)은 자는 휘곡(暉谷)이며, 안동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방경(金方慶), 어머니는 양천(陽川) 허씨(許氏)로 공(珙)의 딸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사』에는 김영돈(金永旽)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영돈은 1305년(충렬왕 31)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1340년(충혜왕 1)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이공수(李公遂) 등 12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충목왕때 좌정승(左政丞)으로 정치도감을 중심으로 한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가,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다.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오원경(吳元敬)에게, 둘째 딸은 윤식(尹湜)에게 각각 시집갔다. 아들 신(縝)은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1)시대 : 고려 2)연대 : 1348년(충목왕4년) 3)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4)문화재지정 : 미지정 5)크기 : 미상 6)출토지 : 미상
7)소재지 : (한국)-현존하지 않음 8)서체 : 미상
9)찬자/서자/각자 : 안진(安震) / 미상 / 미상
2)묘지명 원문
*출전 :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1980)
有高麗國推忠秉義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府院君金公墓誌銘(幷序)
公諱永暾字暉谷其先出自新羅王金傅□□□□□□□□王中世以婚姻故徙居安東都護府其府今福州牧也至十三代孫判都僉議司事□□□□諱方慶會上國東征日本□□□助官軍水戰有功天子授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推忠靖難定遠功臣□□□□□季諱恂位至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洛君是爲公考公幼持氣節其學□□□□□□□大德乙巳等第自福源宮□□□□爲嘉順府丞延祐丙辰從忠肅王朝京師請爲嘉禮及尙公主冊公一等功臣賜田民祿券再遷掖庭內謁者監出知陜州事□□威惠邑居載寧民至今歌其德秩滿除?府散郞徙民部尋復?府爲直郞遷
<중략>
至正八年八月 日」
勅授將仕郞匡靖大夫檢校僉(?)議?理藝文?大提學知春秋?事安山君 安震 撰
3) 묘지명 역문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929 265.
원 고려국(有元 高麗國1>)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왕(王)이 중세에 혼인하였기 때문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부(府)는 지금의 복주목(福州牧)이다. 13대손인 판도첨의사사 □□□□ 방경(方慶3>)이 상국(上國, 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 관군을 도와 수전(水戰)에 공이 있었으므로, 천자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을 제수하였다. □□□□□ 막내인 순(恂4>)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도가 있었고, 그 학문은 □□□□□□□ 하였다. 대덕(大德5>) 을사면(충렬31, 1305)에 과거에 급제하여6> 복원궁(福源宮)□□□□을 거쳐 가순부승이 되었다. 연우(延祐7>) 병진년(충숙3, 1316)에는 충숙왕을 수행하여 원의 서울에 들어가서 가례(嘉禮)를 청하여 공주(삼수변+僕國長公主)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은 일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토지와 노비와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다시 액정내알자감으로 옮기고, 지합주사로 나갔는데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임기가 차자 언부산랑에 제수되었다가 민부로 옮기고, 얼마 뒤 다시 언부직랑이 되었다.
<중략>
지정(至正) 8년 (충목4, 1348) 8월 일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출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간본 아정유고>(*이덕무 저-李德懋:1741∼1793.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제3권 기(記) 중 <가야산기>(伽倻山記)
<전략>
『서쪽으로 몇 리쯤 가니 석벽(石壁)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정자 하나가 나는 듯 남강(南江)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름은 함벽루(涵碧樓)이다. 고려의 안진(安震)이 기문을 지었는데,
"진주(晉州)의 장원정(壯元亭)과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가 이 함벽루와 같이 아름답다."
하였다. 안진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람이다. 대개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낙성하였으며 이 누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 아조에 와서 군수 유윤(柳綸)이 중수하고 강희맹(姜希孟)이 기문을 지었으며 숙종(肅宗) 신유년(1681)에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수하고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문정은 송시열(宋時烈)의 시호)이 기문을 지었다. 북쪽 바위에는 우암이 쓴 '함벽루(涵碧樓)'를 새겨 놓았으며, 누의 오른편 조금 북쪽에 주지승(住持僧)이 살고 있다』
<하략>
*편집자 주
상기 인용문에서 <상락군(上洛君)은 문영공 김순(金恂)을 말하고, 맏아들 김후(金侯)는 장남 김영돈(金永暾)>임을 말하고 있다. --안동김씨 홈페이지(andongkim.net) <역사적 인물>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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