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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진각국사비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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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6-11 13:59 조회1,436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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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년 최자 짓고, 탁연 썼다는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후면 음기을 보면 충렬공의 후원자였던 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과 그의 형제들(최종재, 최종보), 10년후 고려사직의 양대 기둥으로 충렬공과 절친했던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그리고 충렬공의 아버지 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의 휘자가 보입니다.


충렬공행장(1300, 이진 찬)에 의하면 충렬공께서는 1250년경 유섭장군(諭攝將軍)겸 급사중어사중승(給事中御史中丞)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렬공께서는 당시의 국교였던 불교에도 심취하셔서 보제사에다 500나한당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기도 하였고, 만년에 동안거사 이승휴와 주고받은 서신에 보면 진각국사 혜심의 스승이었던 보조국사 지눌의 저술인 <목우자사기>를 충렬공께서 평소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각국사비 음기 부분중 아래 열거한 마멸된 이름자 부분이 ‘金方慶’ 일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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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將軍)      □□□

장군(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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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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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중승(御史中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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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진각국사비(月南寺址眞覺國師碑)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 터에 있는 고려 후기의 고승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 1178(명종 8년)~1234(고종 21년)]의 비.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35년(고종 22)에 세웠다. 비는 현재 원 자리에 남아 있는데 귀부 위에 절단된 비신이 있고 마모 상태가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비문은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국사가 향공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보조국사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사주가 되어 강종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진각국사는 입적하자 입적처인 월등사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거두어 본산인 송광사에 돌아가 광원암에 탑을 세웠다 하였는데 실제로 비는 월남사에 있다. 음기는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는데, 내용은 음기 건립 사실과 승려와 재가 문도들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문도에 대선사, 승통, 선사, 수좌, 삼중대사 이하로 이어져 이때부터 선사의 문도에 교종 승계를 지닌 승려가 등장하는 자료가 된다. 또한 재가신도들은 당시 왕족과 재추 등 고위관료가 대거 등장하여 이를 분석하여 수선사와 고려 정계와의 관계를 밝힌 연구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시대   고려

연대   1235년(고종22년)

유형/재질   탑명·등명 / 돌 

문화재지정   보물 - 313호 

크기   세로 115.1cm, 가로 63.6cm, 글자크기 2.1cm

출토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13 월남사지 

소재지   (한국)-월남사지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13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규보(李奎報) / 김효인(金孝印) / 미상 



(陰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최자(崔滋)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수선사(修禪社) 도인(道人) 신(臣) 탁연(卓然)이 교칙(敎勅)에 의(依)하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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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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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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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

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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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사(右僕射)    최종재(崔宗梓)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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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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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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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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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將軍)      □□□

장군(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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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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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중승(御史中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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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장(郎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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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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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 김방경행장 (1300, 이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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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문하시중 최 종준(門下侍中 崔 宗竣)이 공의 충직(忠直)함을 사랑해서 모든 일을 예(禮)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알리니 이때부터 그 명예(名譽)가 세상에 뛰어났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서북면병마록사(西北面兵馬錄事)가 되고 내직(內職)으로 들어 와서는 별장(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낭장감찰어사(郎將監察御史)로 전임하여 우창(右倉)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請託)도 듣지 않으니 ---


정미(丁未)년(서기1247년)에 공(公)은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승진되었다.  그때에 몽고병(蒙古兵)이 침공(侵攻)해 들어오니 공(公)은 여러 성주(城主)에게 명령하여 "위도(韋島=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保全)하라"고 하였다.  ---


이내 벼슬이 견룡행수(牽龍行首)를 대수(代授)하자 이 때에 금위관료(禁衛官僚)들이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에만 아부(阿附)하고 내직(內職)은 게을리하니 공(公)이 이르기를 ---이어서 금중(禁中)으로 천직(遷職)되어 유섭장군(諭攝將軍)겸 급사중어사중승(給事中御史中丞)으로 지명(指命)되어 대각(臺閣)에 출입하니 그 위풍과 곧은 절개가 조야(朝野)에 용동(聳動하였다. 



댓글목록

김재이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재이
작성일

  저는 그곳에 살면서도 그렇게 깊이 들어가서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진각국사 비문 해독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김효인란에 올리겠습니다.

김보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보영
작성일

  주회씨의 글을보다가 마침 제 주장과 다른점이 있어 혹시 공감대를 찾을수 있을까 싶어 올립니다.행장번역문중"유섭장군"이란 용어는"섭장군"으로 풀이해야 옳다는것이 제주장입니다.설명은대구종보에올렸던 "충렬공 연보소고"를 항용 선생께 보내드렸으니 참고바랍니다.

솔내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영환
작성일

  제 의견도 [섭장군]이라야 맞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