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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사 김영수의 오류자료 정정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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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06-11 14:15 조회2,209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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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사 김영수의 오류자료 정정요청

수신: 제주문화원장
발신: 김태영(金泰榮)
참조: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제목: 인명사전 오탈자 정정요청

안녕 하십니까?
제주문화 창달을 위해 애쓰시는 원장님을 비롯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귀 문화원의 일익번창을 기원합니다.
저는 조선 정조때 제주목사를 역임하신 김영수의 후손입니다.
문중의 역사공부를 하다보니. 김영수목사님의 자료가 오탈자로 남겨져 있는 제주문화원 발행 인명사전 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인명사전(제주문화원발행)을 기초로 발간된 책자들이 있어 앞으로도 계속 오자로 남겨질 것이 염려됩니다. ‘수(綬)’를 ‘수(綏)’로 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완(緩)’으로도 읽혀지고 있습니다.  살펴보아 주시길 앙망 하옵니다.
혹여 결례가 있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정정요청내용: 김영수(金永綏)김영수(金永綬)
?  ~ 1715(숙종41)을  1716(숙종42) ~ 1786(정조10)으로

첨부(근거)서류:  족보(파보)사본           1부
                        탐라지원본사본          1부 
                        여수읍지원본사본       1부
                        통제영지 사본            1부

오류자료: 진남관 도록  (문화재청 발행) 정정요청중.
                       방선문                  출판사 각
                       제주역사이야기      한겨레신문
                       제주인명사전         제주문화원
                       국가지식서비스      야후
2005년 6월 08일

김태영(金泰榮): 53세 011-410-3466
e-mail: kty0752@naver.com
 

1. 답신(제주문화원에서 정정히여 보내준 인명사전의 내용)

김영수 金永綬  1716(숙종 42) ~ 1786(정조 10)
  조선조의 무신. 정조 때의 제주목사. 본관 안동(安東). 김홍석(金弘錫)의 아들. 처음 이름은 영적(永績)이고 자는 중약(仲若)이다. 1744년(영조 20)에 무과에 급제, 1778년(정조 2) 함경도 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로 재임 중 동년 12월, 황최언(黃最彦)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81년 2월에 떠났다. 당시의 제주판관은 경내운(慶來運)과 황인채(黃麟采)이고 정의현감은 허견(許堅), 송중현(宋重鉉)이며 또 대정현감은 김중옥(金重玉)과 나윤록(羅潤祿) 등이다. 목사 김영수가 재임하던 1780년(정조 4) 각 목장에서의 우마(牛馬)가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산장(山場) 경계를 축장, 군마(軍馬)와 민마(民馬)를 양축하는데의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도내의 목장중 상장(上場), 침장(針場), 녹산장(鹿山場)을 통칭, 산장(山場)이라 하니 폭원이 2백리요, 23처에 물이 있다. 이 목장은 광활하여 한라산 정상까지 이르니 우마의 분실이 자주 일어나 우마 점검시에는 삼읍 남정을 징발, 그 폐단이 커서 횡장(橫墻)을 신축하고 문로를 개설하여 방목하고 겨울에는 가두어 폐단을 방지하니 축장의 길이는 1만 1천여보요, 높이가 4척이었다. 또 이 해(1780)에 주성에 두 문을 구축하였다. 실은 늘 큰 비가 내리면 산저천(山底川)이 범람, 인가가 표몰하므로 옛 성지(城址)를 따라 간성(間城)을 구축하여 폐해를 방지, 간성의 길이는 551보(步)요, 높이가 9척이었다. 또 두 개의 성문을 세웠으니 남쪽은 소민문(蘇民門)이라 하고 북쪽은 수복문(受福門)이라 하였다. 또 광제교(光濟橋)를 가설하고 간월천(看月川 - 벼릿내 또는 별도천)에 보(堡)를 쌓아 수해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동문 밖에 있는 운주당(運籌堂)과 연무정(演武亭 - 현 濟東校)을 중수, 본디 이 정(亭)은 인조 때 신경호(申景琥) 목사가 창건한 것인데 숙종 20년에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동문밖에 이설한 것으로 무사들의 습사처(習士處)였다. 남성문(南城門)에 있는 정원루(定遠樓)를 중수하고 또 남성문 서쪽에 있는 청풍대(淸風坮)를 노장대(老將坮)라고 제명(題名)하였다. 이 해에 본주 어도촌(於道村) 강위보(姜渭輔)의 처 오씨에게 열녀를 정표하는 등 목민관으로서 청렴공정하고 위엄이 있어 도민으로부터 그 덕을 추앙받았다. 관덕정안 창방보와 보 사이에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이란 대자(大字)는 그가 65세시에 쓴 글씨이다. 목사의 친필인「환선대(喚仙臺)」라는 글씨와 그 옆에 절구(絶句) 한 수를 초서로 써 넣은 마애명(磨崖銘)이 현재 방선문 안쪽 바위에 남아 있다. 1785년(정조 9) 7월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동년 11월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재임 중 1786년 7월 1일 통영(統營) 임소(任所)에서 순직하였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1779년 6월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된 노성중(盧聖中)을 대정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781년(정조 5) 3월 제주 전 목사 김영수의 장계에 산마감목관이 신․구 교체될 때 마필(馬匹)이 결축(缺縮)된다고 하니, 전 감목관 김광혁(金光爀)을 본주(本州)로 하여금 엄히 곤장으로 징계하고, 전하지 못한 마필은 수에 따라 대징(代徵)하게 하였다. 또 제주의 전 목사 김영수를 서용하고, 아마(兒馬) 한 필을 내려주라 하였다. 같은 해 6월 전라감사 박우원(朴祐源)의 밀계(密啓)에 전 제주목사 김영수가 재임할 때 역적의 처를 보호하여 임의로 타인과 교통하게 하고, 흉얼(凶孼)을 마음대로 행상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일로 김영수를 체포해서 심문하고, 전라도 금갑도(金甲島)로 유배하였다. 1782년 2월 제주 전 판관 황인채를 유배시켰다. 이에 앞서 황인채는 읍인(邑人) 강성(姜城)의 죄를 목사 김영수에게 보고하니, 김영수가 곤장을 만들어 황인채와 회좌(會坐)하여 이를 장살하였다. 어사 박천형(朴天衡)이 남살(濫殺)을 아뢰니 김영수의 형 집행을 기다리게 하고, 곧 법에 의하여 처단하라. 김영수가 인명을 남살한 죄와 여구주(呂龜周)를 몰래 극형으로 탈바꿈한 자취를 차례대로 아뢰라하였다.
o 황인채(黃麟采) 박천형(朴天衡) 항목을 보라.
 문헌: 先生案, 觀風案, 官案, 耽羅紀年, 濟州實錄, 增補耽羅誌, 王朝實錄, 濟州島磨崖銘(1999), 濟州道動産文化財.

2. 오류내용이 실린책자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제주역사기행 이라는 책에 실려있는 내용임.
제주 역사 기행
이영권 지음  한겨레신문사
6제주섬에 온 사람들
... 서울 사수 포기의 책임이 그에게 덮어씌워졌던 것이다. 건물 안의 '탐라형승(耽羅形勝)' 글씨는 정조 때의 목사 김영수(金永綬)의 것이다. 그의 글씨는 방선문 안쪽에도 남아 있다. 활달한 초서체로 쓴 '환선대(喚仙臺)'가 그것이다. 나중에 방선문에서 꼭...-이하생략-
목사 김영수에 대한 년대오기

<내용>
용연(龍淵)
口이름 어찌 옛스러운가 구룡연에서 움직임을 살핀다
하늘에 있으면서 나타나 보이기도 하고 잠들기도 하며
하늘에 있기도 하고 밭에 있기도 한다
나아가고 물러감이 법도에 맞으면
口口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한다
이치는 밝아 어두움이 없으니 물체와 口이 모두 그러한것
한가롭게 견여를 타고가면 사람자취 없는곳
바다밖 천년의 나라에 용은 구룡연에 잠겼네
옛날부터 이름을 듣고 찾아올 뜻이 있었는데
지금에 온 일이 어찌 인연이 아닌가
...해는 서쪽으로 지네
목사 김영수(金永綬,? ~ 1716년) 경자춘 (1716년봄) (庚子春은 1780년임)에 지어 석공으로 하여금 새겨넣게 하였다.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에 있는 마애명을 탁본한 것임.
<참고문헌>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마애명특별전(1989년).
< 정보제공처 > 국립중앙박물관
< 기타설명 > 국적 : 한국(韓國) / 지정구분 : 0 / 문양/장식 : / 명문구분 : / 재질 : 지(紙) , () , / 용도 : 문화예술(文化藝術) , 서화(書畵) , 탁본(拓本) , () ,
<카테고리> 한국(韓國)+조선(朝鮮)++0++++++++++++지(紙)+()+++++++++문화예술(文化藝術)+서화(書畵)+탁본(拓本)+()+++++++++공립(公立)+제주민자(제주민자)+고고민속(고고민속)+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기타(其他)
< 소장처 > 소장처 : 공립(公立) , 제주민자(제주민자) , 고고민속(고고민속) ,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 기타(其他)
< 시대 > 시대 : 조선(朝鮮)

3. 문화재청발행 책자의 오자정정요구
도록제목: 진남관(실측조사 보고서(本文)
82p  4. 문헌속의 연혁
83p 
1773 절도사 김영완(金永緩)을     김영수(金永綬)로     
      1774 절도사 김영완(金永緩)을     김영수(金永綬)로  
위 83p 내용을 위 와같이 정정하여 주실 것을 요청하오니 검토하여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920 (우편번호)302-701
정부대전청사1동 문화재청 건조물과
지문근. 전문숙 (042)481-4876

4. 방선문
방선문 38p 오언절구 사진해설 김치(1777 ~ 1825)를 (1577 ~ 1625)로 정정요청

5.김영수(金永綬)의 오언율시(五言律詩)
환선대(喚仙臺)
萬壑乾坤大 / 깊은 골짜기는 천지의 위대함이요
石門日月閑 / 견고한 돌문은 해와 달의 한가로움이라
曾云無特地 / 일찍이 일컫기를 배필 없던 삼신인의 땅
其箇有神山 / 그것은 바로 신령스런 산이 있음이라
花老已春冬 / 꽃 시들어 봄은 어느새 겨울로 바뀌어도
岩賞太古歡 / 바위는 여전히 태고의 기쁨 지닌채 있다네
戞然鳴發意 / 알연한 학 울음소리 품은뜻 잘 울려주니
知是在仙間 / 이런 이치 깨달음 선계의 경지 들어섰음이라
己亥 春 金永綬 / 기해년 봄 김영수

역해(譯解)
환선대(喚仙臺): 신선을 부르는 대
작자인 김영수는 방선문(訪仙門) 남단 동편의 편편한 바위를 일컬어 ‘환선대’라 불렀다.
이곳에 남아있는 대부분 제영(題詠)의 소재란 주로 ‘석문’(石門), ‘백운’(白雲), ‘암화’(巖花)등이다. 그러면서도 신선을 만나기 위해 찾아 왔지만 신선을 만날수 없다.
[仙人難可見 仙人不可見]는 식의 시상(詩想)이 전개되곤한다. 한마디로 시각적이다.
이에 비해 김영수의 ‘환선대’는 학의 울음소리까지 내세우며 청각적인 감각까지 차용함으로써 신비한 신선의 세계로 빠져드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환선대(喚仙臺)란 제액의 큰 글씨와 옆의 오언율시의 서체를 보면 초서체의 활달한 붓놀림이 마치 신선의 정기를 풍기게 할정도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느낌을 선사한다. 방선문의 모든 제영(題詠)이 공통적으로 오언절구(五言絶句)인데 비해 오직 김영수의 이 시만 ‘오언율시’(五言律詩)로 되어있다.
만학(萬壑): 첩첩이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
건곤(乾坤): 하늘과 땅 천지(天地) 음양(陰陽)
증운(曾云): 일찍이 일컫다.
알연(戞然): 금석(金石)이 부딪치어 나는 소리. 혹은 학의 울음소리의 형용
지시(知是): 이치를 깨달음.
김영수(金永綬)는 정조2년(1778) 2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했고 3년 뒤인 정조5년(1781)3월에 이임 하였다. 목사로 재임시 운주당(運籌堂)과 연무정(演武亭)을 중수(重修)하였으며 산지천 서안으로 간성(間城)을 쌓기도 했다.

김영수(金永綬)  1716(숙종 42) ~ 1786(정조10) 安東人이며 초휘는 영적(永績), 字는 중약(仲若)이다. 갑자무과(甲子武科)와 병인중시(丙寅重試)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랐다. 흥해군수(지금의 포항)와 전라우,좌수사를 거쳐 함경도병사, 제주목사 겸 방어사, 홍충도 병사를 역임하고 통제사에 부임하여 통영임소에서 순직 하였다. 통영의 세병관에 타루비와 사적비가 있고 흥해군(포항)에도 선정비가 있으며 후에 청덕사에 배향되었다. 필력이 뛰어나 관덕정과 방선문등에 활달한 필적이 남겨져 있으며 제주영성. 여수의 호좌수영성. 통영의 통제영성. 청주성. 포항의 흥해보등 공사 업적을 남겼다. 사후에 두차례에 걸쳐 청백리에 천거되었으나 녹선되지 않았다. 조부는 청백리 탁청헌(濯淸軒) 두남(斗南)이며 아버지는 의영고직장을 지낸 홍석(弘錫)이다.
靑白吏에 薦擧
고 통제사 김영수(金永綬)【우참찬 이치중(李致中)이 추천하였다.】
고 통제사 김영수(金永綬)【호군 이한풍(李漢豊)이 천거하였다.】
1771(영조47) 4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全羅右道水軍節度使)
1773(영조49)     전라좌도수군절도사 (全羅左道水軍節度使)
1778(정조2) 1월 함경도 병마절도사 (咸慶道 兵馬節度使)
1778(정조2) 11월 제주목사 (濟州牧使)~1781(정조5) 3월이임
1785(정조9) 7월 충청도 병마절도사 (忠淸道 兵馬節度使)
1785(정조9)11월삼도수군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
1786(丙午) 7월1일 통영(統營) 임소(任所)에서 순직.
父: 홍석(弘錫) 자(字)희백(禧伯) 중직대부(中直大夫)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祖: 두남(斗南) 號 탁청헌(濯淸軒) 丁卯文科 贈 弘文館,藝文館大提學, 淸白吏
配: 함종어씨(咸從魚氏)
配: 간성최씨(杆城崔氏)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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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행동하는 지성...본보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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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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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요
오류를 지적하여 바로잡음은 바로 구슬을 보배로 만듦이겠죠
수고하셨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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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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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고생많으셨습니다.
드디어 우리 문중의 역사가 제 빛을 나타나기 시작하는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솔내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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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늘 열절에 감복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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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