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14 (金應河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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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9 16:27 조회1,997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14 (金應河김응하)
부사공파이신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경의(景義)이며. 1580년(선조13) 3월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 (현 하갈리)에서 고려의 첨의중찬 상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10대손 地四(지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조선시대 무신의 최고 영예인 충무공 (※조선시대 忠武公은 이순신, 김시민, 김응하 등 10명 이내이라고 함) 으로 봉군되신 분으로 무신이면서도 필적을 남겨 2점이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필적 1점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또 1점은 안동김씨 화수록에 있습니다.
참고로 충무공 김응하 장군 영정 1점이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1점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중구 소장> 으로 되어 있는데 조중구 라는 분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근역서화징에 보면
충무공 김응하의 초상화가 너무 오래되어 닳아 없어져서 신묘년(영조41,1771) 봄에 화사 한종유로 하여금 모사하게 하여 중간했다 (중간충렬록) 는 기록이 있습니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응하(金應河)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의(景義). 철원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부터 그의 장재(將才)를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천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海東名臣傳, 密庵集. 〈李貞一〉
*김응하 영정 <조중구 소장>
*김응하 조정비
*김응하 필적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 金厚臣(김후신)
호는 이재. 벼슬은 찰방
충무공 김응하가
<적을 만나 군진을 해산하는 그림>과
<나무에 의지하여 적을 쏘는 그림>과
<죽은 뒤에 칼을 들고 선 모습>과
<두 장수가 항복하는 그림>은
전 찰방 김후신이 그린 것이다 (중간충렬록)
⊙ 韓宗裕(한종유)
본관은 신평. 교수 한후량의 증손. 화원으로 벼슬은 감목관
충무공 김응하의 초상화가 너무 오래되어 닳아 없어져서 신묘년(영조41,1771) 봄에 화사 한종유로 하여금 모사하게 하여 중간했다 (중간충렬록)
▣ 철원군지
김응하
1) 사냥을 좋아한 소년
김응하의 본은 안동, 자는 景羲(경희)이며, 1580년(선조13) 3월 철원군 어운면 갈운동 (현 하갈리)에서 고려의 첨의중찬 상장군 충렬공 김방경의 10대손 地四(지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소년 응하는 숙성하여 어른스러웠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사냥한 새나 짐승으로 부모님께 반찬거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응하의 나이 14세 때에 임진왜란중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지성껏 묘자리를 구하여 장군 두 사람이 난다는 명당을 얻어 안장하였다.
응하는 아우 應海(응해)와 함께 사냥하러 다니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새 사냥을 나갔다가 범을 만나 고두리살로 범의 정수리를 쏘았는데 화살이 정수리를 뚫고 臟腑(장부)까지 관통했다. 급소를 맞은 범은 꼼짝없이 앉은 채로 죽고 말았다.
그는 기운이 세어 단검 하나로 산돼지를 잡아았고, 짐실은 말을 도랑에서 올리기도 하였으며, 18세 때는 덕령산에서 주먹으로 범을 때려잡은 일도 있어서 김장군이라 별호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2) 무과급제
청년 응하는 팔척장신에 몸집도 우람했으며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한번에 황소다리 하나를 다 먹어 치웠으며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두세말 술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곤 했지만 정신을 잃거나 쓰러지는 일이 없었다.
한때는 야생마를 얻어 길들인 일도 있고, 均田使 밑에 量田監으로 일하면서 농민들 편에 서서 정의로운 선행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24세때 여름, 강원도 관찰사 박승종이 관내 순시차 철원에 왔을 때 무술대회를 열었는데, 응하는 뛰어나 문예로 박 관찰사의 눈에 들었고 병서을 공부하여 과거를 응시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그는 한탄강 상류의 경승지 칠만암을 중심으로 심신의 수련을 계속하여 병서를 열심히 읽고 깨우쳤다.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내 함경도 경성에 변경수비의 임무를 맡고 부임, 삭막한 국경지대에서의 처음 겪는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투철한 책임감으로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던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응하는 군관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선조의 국상중이어서 관리들의 주색 풍류를 금하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청년 응하는 절제하며 근신하는 생활을 잘 하였으므로 박승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3) 서민적인 목민관
응하는 31세때 도체찰사 이항복의 추천으로 정5품 문관인 함경도의 경원부 판관으로 발탁되었다.
후에 중앙관서인 오위도총부의 경력을 거쳐, 동급 문관인 함경도 삼수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삼수군은 갑산부와 함게 압록강 상류에 접하여 있어서 풍속과 습관조차 다를 만큼 교통이 불편하여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깊은 산중인데 삼동의 추위도 대단하며 대부분 주민들의 생활이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다.
김응하 군수는 훗날 청백리가 된 金時讓이란 막역한 친구가 보내준 한지를 솜대신 넣어 지의를 지어 입고 찬 바람을 면하였다.
그후 그는 정3품 무관인 병마우후를 제수받고 함경도 종성에 있는 북병영에 근무하였다. 그때 병마절도사 김경서의 지시를 따라 부성의 동문과 남문의 문루와 망대를 수축하게 되었는데, 사졸들이 힘드는 일을 할 때에는 김응하 우후도 같이 일하면서 밤낮으로 감독하였으므로 그 큰 공사를 한 달 만에 훌륭하게 마쳤다.
39세 되던 1619년 여름 평안도 조방장 겸 선천군수로 가게 되었다. 효성과 우애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여 예를 다하여 대접하였고 재주있는 사람들을 수습하여 그 앞길을 열어주었다. 또 지혜롭고 용맹스런 사람을 불러 신임하니 백성들은 모두 김군수를 존경하였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근엄하고 청렴하였으며 10여년 공직에 머물며 상관에 아첨하거나 부하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백성을 대할 때는 체통을 차리는 일이 없이 늘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4) 구원군 좌영장으로 출정하다
< 생 략 >
5) 조선 원군의 항전
< 생 략 >
6) 深河(심하)에서의 혈전
< 생 략 >
7) 최고의 영예
조정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김장군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그가 전사한 다음달에 병조판서를 추증하였고, 5월에는 旌忠祠(정충사)를 龍灣江(용만강) 가에 짓고 충혼비를 세워 충의의 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忠武公의 시호를 내렸고, 명나라의 신종 황제는 요동백을 추봉하였다.
1620년 조정에서는 김장군에게 다시 영의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처럼 빠른 기간에 전직 군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함은 파격적인 대우요 최고의 영예였다.
1621년 9월에 훈련도감을 시켜 김장군의 사적을 적은 忠烈錄(충렬록)을 출판 간행하였다.
전에는 김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이 네 군데나 있었는데, 고향인 철원에 있는 褒忠祠(포충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2월 8월의 중정일에 철원향교 주관으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 김영환 - 충무공 영정과 유필을 옮겨 싣겠습니다.
▣ 김태서 - 좋은 자료를 많이 올려주시어 감사한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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