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영천 청제비 소개-보물 제 517호 신라의 금석문중 직계조 원성왕 관련 유적 추정<답사보고>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5-06-16 18:15 조회1,617회 댓글1건

본문

P1010001111.jpg 

경부고속도로 영천 I/C내려서 1.5Km 지점에 신라 원성왕(괘릉) 당시 보수한 청못과 그 유래를 적은 비석(보물)을 발견하여 소개 올립니다

P10100100000.jpg 

비각 전면 (1960년대 말 건립)

P10100022222.jpg 

1500년전의 비석이 보인다

P101000333.jpg 

좌측 비석 정면

P10100044444.jpg 

우측비석정면

P1010006666.jpg 

좌측비석 후면

P10100055555.jpg 

우측비석 후면

P10100077777.jpg 

청못 전경  (사진중앙 산밑이 경부고속도로- 대구에서 영천 I/C진입 직전 지점임)

P1010008888.jpg 

수문아래 들판 너머 저 멀리 영천시내가 보인다

 

 

永川菁堤碑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에 있는 신라비.

보물 제517호. 1968년 12월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영천 청못[菁池]의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130㎝, 너비 93.5㎝, 두께 45㎝의 화강암 양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각각 '병진'(丙辰)년의 간지와 '정원(貞元) 14년'의 연호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1688년(숙종 14)에 세운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있다. 병진으로 시작되는 면의 비문은 10행인데, 자경 4~6㎝의 고르지 않은 크기로 각 행마다 9~1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세운 것으로, 비문의 병진년은 536년(법흥왕 23)으로 비정된다. 청제의 축조에는 장상(將上) 3명의 지휘하에 장작인(將作人) 7,000명이 동원되었는데, 25명씩 280방(方)으로 나누어 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정원 14년'으로 시작되는 면의 비문은 청못이 손상되어 중앙으로부터 이를 보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소내사(所內使)가 공사를 일으켜 수치(修治)공사를 완료한 뒤 세운 것이다. 정원 14년을 계산해 798년(원성왕 14)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자경 4.5~5㎝의 글자를 4~16자씩 12행으로 새겼다. 이를 통해 798년 2월 13일부터 4월 13일까지 이루어진 청못수치공사에는 부척(斧尺) 136명, 법공부(法功夫) 1만 4,140명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제중립비는 높이 107㎝, 너비 77㎝, 두께 15㎝의 비석이다. 앞면에는 자경 5.5㎝의 글자를 각 행마다 10~14자씩 총 10행으로 새겼고, 뒷면에는 중립비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이를 통해 1653년(효종 4)에 청제비가 잘려 땅속에 묻힌 것을 다시 세웠으며 당시 청제를 관개하여 수확한 것이 300여 석에 달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shim.gif shim.gif top.gif
     
 

- 시 대 : 고신라
- 재 질 : 화강암
- 크 기 : 청제비 높이114cm, 폭94cm, 두께16cm 중립비 높이101cm, 폭78cm, 두께20cm
- 소재지 : 영천시 도남동 산7-1

경북 영천시 동남쪽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서편에 위치한 청제비(菁堤碑, 보물 제517호)는 1968년 12월에 신라삼산학술조사단(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진 것으로 신라시대에 청제(菁堤)라는 저수지(貯水池)를 축조(築造) 및 수치(修治)하고 세운 기념비인데 무엇보다도 그 당시 농업에 있어서의 수리시설(水利施設)과 관련되는 것이다.

 
   
g4.gif

 

비면에는 행간(行間)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각자(刻字)해 놓았는데 그 양면의 비문(碑文)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한 면은 임진년(丙辰年, 法興王 23, 536)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제를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축제기(築堤記)라고 할 성질의 것이라면, 다른 면은 정원 14년(貞元, 元聖王 14, 798)의 절대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제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는 수치기(修治記)라 할 것이다. 문체는 사독(史讀)을 넣은 신라속한문체(新羅俗漢文體)이다. 청제비의 서쪽으로 5m 떨어진 곳에 강희 27년(康熙, 肅宗 14, 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있다. 이 비의 형식은 화강암을 가공한 장방형으로 개석(蓋石)과 기석(基石)은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고 자경(字徑)은 전면 5cm, 후면 6.2cm로 행수(行數)는 10行과 14行이다.

 

댓글목록

김진회(밀)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진회(밀)
작성일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