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가 파평윤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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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3-20 18:39 조회2,705회 댓글0건본문
우리 안동김문은 역사적으로 파평윤씨와 많은 혼맥을 이어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파평윤씨 소정공후손이시며 시조의 34대손입니다
처가, 외가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자세로 이 글을 씁니다.
파평윤씨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44명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다.
또 왕비 4명을 배출해서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5명으로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조선시대에 총 정승수가 365명이었는데 이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 12명,
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 11명으로 6위를 차지하는 등
파평윤씨가 명문(名門)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라 하여 잉어를 잡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시조 윤신달과 윤관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평(坡平)의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윤씨(尹氏)
성을 가진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다.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에게 포위되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지만 건널 배가 없었다. 이때 잉어 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윤관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적군이 장군의 뒤를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신(尹彦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신(尹彦 )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문강공(文康公) 윤언신(尹彦 )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원사(元師)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西京)함락 때 큰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나라에 다녀왔고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사(元師)가 되어 이를 정벌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인물이다.
윤인첨의 아들 3형제 윤종악(尹宗 ), 윤종성(尹宗誠), 윤종양(尹宗양)도 대과에 급제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3형제씩 대과급제함으로써 이들 집안을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
이라 불렀다.
또 이들 후손 중에 참판공(參判公) 윤민신(尹民新)이 있었는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급제하였고 이중 한 사람이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가문에는 급제자가 많은 만큼 과거(科擧)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파평윤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이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윤호(尹虎),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이조판서에 오른 윤곤(尹坤), 태종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향(尹向),
수양대군의 장인이며 대사헌, 우참찬을 지낸 윤번(尹 ), 윤번의 아들 3형제인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 ), 윤사흔(尹士昕)은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윤번의 딸은
제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는 같은 시기에 왕비가 2명이 나왔다.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 그녀는 제12대 왕인 인종(仁宗)을 낳았다.
제2계비(繼妃)는 윤지임의 딸로 제13대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 윤임), 소윤(小尹, 윤원형)의 지목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하여 20년 간 서로 죽고 죽이는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도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
윤호(尹濠)의 딸이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른 윤희재(尹希齋),
청백리로 녹선되고 시문에 능해 호당(湖堂)에 뽑힌 윤현(尹鉉), 중종 때 우의정인
윤인경(尹仁鏡),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윤증(尹拯),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 영조 때 영의정인 윤동도(尹東度), 일제치하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이고 한국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윤봉길
의사도 파평윤씨다.
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 김재원 - 대부님 정말 감사 합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다시 몇번이고 읽어 보겠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섬세하고 자세하십니까
▣ 김주회 - 영환종친님! 잘 읽었습니다. 외가 이야기가 나와서 갑자기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적 엄마 손잡고 다녀오던 외가집이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헐어 없어졌지만...
▣ 김정중 - 좋은글 감사합니다
▣ 김재원 - 대부님 외가댁 훌륭하신 가문이 십니다.
저의 어머니도 파평윤씨 소정공후손이시며 시조의 34대손입니다
처가, 외가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자세로 이 글을 씁니다.
파평윤씨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44명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다.
또 왕비 4명을 배출해서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5명으로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조선시대에 총 정승수가 365명이었는데 이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 12명,
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 11명으로 6위를 차지하는 등
파평윤씨가 명문(名門)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라 하여 잉어를 잡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시조 윤신달과 윤관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평(坡平)의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윤씨(尹氏)
성을 가진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다.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에게 포위되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지만 건널 배가 없었다. 이때 잉어 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윤관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적군이 장군의 뒤를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신(尹彦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신(尹彦 )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문강공(文康公) 윤언신(尹彦 )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원사(元師)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西京)함락 때 큰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나라에 다녀왔고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사(元師)가 되어 이를 정벌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인물이다.
윤인첨의 아들 3형제 윤종악(尹宗 ), 윤종성(尹宗誠), 윤종양(尹宗양)도 대과에 급제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3형제씩 대과급제함으로써 이들 집안을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
이라 불렀다.
또 이들 후손 중에 참판공(參判公) 윤민신(尹民新)이 있었는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급제하였고 이중 한 사람이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가문에는 급제자가 많은 만큼 과거(科擧)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파평윤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이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윤호(尹虎),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이조판서에 오른 윤곤(尹坤), 태종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향(尹向),
수양대군의 장인이며 대사헌, 우참찬을 지낸 윤번(尹 ), 윤번의 아들 3형제인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 ), 윤사흔(尹士昕)은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윤번의 딸은
제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는 같은 시기에 왕비가 2명이 나왔다.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 그녀는 제12대 왕인 인종(仁宗)을 낳았다.
제2계비(繼妃)는 윤지임의 딸로 제13대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 윤임), 소윤(小尹, 윤원형)의 지목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하여 20년 간 서로 죽고 죽이는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도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
윤호(尹濠)의 딸이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른 윤희재(尹希齋),
청백리로 녹선되고 시문에 능해 호당(湖堂)에 뽑힌 윤현(尹鉉), 중종 때 우의정인
윤인경(尹仁鏡),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윤증(尹拯),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 영조 때 영의정인 윤동도(尹東度), 일제치하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이고 한국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윤봉길
의사도 파평윤씨다.
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 김재원 - 대부님 정말 감사 합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다시 몇번이고 읽어 보겠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섬세하고 자세하십니까
▣ 김주회 - 영환종친님! 잘 읽었습니다. 외가 이야기가 나와서 갑자기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적 엄마 손잡고 다녀오던 외가집이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헐어 없어졌지만...
▣ 김정중 - 좋은글 감사합니다
▣ 김재원 - 대부님 외가댁 훌륭하신 가문이 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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