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환 신도비 (김노 선조님 필적)원문과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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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6-24 15:41 조회1,486회 댓글1건본문
한세환(韓世桓) 신도비
장소;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시대;조선 중종31년(1536년)
이행 撰. 김노 書. 홍언필 誌
총고;183cm. 폭;70cm. 厚20cm
[원 문]
有明朝鮮國資憲大夫吏曺判書兼五衛都摠莩摠管 贈諡恭簡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成均館事李荇 撰 及第 金魯 書
公姓韓氏諱世桓字公瑞系出淸州遠祖諱蘭佐麗祖開國位極大尉階重大匡九世祖諱康都僉
議中贊修文殿大學士諡文惠其孫諱渥從忠宣王入元以秘謀脫王于禍封上黨府院君諡思肅思肅生諱方信修文殿大提學恭愍朝與三元帥平紅賊收復京城封西原君官至贊成事入 國朝有諱永知淳昌郡事 贈領議政府事於公爲高祖曾祖諱工曺正郞 贈議政府領議政祖諱致元軍資監僉正 贈吏曺判考諱運內贍寺僉正 贈兵曺判書禮安李氏靑丹道察訪諱愼之女 贈貞夫人自祖考以下其 贈皆以公貴公以成化庚寅七月六日生幼而端凝不妄遊戱早喪母家又寒素自以立揚爲責發憤學問殆廢寢食弘治壬子中司馬試登乙卯別科及第補承文院權知正字選入藝文館掌史職者二年擢司諫院正言轉禮兵兩曺佐郞陞司憲府持平吏兵曺正郞超弘文館副應敎俄遷議政府檢祥陞舍人以質正官隨千秋使朝 燕京還累陞敦寧府正是時燕山主政亂爲士者率以躁競爲心朝夕擢拔要顯而公獨恬退自守如庸常人未嘗見異雖不至於達而亦能免其禍焉公於是乎爲不可及矣及 聖上卽位加堂上階授司諫院大司諫入承政院爲同副承旨轉至都承旨以事左貶旋拜吏曺議會咸鏡道觀察使缺 上特命公超拜進階嘉善適道內饑荒餓莩相望公盡心賑救法爲簡易事甚精密民賴全活秩未滿以憂去位服除起爲漢城府右尹由吏曺判進階資憲判漢城府尹未幾拜吏曺判書兼都摠莩摠管時新進方得志以異同於已爲是非公獨不與之俯仰改知敦寧府事因出爲慶尙道觀察使秩滿又入判漢城尋授議政府左贊兼知春秋館事一日政府以事詣賓廳公亦在座 上傳敎曰戶曺判書有闕韓某精詳可昇是任時 中國使再至度支事劇公撮提綱要纖小無遺吏不能欺公自按嶺南勞悴職事因以成疾至是轉深屢쫝辭 上難其代不之許仍 命在告治官公尤不自安勉供職旣而上書懇請始改知中樞府事病旣殆 上命內醫診治遂不起嘉靖壬午쫝月十五日也壽五十三訃 聞輟朝二日 賜賻弔祭如例用是年四月六日葬于楊州長興里梨洞姑峴辰坐戌向之原公實質溫醇用心謙恪平生未嘗言人過失官雖尊顯亦不以勢位加人人無貴賤皆受敬焉事親至孝晨昏定省罔有少怠常以未及奉養大夫人爲慟對異味必乘涕性又儉素至爲宰相自奉甚薄其所居茅只治先人奮業廳前不容旋馬然爲妹窮族經理周至人以是益稱之夫人鷄林李氏 文昭殿直諱永齡之女生二男一女男長今司僕寺主簿次登丙戌文科今弘文館修撰娶判官尹坡童之女先娶大司憲成夢井之女生二男長克明車克昌浚娶忠義衛尹燁之女二孤以吾與公同榜及第也爲忘年之交且吾兒元福於公壻也有通家之分知公爲最密故來請銘在所不辭旣其事又爲之系曰 韓氏之顯 遠自高麗 大尉榮勳 統三之際 厥緖綿綿 以至文惠 思肅奮庸 不顯亦世 贊成承之 名位相繼 累代不振 贈封濟濟 我公復始 實惟其系 發憤爲學 手擢仙桂 玉堂銀臺 步無滯官自我有 不疑何筮 出按南北 民歌所憩 入掌京兆 訟無蔽 秉銓天曹 不于勢 一屈何傷 儒者知勵 公之用心 聖明所諦 惟國先務 莫難會計 命判度支 寧告勞 其綱維 罔遺巨細 夙夜慄慄 以踰期歲 一病遂殆 許告在第 診以內醫 分以內劑 奄至莫救 彼蒼何九重輟朝 禮官弔祭 天寵之隆 前凌無逮 公心恪恭 公性愷悌 食無兼味 屋心補敞 奉公如私 至死不替 受施非虛 豈天不慧 長興之原 是公之 庶幾無 昭哉浚裔
公之夫人李氏凌公卒十二年癸巳十月甲申以疾終越三月壬申于公墓之北替李公思鈞誌之詳矣其派
系曰李氏新羅望族世兼顯入 國朝高祖諱後曾祖諱世男繼爲法官之佐大父諱蕃全州府尹考諱永齡
文昭殿直殿直娶參議李翊之女成化甲午生夫人其內範曰幼在敎訓見聞染罔非端貞及歸于公祗事尊章家肥而思夫貴而不盈服公之喪極敬盡禮哀毁傷性餘具碑誌嗚呼判書公之下世久矣碑今雖其文之就也盖亦久矣肆夫人系行不能追載郞公之碑陰以書之此修撰之志也陵谷之變也而其不白者則撫于貞泯以傳也無疑矣其志固不亦哀乎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春秋館事洪彦弼誌
嘉靖十五年五月 日立
[번역문]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공간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이행(李荇)은 글을 짓고,
급제 김노(金魯)는 글을 쓰다.
공의 성은 한씨(韓氏)요 이름은 세환(世桓)이며 자는 공서(公瑞)다. 그 본관은 청주(淸州)에서 나왔다. 원조(遠祖)의 이름은 난(蘭)인데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고, 벼슬은 최고로 올라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었다. 9세조인 강도(康都)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를 겸하였고 문혜(文惠)란 시호를 받았다. 그 손자 악(渥)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가 은밀한 계책으로써 왕을 도와 화를 면하게 하였으며 그 공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돌아가신 후 사숙(思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숙공은 방신(方信)을 낳았는데 벼슬이 수문전 대제학이 되었고 공민왕 때에 세 원수(元帥)와 더불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이로써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국조(國朝 ; 조선)에 들어와서는 영정(永)이 있어 벼슬이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였고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使)로 추봉되었는데 이 분이 공에게는 고조 할아버지가 된다. 증조 할아버지는 이름이 질()로서 벼슬이 공조 정랑이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치원(致元)인데 군자감 첨정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운(運)인데 내섬시 첨정을 지냈고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예안 이씨로서 청단도 찰방(靑丹道察訪)을 지내신 신(愼)의 딸이며 정부인으로 추봉되었다. 할아버지에서 부모에 이르기까지 모두 추봉된 것은 공의 품계가 높아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경인년(1470, 성종 원년) 7월 6일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의지가 굳세었고 함부로 유희를 즐기지 않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집 또한 가난하였으나 평소부터 스스로 몸을 일으켜 발분하여 학문에 힘써 잠자는 것과 밥먹는 것 조차 잊을 정도였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 2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을묘년(1495, 연산군 원년)에는 문과 별과(別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와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의 직을 맡았다. 사관의 직에 있은지 2년 후에 사간원의 정언으로 발탁되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사헌부의 지평으로 승진되었다. 이후 병조 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 부응교에 올랐으며 얼마되지 않아 의정부 검상으로 천용(薦用)되었다가 사인으로 올랐다. 이때 정관(正官)1) 질(質)을 수행하여 천추사(千秋使)로서 연경(燕京)에 조하(朝賀)하였으며 돌아오자 벼슬이 여러차례 올라 돈녕부 정(敦寧府正)에 이르렀다. 이때는 연산주(燕山主)가 재위에 있었던 시기인데 정치가 문란하여 선비된 자들은 대개가 벼슬길에 빨리 승진하는데 연연하니 아침 저녁으로 현관(縣官)으로 득달(得達)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조용히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며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하고 조금이라도 범상한 일은 하지 않았다. 이로써 비록 벼슬은 크게 높이지 않았지만 역시 화를 입음은 면하였다.
성상(聖上 : 중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당상(堂上)의 품계를 더하고 사간원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고 또 여러번 옮겨 도승지에 이르렀다. 이후 어떤 일로서 좌천되었다가 곧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이때에 함경도의 관찰사 자리가 비었으므로 왕께서 특명으로 이를 제수하고 품계를 올려 가선(嘉善)으로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보니 당시 도내에는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공은 힘을 다하여 이들을 구휼(救恤)하고 법을 간편히 하며 또 일을 처리함이 정밀하니 백성들은 이에 힘입어 다시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임기가 다하지 않았는데 상(喪)을 만나 벼슬에서 물러났다. 상복을 벗자 다시 임용되어 한성부 우윤이 되었고 이조 참판을 거쳐 품계가 자헌(資憲)으로 오르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오래지 않아 이조 판서를 제수받고 겸하여 도총부(都摠府)의 도총관을 제수받았다. 때에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바야흐로 뜻을 얻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르면 시비(是非)를 따졌는데 공은 홀로 이들의 시비에 말려들지 아니하였다. 지돈녕부사를 제수받았다가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임기가 차자 또 들어와 판한성이 되었고 또 의정부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가 되었다.
하루는 정부에 일이 있어 빈청에 갔는데 공도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왕께서 전교(傳敎)하기를 ꡒ호조판서가 비었는데 한모(韓某)가 일을 정밀하게 잘하니 마땅히 그 소임을 맡기도록 하자ꡓ고 하였다. 때에 중국사신이 두 번째 왔는데 이들을 접대하는 재정의 일이 아주 번잡한지라 공께서 일을 직접 지휘하여 일일이 간여하면서 조그마한 착오도 없도록 하니 관리들이 능히 공을 속이지 못하였다. 이후 영남(嶺南)을 안찰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아 몸이 수척하여 갔고 마침내 일 때문에 병을 얻게 되었다. 병이 점점 심해가니 이에 공께서 여러차례 사면할 뜻을 올렸으나 왕께서 그 후임을 구하기 어렵다 하여 공의 뜻을 허락하지 않고 집에서 병을 치료하면서 정사를 베풀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더욱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열심히 일에 종사하면서 다시 간곡한 글을 올려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병이 이미 위급하니 왕께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 17) 정월 15일이었다. 향년 53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왕께서 이틀간 조정을 쉬며 조의를 표하였고 부조를 내리고 장례를 치르게 함을 관례에 따라 행하도록 하였다. 이해 4월 6일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 이동(梨洞) 고현(姑峴)의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서쪽을 향한 언덕에 장례를 모셨다.
공은 충성스러웠고 성품은 온순하였으며 마음가짐은 항상 겸손하였다. 평생토록 일찍이 사람들의 과실에 대하여는 말한 일이 없었으며 비록 벼슬은 현달하여 귀하게 되었지만 역시 권세의 위엄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없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귀한 자 천한 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공을 좋아하고 존경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지극한 효로 하여 신혼정성(晨昏定省)을 몸소 행하여 조금도 태만함이 없었으며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봉양하니 대부인(大夫人)께서는 감동하시었고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시었다. 성품 또한 검소하여 재상에 이르렀어도 스스로 경계하여 생활이 심히 어려웠으며 공이 사는 바의 집은 단지 선조께서 사시던 집을 수리하였을 뿐이었고 관청에 출근할 때는 말을 타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된 누이나 어려운 친족이 있으면 살림을 도와주고 두루 보살펴 주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모두 공을 더욱 칭찬하였다.
부인은 계림(鷄林 : 경주) 이씨(李氏)로서 문소전(文昭殿)의 전직(殿直)인 영령(永齡)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헌()이니 지금 사복시의 주부로 있고, 2남은 두()인데 병술년의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은 홍문관의 수찬으로 있다. 헌은 판관(判官)인 윤파중(尹坡重)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였고, 두는 첫부인으로 대사헌 성몽정(成夢井)의 딸을 취하여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극명(克明)이고 차남은 극창(克昌)이다. 후부인으로 충의위(忠義衛) 윤엽(尹燁)의 딸을 취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이 두 아들은 내가 공과 더불어 동방급제(同榜及第 :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함)이며 공과는 망년지교(忘年之交 : 평생의 벗)의 관계에 있고, 또 내 아들 원복(元福)이 공에게는 사위가 되어 양가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공을 가장 잘아는 이는 나라고 하여 찾아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이미 공의 행적을 위에 적었고 이어 명을 지어 잇고자 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한씨의 현달함이여! 멀리 고려시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구나.
태위께서 공훈 세우시어 삼국(三國) 통일하였구나.
그 후손 면면히 대이어 문혜공(文惠公)에 이르렀네.
사숙공(司肅公)이 빼어나니 세상에 이름없을쏘냐.
찬성공(贊成公)이 대를 이어 명위(名位)를 이었도다.
선대(先代)가 떨치지 않을 수 있으랴. 증봉 받아 이름났네.
우리 공 다시 나니 참으로 가계 빛내도다.
분발하여 학문하니 과거보아 장원일세.
옥당은대(玉堂銀臺) 들어가니 그 활보 그침이 없네.
벼슬이 공과 함께 있으니 어느 누가 의심하며 어느 누가 모함하리.
남북으로 안찰하니 백성들 노래 불러 그 공(功) 찬양하네.
들어와 서울을 다스리니 소송도 없어지고 은폐함도 없어졌네.
천조(天曹)에서 인사를 전형하니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도다.
한번 굽혀 어찌 도를 상하게 할 것이랴.
비겁한 사람들아 어찌 이 뜻 알겠는가.
공께서 마음쓰심 성명(聖明)께서 아셨네.
오직 생각하심 나라의 일이니 나라 살림 지키기 참으로 어렵도다.
판탁지(判度支) 명하시니 어찌 노고 아낄건가?
강요적어 감찰하니 나라 살림 넉넉했네.
자나깨나 나라 걱정 그 생각에 세월갔네.
한번 병나 위독하니 집에 있어 정사(政事)하게 되었도다.
내의(內醫) 보내 진료하고 왕궁에서 약지어 보내셨네.
하늘이 불렀으니 구할 수 있을 건가.
이미 저세상 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할까.
왕께서 철조(輟朝)하고 예관(禮官)보내 장례했네.
왕의 은총 융숭하니 전후(前後)에 그 예(禮) 없었네.
공의 마음 겸손하고 공의 품성 단아했네.
음식은 소박하고 집은 선대를 보수하였을 뿐이네.
나라일 받들기 사심없이 하였도다.
이생각 죽을 때까지 가지셨네.
하늘의 베품이 어찌 허망하다고만 하리요.
하늘이 어찌 어질지 않다고만 탄식하리요.
장흥(長興)의 언덕 이곳이 공의 무덤이로다.
무릇 더 첨가하여 무엇하랴.
후손들이여 길이 공의 뜻 살필지라.
공의 부인 이씨는 공이 돌아가신지 12년 후인 계사년(1533, 중종 28) 10월 갑신일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3개월 후인 임신일에 공의 묘소 북쪽에 장례를 지냈다. 참찬 이사균(李思鈞)이 그 지(誌)를 써서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씨는 신라의 망족(望族 : 훌륭한 가문)으로서 대대로 벼슬하여 현달하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고조 할아버지인 후(後), 증조 할아버지인 세남(世男)이 대를 이어 벼슬하여 왕을 도왔으며, 할아버지는 이름이 번(蕃)인데 벼슬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영령(永齡)인데 벼슬이 문소전직이었고, 전직께서 참의 이익(李翊)의 딸을 취하여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 5)에 부인을 낳았다. 아녀자로서의 법도가 넘쳤으며 어릴 때부터 교훈을 받아 보는 듯한 것은 내훈(內訓)이었으며 몸가짐이 단정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공에게 시집와서는 제사를 받들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데 성심으로 하였고 집이 부유하게 된 뒤에도 항상 가난했을 때를 생각하면서 검소하였고 부군이 귀하게 되어도 항상 화려한 의복은 입지 않았다. 공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지극한 정성으로 예(禮)를 다하였으며 애통하고 슬퍼하심이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다. 나머지는 모두 묘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생략한다.
오호라! 판서공(判書公)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도다.
비(碑)가 지금 비록 있어 그 글이 있으나 역시 오래되어 마모가 심하고
모 부인의 계보와 행실은 기록하지 않았도다.
이에 공의 비석에 부인의 계행(系行)을 음기하고 이 글을 수찬(修撰)한 바이다.
능곡(陵谷)의 변한 모습이여!
지금까지 찾아뵙지 못한 자손들
정민(貞泯 : 굳고 좋은 돌)의 돌에 새긴 비석 어루만지니
공의 뜻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이 뜻 또한 갸륵하지 아니한가?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춘추관사 홍언필(洪彦弼) 지(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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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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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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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